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산케이신문>의 10일 자 기사 '테러리스트를 추도하는가' 캡처
산케이신문 홈페이지
24세 청년 윤봉길은 한국이나 일본이 아닌 상하이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그곳에서 거사한 것은 의미가 컸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한 일본은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군을 이 도시 부근에서 퇴각시켰다.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생일이기도 한 그해 4월 29일은 일제가 한국과 오키나와·대만을 넘어 만주와 상하이까지 짓밟으며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그날 터진 훙커우 공원 의거는 한민족의 고통은 심해지는데 일본은 갈수록 막강해지는 현실 앞에서 스물네 살의 청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그는 그 저항을 일본의 새로운 침략 현장인 상하이에서 벌였다.
윤봉길의 선택은 일본 장군들뿐 아니라 그 자신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일제의 새로운 침략 현장에서 그가 스스로를 희생시키며 알리고자 했던 메시지는 일본이 더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개 테러리스트로 폄하하기에는 그의 뜻이 너무 숭고하다. 아무리 일본인일지라도 그런 마음을 만분지일도 헤아리지 못한 채 함부로 테러리스트 운운하는 것은 몰상식하다.
제정일치시대였던 고대에는 전쟁이 신의 이름으로 수행됐다. 그래서 국가의 전쟁에 동원된 대중은 양심상 가책과 형사처벌에 대한 부담 없이 살상을 벌였다. 이와 달리 국가권력에 저항하며 무력을 행사하는 소수나 개인은 신의 명의로 발부되는 폭력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런 비난을 의식하면서도 저항세력은 흔히 테러로 불리는 무력행사에 적지 않게 의존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거부하는 전 세계 아나키스트들도 그랬고, 민족해방투쟁에 나선 아시아·아프리카 독립운동가들도 그랬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1920년 2월 5일 자 <독립신문> 기사 '칠가살(七可殺)'은 테러가 부득이한 현실을 지적했다. 수만 명의 병사·경찰과 밀정과 수천 칸의 감옥을 보유한 악마 일제에 저항하려면 그런 방법이라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적(敵)은 수만의 병경(兵警)과 창귀와 수천 칸의 감옥으로 아(我) 운동을 방해하며 아 동지를 능욕하고 구속하나니, 아에게 아직 병경과 감옥이 업스매 져 악류(惡類)를 저제(抵制)할 방법은 오직 단총과 비수와 폭탄이 잇슬 뿐이라."
임시정부는 "생명을 살(殺)함이 엇지 본의리오"라며 생명 살상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착취와 억압을 벗어나려면 적의 수괴, 매국노, 창귀(밀정 등), 친일 부호, 일제 관리, 불량배, 모반자(변절자)라는 일곱 부류에 대한 공격이 부득이하다고 밝혔다.
조선왕조를 복원하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의 건설을 꿈꾼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김원봉의 의열단을 위해 써준 '의열단 선언'에서 "민중적 폭력"을 언급했다. 지배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국가적 폭력이 아니라 대중의 이익을 위한 민중적 폭력으로 "강도 일본세력을 파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의열단이 이른바 테러에 의존한 점을 감안하면 그가 말한 민중적 폭력에는 테러 방식도 포함된다.
테러에 대한 경계심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이나 아나키스트들이 이 방식을 공공연히 사용한 것은 테러에 대한 당대의 인식이 오늘날과 많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조지 부시 행정부(2001~2009)의 대테러전쟁을 계기로 테러리스트 지정이 사회적 낙인처럼 되어 버린 오늘날 같으면 임시정부가 위와 같은 보도를 내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항일운동 본질에 대한 왜곡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식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테러라는 용어에 대한 인식이 지금 수준으로 나빠진 것은 1970년대 이후다. 주로 제국주의국가들끼리 맞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제국주의 시대의 모순이 종식되지 않은 데 따른 반작용이다.
제국주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제2차 대전 전승국들에 대한 저항으로 68혁명,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팔레스타인 해방전쟁 등이 전개됐다. 핵보유국들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맞서 이런 저항세력이 많이 사용한 수단은 이른바 테러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랬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대테러전쟁이 한창일 때인 2002년에 발행된 <국방연구> 제45권 제1호에 담긴 최진태 한국테러리즘연구소장의 논문 '테러리즘의 역사적 기원과 변천'은 이렇게 설명한다.
"1967년 6월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패하자, 아랍인들은 물리적 군사력으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전면적인 무력투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항할 수 없으며, 세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리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테러리즘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테러를 통한 저항이 세계 도처에서 빈발하고 미국과 서방세계가 적극 대응하는 속에서 1970년대 후반 이후로 변화가 생겼다. 세계 저항세력의 입지가 축소되고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테러에 대한 세계 여론이 현저히 나빠지는 경향이었다.
2013년에 <사회와 역사> 제100집에 수록된 김영범 대구대 교수의 논문 '의열투쟁과 테러 및 테러리즘의 의미연관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이나 민족해방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란 이름을 정의롭지 못한 체제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명예로운 배치처럼도 여겼다"라고 한 뒤 1970년대 이후에 이런 인식이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논문은 이 무렵부터 "테러리즘은 극도의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며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도 극히 좁게 해석되어, 아무런 사상이나 원칙도 없으면서 단순한 살육행위에 거창한 원리들을 갖다 붙이는 범죄자, 연쇄살인마, 인간성 상실자, 정치적 낙오자로 낙인찍는 의미가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위의 최진태 논문은 "테러리즘이 점차 전 세계로 확산되자, 공격 목표가 되었던 서독·이스라엘·미국 등은 1976년을 고비로 대응책을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주요국들이 단합해 대테러 대응책을 강구한 것은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세력과 세계 대중을 상당 부분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더해 21세기의 미국이 대테러전쟁에 매진하고 적대국들을 테러지원국으로 마구 지정한 것도 테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한층 심화시켰다. 테러로 인한 피해에만 주목하고, 테러를 벌이는 사람들의 동기는 쉽사리 무시되는 현상이 강해졌다.
지금 일본의 극우세력은 1970년대 이후에 조성된 매우 부정적인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윤봉길 같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갖다 붙이고 있다. "단순한 살육행위에 거창한 원리들을 갖다 붙이는"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씌우려 하고 있다. 항일운동의 본질을 왜곡하는 시도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근절돼야 하지만, 억압받는 한민족이 마땅한 저항 수단을 찾지 못하던 때에 윤봉길은 새롭게 일제 침략의 현장이 된 상하이로 건너가 폭탄을 터트렸다. 일본 극우는 그가 왜 거기까지 가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외면한 채, 그가 폭탄을 터트린 점만 부각시키고 있다. 일제 식민 지배를 희석시키고 한국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시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