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변색된 은의 광택을 되살리는 과정
김덕래
제 몸통을 깎아야만 쓸 수 있는 연필은 어쩐지 애처롭습니다. 심만 넣으면 마냥 써지는 샤프엔 정이 덜 가고, 다 쓴 심은 바꾸면 그만인 볼펜은 애틋함이 없습니다. 수성펜은 볼펜보다 훨씬 부드럽게 써지는 장점이 있지만, 사용 후 캡을 닫아놓지 않으면 낭패를 봅니다. 새 심일지언정 수명이 급격히 줄어 안타깝습니다.
연필도, 샤프도, 볼펜도, 수성펜도 다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만, 아날로그 필기구 정점에 있는 도구는 역시 만년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손이 가는 '쓸 것'이라서입니다. 강아지나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고로움이 드는데, 이런 점들이 만년필에 더 깊이 빠지는 요인이 됩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라폰은 쫀쫀한 펜촉에서 빚어지는 탄력감이 일품입니다. 금촉임에도 버팀성이 적당히 있는 편이어서 마음 놓고 쓰게 되더란 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꾹꾹 눌러가며 쓰면 곤란하겠지만, 믿고 사용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라폰은 배럴이 슬림한 모델이더라도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주로 금속과 나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필기구는 무조건 가벼워야 미덕이라 여긴다면, 구매 전 꼭 실물을 쥐어보길 권합니다.
밀도 있는 삶을 추구한다면
은과 나무는 성질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살짝 차이 나는 게 아니라, 아예 대척점에 서있습니다. 소재나 질감 자체가 영 딴판임에도, 그 와중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쓰면 쓸수록 길이 나고, 점점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새것이 주는 산뜻함도 물론 좋지만, 잘 에이징 된 가죽 가방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결례가 되는 것처럼, 은근할지언정 나름의 존재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단순미를 논할 계제가 되지, 선에서 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무심한 것에 그치면 재미없습니다. 금속을 세심하게 다루는 그라폰의 강점이 이때 빛을 발합니다. 외양은 날렵하지만 무게감은 어떤 브랜드의 핵심 모델 못잖습니다.
배럴 전체에 길고도 균일하게 난 세로골이 특징인 '타미시오'와 끈을 꼬아놓은 듯한 특유의 패턴이 인상적인 '기로쉐'를 하위 라인으로 두고, 백금이나 순은을 포함해 여러 광물로 빚어내는 '올해의 펜Pen Of The Year' 시리즈가 상위에 있긴 하지만, 그라폰의 핵심은 역시나 '클래식' 라인입니다.
마치 섬유의 씨줄과 날줄처럼 금속과 나무가 서로를 보듬는 조화로움이 기막힙니다. '그레나딜라'에서 시작해 '파남부코'를 거쳐, '에보니'와 '마카사르'로 이어지는데, 각각의 나뭇결이 미려하면서도 변형률이 낮아 신뢰할 만합니다. 레진 소재의 몽블랑 146이나 펠리칸 M800의 무게가 25~30g 언저리인데, 상대적으로 짧고 가느다란 클래식 라인은 40g 선입니다. 밀도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적격입니다.
권력과 위력을 합쳐 권위라 합니다. 권위는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나이 많음이 지혜로움과 같은 뜻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지난 세월을 존중하는 까닭은, 세상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 분명합니다만,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또 미래가 있습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대고 있어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마땅한 이치입니다.
좋은 책 한 권, 잘 만든 영화 한 편, 혹은 감동적인 음악 한 곡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 두 세기 반이 훌쩍 넘는 서사가 켜켜이 담긴 만년필 한 자루의 힘이 그보다 덜할 리 없습니다.
▲그라폰 기로쉐 코냑 만년필 시필 테스트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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