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을 앞두고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과 주위에 경찰의 경비가 강화되어 있다.
이정민
막연한 불안감을 쫓는 데 구체적 사실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미 여러 번 읽거나 들으셨겠지만, 탄핵을 마무리하는 단계이니 다시 한번 확인해도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77조 1항에는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조건이 명시돼 있습니다. 바로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입니다.
"전시"는 전쟁, 그리고 "사변"은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 등의 사태를 말합니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시점이 전쟁이나 천재지변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합니다. 대통령을 포함한 내란 주동 혐의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계엄을 합리화하기 위해 북한을 도발해 전시 상황을 스스로 만들려 했다는 사실이 이 점을 말해 줍니다. 이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는커녕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 의무"라는 헌법상 의무까지 위반한 행위입니다.
게다가 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방해할 목적으로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다수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계엄 선포만 위헌이 아니라, 계엄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이 내린 지시 역시 헌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이처럼 계엄의 위헌성이 명백한데 반해,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계엄의 정당성을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변호인단이 무능해서라기보다, 애초에 정당화가 불가능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제시한 핵심 이유는 야당의 예산삭감과 탄핵심판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논리, '야당이 줄탄핵으로 국정 마비와 국가 위기 상황을 초래한 탓에 계엄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은 이미 헌재 판결을 통해 깨졌습니다. 지난 3월 13일, 헌재가 검사의 탄핵을 기각하면서도 "탄핵소추권이 남용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탄핵 반대의 핵심 근거 가운데 하나가 공식적으로 반박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첫 번째 예산안을 둘러싼 야당의 견제 또한 합법적 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국민의힘이 야당 시절에 예산과 관련해 어떤 행동들을 했는지 일깨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대통령 측이 "거대야당의 독재"로 표현하는 여소야대 상황은 유권자들이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윤 대통령을 뽑은 바로 그 유권자들이 말이지요. 만일 대통령 눈에 유권자의 선택이 견딜 수 없는 "국정 마비와 국가위기 상황"으로 보인다면, 그에게 민주적인 지도자의 자질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입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야당과의 대화 등 협력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다가 느닷없이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그동안 윤 대통령이 보인 행동과 발언은 그가 더 이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정치적 금치산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엄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과 공수처의 법 집행에 무력으로 맞선 행위부터, 구속취소로 풀려나며 "저의 구속과 관련하여 수감되어 있는 분들"이 "조속히 석방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한 발언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으로 되돌아갈 때 어떤 대혼돈의 상황이 펼쳐질지 말해줍니다.
계엄이 일상화되는 나라?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대통령 탄핵이 기각된다면, 계엄선포는 대통령의 일상적 권리가 됩니다. 다시 말해 '계엄이 상수인 나라'에 살게 되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주장해 온 대로, 야당의 견제가 "국정마비"이고 "국가위기"라는 주장을 인정하는 꼴이므로, 한국은 집권 정당이 견제를 받지 않는 독재국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어디 정치활동뿐인가요, 언론, 집회, 선거 등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이 미국 정부에 의해 "민감 국가(Sensitive Country)"로 분류돼 불이익을 받게 됐다며 소란스럽습니다. 야당은 계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하고, 여당은 탄핵해서 이렇게 됐다고 주장하지요. 한국 정부는 두 달 넘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제와서 미국 의중을 파악한다며 부산을 떨더니 "외교정책 아닌 미 연구소 보안문제 탓"이라는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자국 연구소의 보안 문제로 특정 우방만 민감 국가로 지정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미 에너지부(DOE)는 특정 국가를 민감 국가로 지정하는 이유로 국가안보, 핵 확산방지, 지역 불안정, 국가 경제안보 위협, 테러지원 등의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퇴임 전 한국에 이런 조처를 취한 것에 "뒤통수를 때렸다"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사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은 바이든이었습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계엄 후 보인 격한 반응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당시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다가 한국행을 취소했고, 커트 캠벨 국무부 장관은 계엄 선포가 "심각한 오판"에서 유래한 "불법행위"였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쥔 미국과 아무런 상의 없이 계엄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벌인 데 대해 미국 정부가 어떤 배신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의 민감 국가 지정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한국 일각에서 고조되는 핵무장론이고, 다른 하나는 계엄 선포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미국 정부에 대단히 민감한 문제이지만, 두 가지가 겹치는 상황은 미국에 악몽과도 같습니다. 미국의 통제권 밖에 있는 독재자가 핵무기를 개발해 사용하는 상황 말이지요.
과거 한국이 민감 국가로 지정됐을 때도 바로 이 경우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자 핵무장을 외치고 있을 때였지요. 이미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낙인 찍힌 윤 대통령을 복귀시키는 것은 곧 외교를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어디 외교뿐인가요? 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후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환율 폭등과 한국 방문객 수의 폭락이었습니다. 한국에 머물던 외국인들도 안전을 걱정했고, 이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 섞인 안부 전화와 메일이 쏟아졌습니다. 만일 계엄 사태를 '가끔 일어날 수도 있는 일'로 여기는 분이 있다면, 민주국가에 대한 세계적 기대와 매우 동떨어진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 보도가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일어난 일도 환율 폭등이었습니다. 외환시장이 특별히 윤 대통령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윤 대통령에게 따라붙게 된 "계엄"이라는 꼬리표가 경제에 얼마나 큰 불확실성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가 돌아와서 자신과 법원 난동 혐의로 기소된 범법자들을 사면한다면, 한국에서 '법과 정의'라는 말은 우스갯소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탄핵 인용 이후를 준비해야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열린 윤석열 파면 촉구 촛불행동 주최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내란세력 제압하자’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우성
제가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단지 위로 차원만은 아닙니다. 당연히 내려질 대통령 파면 이후를 서둘러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탄핵 인용 이후 국민의 삶을 어떻게 보살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는 정당을 보기 어렵습니다.
탄핵을 둘러싼 갈등을 우려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똑같이 나뉜 것은 아니고 (최근 갤럽조사 결과에 따르면) 탄핵 찬성과 반대 의견이 58%대 37%로 나뉜 상태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단지 정치 성향의 충돌만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인혜 교수가 <아시아 정치와 정책>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진보와 보수의 양극화가 심화했으며, 이 배경에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놓여있습니다. 불평등은 한국 사회 공통의 문제이지만, 이에 대한 해법을 둘러싸고 정당과 후보 지지자들 사이에 반목이 깊어져 왔다는 분석입니다.
지난 17일 자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한국 15∼29세 청년 64.8%가 정부를 믿지 않는 것으로 조사돼, 전 세계 주요국 30개국 가운데 5위를 차지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이 보도가 나오기 얼마 전, 같은 연령대의 청년 무직자 수가 12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발표됐기 때문입니다. 1년 사이에만 7만여 명이 늘어,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청년들뿐인가요.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악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2019년부터 21년까지 빈곤율이 서서히 감소하다가 2022년부터 다시 높아져, 2023년에는 38.2%를 기록했습니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한국에서 자영업은 일종의 안전망 구실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월 100만 원도 못 버는 개인사업자가 9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전체 자영업자의 절대다수인 75.7%가 100만 원을 못 번다는 말이지요. 그중 95만 명은 아예 소득이 "0"원입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은 데에는, 시민들이 삶 속에서 정치의 효능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일부는 민주주의를 조롱하며 (무능하든 어떻든) '강한 지도자'에 지지를 보내는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민주주의가 밥 먹여줬느냐"는 항변인 셈인데, 때로 길 잃은 절망감은 여성, 노인, 장애인, 성소주자, 외국인에 대한 혐오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통령 파면을 앞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정치를 통해 긴급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입니다. 정치가 모든 해법을 제시하는 마법일 수는 없지만, 광범위한 문제를 비교적 빨리 해결하는 효과적인 장치임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동안 잠을 줄이며 일했고, 민주주의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더 나은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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