25.03.18 15:00최종 업데이트 25.03.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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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축산업계가 30개월 이상된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한국의 검역 규정을 개선이 필요한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 지목하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한국의 소고기 월령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한 가운데 지난 12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미국산 소고기가 진열돼 있다연합뉴스

지금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민감국가'가 돼야 할 나라는 미국이다. 마구잡이로 관세전쟁을 도발하는 이 나라는 자국을 대하는 세계 각국의 시선에 극히 무디다. 다른 나라의 생존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

미국 축산업계를 대표하는 전국소고기협회(NCBA)는 트럼프발 무역전쟁에 편승해 30개월 이상 소고기까지 수출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30개월 미만만 수입하는 한국의 무역규제를 없애달라고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요구했다. 2008년에 광우병 사태가 한국 전역을 들썩였고 한국인들이 30개월 이상에 우려를 품고 있음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다.

한국 국민들을 무시하는 처사

안 그래도 한국은 미국산 소고기를 많이 수입한다. 미국 농무부 해외농업청(FAS) 홈페이지에 실린 2023년 12월 14일 자 '국제농업무역 보고서'는 "한미자유무역협정에 힘입어 남한은 2022년에 미국 소고기 제품의 최대 목적지였다"고 말한다.


미국 대륙 정중앙인 캔자스주에 기반을 둔 축산뉴스 사이트인 <피드롯(Feedlot)>의 지난해 7월 11일 자 기사는 "미국 소고기의 상위 5대 목적지는 2024년 5월 전체 소고기 수출의 76퍼센트로 집계됐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나라들에는 일본·남한·중국·멕시코·캐나다가 포함된다"라고 열거한다.

이처럼 한국은 미국 소고기의 단골 중의 단골이다. 이런 한국이 30개월 이상 소고기를 온몸으로 거부한 일이 있는데도, 미국 축산업계는 이를 무시하고 트럼프발 무역전쟁에 올라타려 한다. 민감하지 못한 처사다.

인공지능(AI) 같은 첨단산업이 미국 경제를 주도하고 있지만, 소고기 산업은 미국 산업의 근간이다. 이 산업은 미국인의 먹거리에서 주요 비중을 차지할 뿐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 발달사에서도 결정적 위상을 점한다. 이런 산업의 요구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수용하게 되면, 한국의 대미 무역전쟁은 그만큼 버거워질 수밖에 없다.

앵글로색슨족이 토착 인디언들을 서부로 몰아내면서, 인디언들의 영양 공급원인 버펄로도 서부로 밀려갔다. 이 대륙의 토착 인류가 죽임을 당하면서 토착 들소도 사라져갔다. 미국 환경철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서부 평원은 정복되고 식민화되었으며 원주민들은 대부분 전멸하다시피 했다"라고 한 뒤 "대평원의 버펄로들은 대량으로 학살"됐다고 말한다.

인디언의 땅이 앵글로색슨족의 땅이 된 것처럼, 버펄로의 땅은 소의 땅이 됐다. 버펄로들이 빼앗긴 땅은 서유럽 전체와 맞먹는 세계 최대의 목초지였다. 이 땅을 앵글로색슨족의 동맹자들인 소들이 갖게 됐다. <육식의 종말>은 미국인의 서부 개척은 실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소 떼의 이동"이었다는 미국 역사학자 프레데릭 잭슨 터너(1861~1932)의 통찰을 인용한다.

이처럼 소고기 산업은 미국의 건국산업이나 마찬가지다. 인디언과 버펄로를 짓밟고 일어섰으니 이 산업은 태생부터가 지극히 침략적이다. 그런 산업이 지금 한국을 바라보며 한층 더 군침을 흘리고 있다.

미국이 소고기 전쟁 시작하면, 우리 한우농가는 어쩌나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의 모습.유성호

소고기 산업은 미국 자본주의 형성에도 결정적 토대를 제공했다. <붉은고기 공화국(Red Meat Republic)의 저자인 조슈아 스펙트(Joshua Specht) 호주 모내시대학(Monash Univ.) 교수와의 인터뷰를 담은 2019년 5월 9일 자 <시빌 잇츠(Civil Eats)> 기사는 "소고기가 미국의 현대를 만든 것과 동시에 미국은 현대의 소고기를 만들었다"는 이 책 서문의 한 문장을 들려준다. 캘리포니아주에 기반을 둔 식품·농업 뉴스 사이트인 <시빌 잇츠>는 소고기를 중심으로 현대 미국의 국가시스템이 구축된 과정을 고찰한 결과물이라고 이 책을 평한다.

앵글로색슨족과 소들이 인디언과 버펄로를 거의 몰아낸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소고기 가격이 급등했다. <요리 인류사>의 저자인 권은중 한겨레 기자가 2017년 7월호 <인물과 사상>에 기고한 '소고기의 붉은 살에서 튀어나온 현대 자본주의'는 "공짜나 다름없는 서부의 목초지는 미국인은 물론 유럽인의 관심을 끌었다"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특히 기름진 소고기를 선호하던 영국인들이 주목했다. 1860년 유럽에는 탄저병이 돌아 영국의 소고기 공급지인 아일랜드를 비롯해 목축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유럽의 소고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소고기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미국은 영국인이 좋아하는 기름 낀 소를 키워낼, 옥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을 향한 소고기 수출은 이 제품을 대서양 연안까지 날라줄 운송 시스템에 대한 수요를 높였다. 이는 미국 철도산업을 발달시키는 동력이 됐다. "소고기 부족에 아우성이던 영국의 금융자본은 미국의 철도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했다"라며 "영국에 더 많은 소고기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라고 위 기고문은 설명한다.

소고기 수출을 위한 철도 건설은 미국 산업혁명뿐 아니라 주식시장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윗글은 "소 덕분에 미국은 세계 최장의 철도가 깔린 철도 왕국이 되었다"라며 "철도에 미국은 물론 유럽 각국의 돈이 몰리면서 미국의 철도는 증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라고 한 뒤, "철도주를 사고팔았던 뉴욕 증시는 19세기 초 시골의 증권거래소에서 1860년대 세계 최대 증권시장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뉴욕 증시에서 결정되는 다우지수·S&P500지수·나스닥지수는 세계 경제에 즉각적 파급력을 끼친다. 뉴욕 증시가 이런 힘을 갖게 된 밑바탕에 철도산업과 더불어 소고기 산업이 있다. 그 소고기의 단백질이 미국 경제의 체질을 크게 좌우했다. 이를 감안하면, 조슈아 스펙트의 책 제목은 <붉은고기 공화국>이 아니라 <붉은고기 제국>이 됐어도 과하지 않다.

미국 자본주의의 근간인 소고기 산업이 트럼프발 무역전쟁에 본격 탑승하게 되면, 이 분야의 통상전쟁에 투입되는 미국의 에너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자국의 주요 산업일 뿐 아니라 건국 산업이기도 한 이 업계가 한국과의 통상전쟁에 뛰어들게 되면 그만큼 힘이 실리게 된다.

단골 중의 단골도 못 알아보고 오로지 나 홀로 살아남겠다며 남의 사정 따위에는 한없이 둔감해진 미국이 소고기 전쟁에도 불을 붙이게 되면, 한국 축산업과 한우 농가는 한층 치열한 생존 투쟁의 장으로 떠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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