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멘 시미즈>의 대표 메뉴 시오 라멘
여운규
미세먼지며 황사가 기승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봄이 온 게 분명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좀 멀리 걸어갈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있어 사무실을 나선 순간 곧바로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회사 바로 옆 골목만은 좀 벗어나 보자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가고 싶을 때 동행이 있다면 그 또한 조심스럽겠지만 오늘처럼 혼밥하는 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혼밥을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간단한 면 요리다. 먹기 좋고 간편하고 맛있으면서 먹고 난 뒤 든든한 국수가 뭐 없을까. 잔치국수는 좀 가볍고 짜장면은 조금 무겁다. 문득 즐겨 보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이 생각난다.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 참 멋진 대사가 아닌가. 그렇다. 고로 상이 생각난 김에 일본 라멘을 먹어볼까. 고로 상 역할을 오랫동안 해 온 그 배우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라멘을 꼽던데.
여행 온 기분 들게 하는 맛있는 라멘
광화문 일대의 직장인들 사이에서 깔끔한 시오 라멘을 잘 한다고 소문난 <라멘 시미즈>에 도착했다. 일찍 나온다고 서둘렀지만 실내는 만석. 키오스크에 주문을 하고 바깥 복도에서 기다렸다. 삼삼오오 대기하는 손님들이 보인다. 열리는 문틈으로 슬쩍 들여다보니 역시 혼자 앉아서 드시는 손님들이 제법 계신다. 십분 남짓 기다렸을까. 차례가 되어 입장했다.
테이블 없이 바 형태의 좌석만 나란히 늘어서 있고, 벽면에는 손님들의 외투를 걸 수 있는 옷걸이가 보인다. 여행 가서 익히 봐왔던, 꽤 고급스러운 현지 라멘집 분위기다. 이거 왠지 여행 온 것 같네. 기대감이 증폭된다. 서울의 다른 가게에서는 주로 진한 맛의 돈코츠 라멘을 많이들 취급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는 소금 베이스의 시오 라멘과 간장으로 간을 한 소유라멘 두 가지만 있다. 배가 고팠던 나는 시오라멘 한 그릇에 곱빼기 삼아 별도로 면 추가를 주문했다. 추가 면은 라멘을 반쯤 먹다가 요청하면 그 때 내어주는 시스템이다.
시오라멘이 나왔다. 기름이 살짝 뜬 투명하고 맑은 국물에 면 사리가 얌전히 담겼다. 고명은 돼지고기 차슈와 닭가슴살, 그리고 죽순 두 조각. 계란을 별도로 주문할까 하다가 일단 참았다. 기본 메뉴 본연의 맛이 우선이다.
국물부터 한 술 딱 뜨는데 아아 이것은, 깔끔 개운한 국물에서 진한 감칠맛이 폭발한다. 너무너무 맛있다. 그런데 짜긴 짜다. 야 이거 진짜 맛있는데 제법 짜구나. 나처럼 짜게 먹는 사람 입에 이 정도로 느껴진다면 확실히 염도가 센 거다. 좌석 앞에는 "국물이 짜거나 싱거우면 조절해 드리겠다"는 안내문이 있다. 좀 덜 짜게 해 달라고 할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일본 여행에서 먹었던 라멘도 대체로 짰다. 진하고 맛있는 국물이었지만 간이 좀 세긴 했어.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면 위주로 먹고, 국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그야말로 일본 현지의 맛에 충실한 집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도 가게의 콘셉트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면을 한 젓가락 먹어보고 그런 심증을 굳히게 된다. 아주 가늘진 않고 중간 정도의 두께인 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한다는 '잘 익은' 면이 아니다. 오히려 심지가 약간 씹히고 딱딱한 느낌이 있다. 파스타에서 말하는 '알 덴테' 같은 것 말이다. 거기에 고명으로 얹은 돼지고기 차슈와 닭가슴살은 요즘 유행하는 돈가스 속살처럼 핑크색이 선연하다. 덜 익은 고기라고 오해받기 딱 적당한 그 빛깔. 그저 돼지고기는 바싹 익혀서 먹으라고 배운 우리였으므로, 몇 번을 보아도 이 핑크색 고기는 약간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다. 돼지고기는 그렇다 치고 닭고기에도 살짝 비치는 저 분홍색은, 과연 괜찮을까.
그러나 일단 맛을 보면 그런 의심이나 주저함은 멀리 날아간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연하고 부드러운 고명의 맛이 참으로 놀랍다. 특히 맑은 국물과 담백한 닭고기의 조화가 절묘하다. 금세 다 먹어가길래 얼른 추가 면을 부탁드렸다. 계란까지 하나 추가했다. 반숙란 역시 간이 잘 되어 있어 짭짤하다. 짠맛은 먹을수록 적응이 되는지 나중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국물을 다 마시지는 못했다.
아아, 잘 먹었다. 진짜 여행 온 기분이었어. 굳이 라멘 때문이라면 비행기 탈 필요가 없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전혀 '현지화'를 거친 기색이 없는 이런 본고장의 메뉴가 우리 입맛에 조금은 낯설 법도 한데 그래도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걸 보면 고객의 인정을 받은 거라 봐야겠다. 한편으론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여행을 많이 간다는 게 실감되기도 한다. 그렇지. 이젠 워낙 많이들 다니니까. 나처럼 여행의 추억을 이런 데서 살려보는 사람도 많을 듯하다.
사장님들의 신념과 절충
식후 산책 삼아 광장을 걸으며 나는 생각한다. 여기 사장님은 처음 라멘 맛을 잡을 때 가장 현지와 가까운 맛이 서울 한복판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까. 분명히 맛있는 라멘이기는 하지만, 조금 낯설 수도 있는 고명과 국물을 내고자 했을 때 아무런 고민이 없었을까. 내가 배워 온 것을 그대로 구현하고 싶은 마음과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는 노력 사이에서 갈등하지는 않았을까. 모든 음식이 국경을 건너가면 맛이 조금씩 변한다는 건 상식일 텐데. 모르긴 해도 고민이 없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꿋꿋이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셰프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부산에서 일본식 메밀국수, 즉 소바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찾는 <면옥향천>은 항상 많은 손님들로 북적이는 집이다. 나도 꽤 오래전 두어 번 방문해서 정말 훌륭한 소바를 맛본 적 있다. 그런데 역시 거기도 국수와 함께 나오는 장국이 조금 짜게 느껴졌다. 부산 사람들한테 맞추느라 그런가 싶어 SNS에 글을 올렸더니 셰프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쯔유의 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면을 장국에 푹 담가서 먹지 않고 면 아래쪽 절반 정도만 찍는 게 일반적입니다. 처음엔 메밀국수 본연의 향을 즐기고 바로 이어서 소스와 어우러진 맛을 보는 거죠. 그러니 장국이 약간 짭짤해야 균형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를 푹 담가 먹는 문화죠. 나름 절충을 하느라 좀 싱겁게 했는데 그래도 짜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김치는 있고 고수는 없는 어떤 태국 음식점. 매우 친숙한 맛이다.
여운규
어떤 집들은 정반대의 노선을 취하기도 한다. 한 태국 음식점은 아예 '한국맛 태국식당'이라고 간판에 써 붙여 두었다. 현지식 향신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모든 음식의 맛이 참 뭐랄까, 익숙하고 정겹다. 가게 정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치 있음, 고수와 피쉬소스 없음". 나처럼 고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혹시 고수 좀 가진 게 있으면 달라고 해도 절대로 안 준다. 아예 갖고 있지를 않나 보다. 그럴 땐 좀 서운하다. 고수 그게 뭐라고. 따로 조금 준비했다가 원하는 손님에겐 제공해 주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 가게 고유의 콘셉트이니까. 사장님의 신념이니까. 하루하루 살얼음 같은 자영업의 세계에서 오늘도 자신의 소신과 대중의 요구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는, 이 또한 우리 이웃들일 사장님들의 마음을 잠시 헤아려보게 된다.
내 것을 지켜가며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찾는다
▲늘어선 경찰 버스,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여운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길가에 경찰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분주히 움직이는 경찰관들. 근처에 곧 집회가 있을 예정인가 보다. 광화문이란 공간은 시끄럽고 어지럽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주장과 신념이 난무하고, 때로 충돌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각자의 신념과 요구가 치열하게 부딪히고 충돌하며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과정일 테니까.
이런 일들이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절차를 지키며 평화롭게 이뤄지도록 지켜내는 것 또한 경찰과 국가의 몫이고 나아가서 우리 모두의 의무겠지. 젊은 시절에는 늘어선 경찰 버스를 보면 두려움과 반감이 앞섰는데 이제는 뭔가 든든하면서 고생하는 경찰관들이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나이를 먹기는 먹었나 보다. 아 정말 지키느라 애들 쓰시네. 감사한 마음이다.
지킬 것이 많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내 가족, 내 직장, 내 사람들, 그리고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나면 삶은 그만큼 무거워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잘 움직이지 않는 몸처럼 마음도 따라서 굳어간다. 그래서 늙으면 누구나 보수적이 된다고 하는 거겠지. 그러나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사정일까. 나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절실하게 지켜내야 할 것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내 것은 지켜가며 다른 이들과 부드럽게 어울리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어렵다. 정답은 없는 것도 같다. 나는 좀 막막한 심정이 되어 미세먼지 가득한 광장을 바라보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