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0 11:13최종 업데이트 25.03.2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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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60~70년대 졸업식을 기억하는 이들의 머릿속엔 파카 만년필이 있습니다. 워터맨, 쉐퍼와 함께 한때 만년필계를 주름잡던 업체들입니다. 현대 만년필계는 삼각형 구도입니다. 하단 좌우에 이탈리아와 일본이 있고, 상단 꼭짓점에 독일이 있습니다.

독일은 라미, 카웨코, 스테들러를 포함한 여러 브랜드를 보유한 만년필 강국이며, 그중에서도 몽블랑, 펠리칸 그리고 그라폰의 존재감이 발군입니다. 몽블랑의 존재감이야 이미 도드라진 지 오래고, 펠리칸 역시 만만찮습니다. 그못잖게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브랜드가 바로 그라폰 파버카스텔 Graf von Faber-Castell 입니다.


자동차계에서 제네시스와 렉서스는 각각 현대와 도요타의 프리미엄 브랜드입니다. 만년필계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파이롯트가 창업자의 이름을 딴 나미키라는 상위 브랜드를 운용한다면, 그라폰의 근본은 파버카스텔입니다.

나무에 진심인 파버카스텔

파버카스텔은 1761년 독일 스테인에서 시작해 올해로 264년을 맞았으니, 현존 대형 필기구 제조사 중 가장 긴 업력을 가진 셈입니다. 내년에야 창립 120주년을
맞는 몽블랑의 역사는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합니다. 1929년 첫 만년필을 출시한 펠리칸이 잉크를 생산하던 1838년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도 견주기 힘듭니다. 파버카스텔의 뒷그림자가 이미 80년 가까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니까요.

몽블랑은 고가 만년필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대중화된 명품으로 이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라폰은 차별화된 명작이라 부를 만합니다. 몽블랑과는 결이 다른 고급감으로 마니아층이 두텁습니다.

그라폰은 파버카스텔에서 1993년 론칭한 상위 브랜드입니다. 이제 30여 년을 살짝 넘은 정도니, 백년 기업이 무수한 만년필계에선 내세우기 힘든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만년필 제조사와 견줘도 밀리지 않습니다. 파버카스텔이라는 강력한 모체가 뒤를 받쳐주는 까닭입니다. 파버카스텔이 평범함 안에서 가치를 찾아간다면, 그라폰은 비범함 속에서 의미를 더해가는 형국입니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Graf von Faber-Castell김덕래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합니다. 더는 경험이 지혜의 척도가 아니라고도 합니다. 오래되었단 것만으론 존중받기에 부족합니다. 경험 자체가 연륜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연륜이 쌓이면 경륜이 됩니다. 경륜의 미덕은 정진에 있습니다. 단단해진 앎의 밀도가 가치를 획득하려면 부단히 나아가야 합니다.

만년필을 만드는 소재는 다양합니다. 레진, 스틸, 황동, 금, 은, 플라스틱, 셀룰로오드, 마크롤론, 티타늄, 화산석, 대리석, 유리 등등 무수합니다. 필기구 재료는 여럿입니다만, 이중 가장 자연에 가까운 소재는 두말없이 나무입니다.

나무로 만드는 대표적인 필기구는 연필입니다. 몸통이 삼각이나 팔각은 물론 원형으로 된 연필도 있지만, 대부분은 육각입니다. 각이 많아질수록 손에 쥐었을 때 일체감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아예 원형으로 만들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용하다 책상 위에 눕혀놓으면, 또르르 구르다 바닥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으니까요. 육각은 각진 면의 개수가 적당해 손안에서 이질감이 없고, 몇 바퀴 굴러도 자연스럽게 멈춥니다. 그립감과 실용성 둘 다 획득한 형태가 육각 연필입니다.

파버카스텔은 어떤 만년필 제조사보다 나무에 진심입니다. 환경친화적 소재인 나무는 손에 쥐었을 때 따뜻한 느낌이 먼저 들지만, 금속 소재에 비하면 변형되기 쉽습니다. 더러 습한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면, 연필 몸통 전체가 휘어지기도 합니다. 금속으로 펜을 만들면 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섬세한 손놀림이 담보되지 않으면 자칫 둔해 보일 여지가 있습니다. 그라폰은 이 두 소재를 아우르는 능력이 빼어납니다.

단단하고 미려한 마카사르 우드를 사용해 만든, 그라폰 클래식 마카사르 만년필김덕래

나무로 만든 펜을 오래 써 손때가 묻으면, 지저분하다기보단 멋스럽게 여겨집니다. 남이 낸 상처는 흠일지언정, 내 흔적이 더해진 펜은 되레 살갑습니다. 녹진한 감성을 논하기 이전에,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내 것'이란 표식이니까요.

변색되어도 걱정 없는 은

은은 금속임에도 가공이 용이한데다, 금에 비해 가격대도 낮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며 고급감이 뛰어납니다. 또 항균효과가 있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친숙한 소재입니다. 은수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다만 공기 중에 노출되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표면이 변색되는 성질이 있어, 아예 유화처리하기도 합니다.

은이 변색되는 까닭은, 사용자가 험히 다뤄서가 아닙니다. 소재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무리 배움이 깊고 영향력이 넓더라도, 사람인 이상에야 나이를 먹으면 피부 탄력이 떨어집니다. 이마에 주름이 생기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야속하다 생각할 필요가 있으려고요. 충분하다 싶을 만큼의 숙면을 취하고 얼굴 구석구석 보습크림을 바르면, 어제보다 피부톤이 조금이나마 밝아집니다. 그걸로 좋습니다.

은으로 만들어진 펜이 거무스름해졌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은 세정용 융이나 약품을 쓰면 손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그조차 번거롭다 여겨진다면, 생각의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면 그뿐입니다. 마치 캡에 이름을 각인하는 것처럼, 몸통 전체를 내 것이란 표식으로 휘감았다 여기는 거죠. 어디까지나 손상된 것이 아니라, 세월이 펜에 내려앉은 것뿐이니까요.

분명 생산된지 오래된 펜임에도 외양이 너무 말끔하면, 되레 이질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원로가수나 누구나 아는 노배우 얼굴에 자리잡은 주름은 관록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변색된 은의 광택을 되살리는 과정김덕래

제 몸통을 깎아야만 쓸 수 있는 연필은 어쩐지 애처롭습니다. 심만 넣으면 마냥 써지는 샤프엔 정이 덜 가고, 다 쓴 심은 바꾸면 그만인 볼펜은 애틋함이 없습니다. 수성펜은 볼펜보다 훨씬 부드럽게 써지는 장점이 있지만, 사용 후 캡을 닫아놓지 않으면 낭패를 봅니다. 새 심일지언정 수명이 급격히 줄어 안타깝습니다.

연필도, 샤프도, 볼펜도, 수성펜도 다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만, 아날로그 필기구 정점에 있는 도구는 역시 만년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손이 가는 '쓸 것'이라서입니다. 강아지나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고로움이 드는데, 이런 점들이 만년필에 더 깊이 빠지는 요인이 됩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라폰은 쫀쫀한 펜촉에서 빚어지는 탄력감이 일품입니다. 금촉임에도 버팀성이 적당히 있는 편이어서 마음 놓고 쓰게 되더란 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꾹꾹 눌러가며 쓰면 곤란하겠지만, 믿고 사용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라폰은 배럴이 슬림한 모델이더라도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주로 금속과 나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필기구는 무조건 가벼워야 미덕이라 여긴다면, 구매 전 꼭 실물을 쥐어보길 권합니다.

밀도 있는 삶을 추구한다면

은과 나무는 성질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살짝 차이 나는 게 아니라, 아예 대척점에 서있습니다. 소재나 질감 자체가 영 딴판임에도, 그 와중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쓰면 쓸수록 길이 나고, 점점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새것이 주는 산뜻함도 물론 좋지만, 잘 에이징 된 가죽 가방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결례가 되는 것처럼, 은근할지언정 나름의 존재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단순미를 논할 계제가 되지, 선에서 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무심한 것에 그치면 재미없습니다. 금속을 세심하게 다루는 그라폰의 강점이 이때 빛을 발합니다. 외양은 날렵하지만 무게감은 어떤 브랜드의 핵심 모델 못잖습니다.

배럴 전체에 길고도 균일하게 난 세로골이 특징인 '타미시오'와 끈을 꼬아놓은 듯한 특유의 패턴이 인상적인 '기로쉐'를 하위 라인으로 두고, 백금이나 순은을 포함해 여러 광물로 빚어내는 '올해의 펜Pen Of The Year' 시리즈가 상위에 있긴 하지만, 그라폰의 핵심은 역시나 '클래식' 라인입니다.

마치 섬유의 씨줄과 날줄처럼 금속과 나무가 서로를 보듬는 조화로움이 기막힙니다. '그레나딜라'에서 시작해 '파남부코'를 거쳐, '에보니'와 '마카사르'로 이어지는데, 각각의 나뭇결이 미려하면서도 변형률이 낮아 신뢰할 만합니다. 레진 소재의 몽블랑 146이나 펠리칸 M800의 무게가 25~30g 언저리인데, 상대적으로 짧고 가느다란 클래식 라인은 40g 선입니다. 밀도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적격입니다.

권력과 위력을 합쳐 권위라 합니다. 권위는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나이 많음이 지혜로움과 같은 뜻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지난 세월을 존중하는 까닭은, 세상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 분명합니다만,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또 미래가 있습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대고 있어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마땅한 이치입니다.

좋은 책 한 권, 잘 만든 영화 한 편, 혹은 감동적인 음악 한 곡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 두 세기 반이 훌쩍 넘는 서사가 켜켜이 담긴 만년필 한 자루의 힘이 그보다 덜할 리 없습니다.

그라폰 기로쉐 코냑 만년필 시필 테스트김덕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구전문잡지 온더데스크 On the Desk 7호(2025.봄)에도 실립니다.연일 기막히고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기사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다스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수영하다 숨 쉴 타이밍을 놓치면 위험해지는 것처럼, 우리 모두 물 위에서 살지만 자칫 삶의 중요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기구 한 자루에 무슨 큰 힘이 있을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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