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13 10:34최종 업데이트 25.03.1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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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국회의장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지난 2024년 12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장실에서 탄핵소추의결서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 가슴에 동백꽃 배지를 착용한 모습.국회사진취재단

우원식 국회의장은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달린 붉은 동백꽃 배지가 공산당 배지라는 가짜뉴스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표시했다. 그는 지난 8일 페이스북 글에서 "요즘 일부 사이트를 중심으로 저의 저 배지를 두고 공산당 배지라고 퍼 나르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한 뒤 "어찌 국회의장이 공산당 배지를 달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황당합니다"라고 탄식했다.

우 의장은 자신의 배지는 "제주 4·3의 배지"라면서 "4·3 피해 가족들이 저의 가슴에 달아준 배지"라고 썼다. 이 글에는 당선인 시절의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그 배지를 달고 동백꽃 앞에서 연설하는 사진이 첨부돼 있다.

동백꽃의 의미

겨울에 피는 동백꽃은 4월경에 새빨간 꽃송이를 툭 떨어트린다. 미군정 경찰에 의한 1947년 3·1절 기념식 발포 사건이 이듬해의 4·3항쟁으로 나아가던 시점에 소설가 이선구(李璇求)는 제주에서 이 꽃을 목격했다. 그는 바람과 돌이 많은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붉은 꽃이 만발하는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소설가는 1947년 4월 20일 자 <경향신문> 4면 기행문에서 "돌 많고 바람 많기로는 이미 이름이 높은 제주도이지만 설마 이토록 돌이 많고 풍세가 사나울 줄이야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하였겠읍니까?"라고 한 뒤 "이렇게 거치른 풍세 가운데도 봄은 매우 일즉암치 찾어들어 집집이 울 뒤에는 복사꽃과 혹은 동백꽃이 만발을 하고 있었읍니다"라고 썼다.

동백꽃은 제주도의 꽃일 뿐 아니라 건너편 남도 지방과 동북쪽 한국해(동해)의 꽃이기도 하다. 1993년 5월에 발간된 유홍준 당시 영남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은 "동백꽃이 유명하기로는 제주도와 울릉도 그리고 여수 앞바다의 동백섬으로 불리는 오동도가 이름 높다"고 알려준다. 이 꽃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限)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이 책에도 그런 정서가 녹아 있다.

"동백꽃이 지는 모습 자체는 차라리 잔인스럽다. 꽃잎이 흩날리며 시들어가는 것이 꽃들의 생리겠건만, 동백꽃은 송이째 부러지며 쓰러진다. 마치 비정한 칼끝에 목이 베여나가는 것만 같다."

개혁군주 정조를 1800년에 잃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 다산 정약용은 동백꽃을 보고 정반대 인상을 받았다. 유배지의 거처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주막집 사장인 어느 여성의 호의로 겨울을 버틸 공간을 얻게 된 그는 '산다(山茶)'로도 불리는 동백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다산시문집> 제4권에 '객중서회(客中書懷)'라는 제목으로 실린 그의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술은 수심이 많아 밤에 더 마시게 된다(酒爲愁多夜更加)
그나마 한가지, 나그네 염려를 녹여주는 것은(一事纔能消客慮)
산다가 납일(臘日) 전에 이미 꽃을 토해낸 일(山茶已吐臘前花)

자축인묘진사오'미'신의 '미'가 동지로부터 세 번째 오는 날인 납일이 되기 전에 정약용은 동백이 꽃을 토해낸 장면을 보게 됐다. 음력 연말의 이 장면을 보고 유배객은 시름을 덜었다. 정약용은 동백이 피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얻었고, 현대 한국인들은 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을 느꼈다.

어떻게 동백꽃을 '공산당'과 연결 지을 수 있나

꽃이 핀 동백나무.성낙선

동백과 한이 연결되는 이미지는 화가 강요배에 의해 1990년대 한국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제주 4·3을 다룬 그의 첫 전시회는 <동백꽃 지다 – 제주민중항쟁사 화집(畫集)>의 출간과 함께 열렸다.

할머니와 손자가 먼 데를 바라보는 강요배의 작품인 '시원'과 함께 실린 1992년 4월 3일 자 <매일경제> '제주 4·3항쟁 화폭에 재현'은 1952년 4월 18일 제주에서 출생한 그의 전시회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화가 강요배 씨는 자신이 태어나기 4년 전의 역사적 사실인 4·3제주민중항쟁사를 자료와 상상력을 매개로 묘사, 가슴이 섬뜩할 만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라고 한 뒤, <동백꽃 지다>라는 화집과 함께 데뷔한 그의 소감을 이렇게 전한다.

"고향을 떠나 20년을 방황하면서 나는 조금씩 사회와 역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땅의 시련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 역사의 시련이었음을 늦은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방황 속의 역사 공부를 통해 얻어낸 결과물을 강요배는 그림에 담았다. 그 결실 중 하나가 화집의 제목이기도 한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이다. 짙은 녹색과 거무튀튀한 흑색이 시선을 당기는 이 작품에서는 땅에 뚝 떨어진 새빨간 꽃송이가 강한 인상을 준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땅에 뚝 떨어진 동백꽃을 4·3의 아픔과 상처로 해석했다. 이는 동백꽃이 4·3의 상징물이 되는 데 기여했고, 우원식 의장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이 꽃을 다는 배경이 됐다. 공산당 배지로 해석될 만한 경로와는 전혀 판이한 루트를 거쳐 4·3과 동백꽃은 결합됐다.

강요배 전시회에서 주목할 것이 더 있다. 그의 전시회에서는 4·3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까지도 동백꽃과 연결됐다. 4·3항쟁 50주년인 1998년 4월 3일 개막하는 '동백꽃 지다 – 4·3 역사화전'을 예고한 그해 3월 26일 자 <한겨레> '4·3 핏빛 어린 넋들은 동백이런가'는 전시 작품 57점의 일부인 '삼별초 항쟁', '왜구 퇴치', '잠녀 반일항쟁' 등의 의미를 특별히 설명한다. 기사는 이 작품들이 나머지 작품들의 "출발점"이라고 한 뒤 "강요배 씨가 4·3항쟁의 뿌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평한다.

강요배는 몽골과 왜구 및 일제에 대한 저항투쟁을 미군정에 맞선 4·3과 연결하면서 동백꽃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의 작품세계 속에서 동백꽃은 4·3으로 인한 '한'뿐 아니라 4·3을 포함한 대외항쟁사를 일관하는 한을 상징한다고 평할 수 있다.

동백의 의미를 4·3 이외로도 확대하는 인식은 위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접할 수 있다. 1949년생인 유홍준 교수는 "1981년, 광주의 아픔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던 시절, 선운산 뒷산에 버려진 듯 뒹구는 동백꽃송이들은 마치도 덧없이 쓰러져간 민중이 넋이 거기 누워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냥 떨어지지 않고 꽃송이째 뚝 떨어지는 동백은 제주도 사람들을 포함한 현대 한국인들에게 슬픈 역사를 상기시킨다. 이 꽃은 지금은 주로 4·3항쟁의 상처를 환기시키지만, 강요배의 전시회에서 형상화됐듯이 한국 역사 속의 대외항쟁들을 함께 떠올려주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꽃을 공산당과 연결하는 것은 너무 엉뚱하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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