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15 14:56최종 업데이트 25.03.1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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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독립기념관

총파업이 일어나면 재벌기업을 편드는 세력이 시민 불편을 호소하는 여론전을 펼친다. 이것이 주효하면 여타 대중과 노동자가 분리되고 파업의 동력이 떨어지기 쉽다. 재벌과 지지세력은 총파업이 벌어지면 노동조합 못지않게 대중의 향배를 주시하며 그런 선전전을 전개한다.

그 방식이 초장부터 힘을 잃은 항일 총파업이 1927년 영흥 총파업이다. 이 지역 노동자들인 오영근·이영실·주경민·최여람 등이 앞장선 이 파업에서는 그것이 맥을 쓰지 못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10권은 이 사건을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노동쟁의 중 하나로 소개한다. 이 싸움은 사측에 대한 노동자의 승리이자 일제에 대한 한국 대중의 대표적 승리였다.


일제의 한국 착취로 궁극적 이익을 얻은 집단은 일본 군대나 경찰 혹은 정부가 아니라 일본 자본가들이다. 한국인 착취를 배후에서 추동한 세력은 그들이었고, 그 착취의 결과물은 주로 그들에게 들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하는 것보다는 한국 대중이 그 착취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항일투쟁의 본령이었다.

오영근 등이 앞장선 함경남도의 영흥 총파업은 그런 승리의 기록이다. 보훈부가 영흥 총파업을 <노동운동사>가 아닌 <독립운동사>에서 다루는 것은 이것이 노동자의 승리인 동시에 한민족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강원도에 인접한 영흥은 석연이 많이 매장된 곳이었다. 1933년 8월 23일 자 <조선일보> '광업으로 본 함남'은 "지도를 펴노코 눈을 감은 채로 손끗이 닷는 곳을 파기만 하면 금 아니면 철 아니면 석탄, 무엇이던지 한가지 광(鑛)은 나올 모양"이라며 함남의 광물자원 부존량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영흥의 흑연"을 언급했다. 오늘날 석연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다. 영흥의 광업 노동자들은 지금으로 치면 첨단 광물을 캐는 생산자들이었다.

석연이 많이 생산되는 이곳을 일본 자본가들은 놓치지 않았다. 1992년 4월에 한국사회사학회가 <사회와 역사>에 실은 이준식의 '일제침략기 영흥지방의 노동운동'은 "영흥의 광산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 자본에 의해 채굴"됐다며 "특히 흑연 광산에 일본 자본이 집중적으로 투자"됐다고 설명한다.

항의 파업 촉발시킨 집단 폭행

1927년 9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산하광부맹파 기수의학대로"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곳에서 일하던 오영근 등이 역사적인 총파업에 나선 데는 일본인 직원의 한국인 폭행이 기폭제가 됐다. 1927년 9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달 14일 정오경이었다. 우차부(牛車夫)로 불리는 수송노동자 정봉준이 산하광업소 내의 다른 수송노동자와 말다툼을 했다.

이때 일본인 기사 마쓰모토가 몽둥이를 들고 다가가 정봉준을 난타했다. 그러자 요시다와 노구치 두 사람도 끼어들었다. "그곳 기수로 잇는 길뎐(吉田), 야구(野口) 두 사람까지 협력하야 각긔 몽동이로 무수히 란타하야 정봉준은 그 자리에서 맛츰내 기절"했다고 위 신문은 전했다.

항의 파업을 촉발시킨 이 집단 폭행은 노동자와 여타 대중을 갈라놓는 사측의 여론전을 처음부터 곤란하게 만들었다. 일본인들에 의한 이 묻지마 폭행은 지역민들의 민족감정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지역민과 노동자들의 연대가 공고해졌다. 이런 속에서 산하광업에 이어 스미토모재벌 계열사인 원(原)상사의 탄광 노동자들도 10월 21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동참하고, 28일에는 흑석령흑연주식회사 노동자들도 가세했다.

이들의 공통된 요구조건은 해진 뒤에는 더 이상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산 노동자들은 해지기 전까지 8시간만 일한 뒤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하루 최저임금을 1원으로 인상해달라고 촉구했다. 한 달에 10원도 못 버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인 시절이었지만, 광산 노동자들의 특수성을 감안한 임금인상 요구였다.

노동자들이 연대의 보폭을 넓히며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자, 제3자여야 할 공권력은 사측을 편들며 노사분규에 개입했다. 위의 <독립운동사>는 "영흥경찰서는 노골적으로 광부들을 탄압"했다며 "광부 대표를 선동죄의 죄목으로 검속"했다고 기술한다. 이 때문에 붙들린 사람들이 오영근·이영실·최여람·주경민이다.

오영근 등을 구속시킨 일제 경찰은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을 막기 위한 조치도 함께 내놓았다. <독립운동사>는 "광부들의 집회를 일체 금지시켰다"라며 "심지어 2명 이상의 광부가 모이는 것까지 금지시켰다"고 말한다. 3명 이상도 아니고 2명 이상이었으니, 식사 시간은 물론이고 퇴근 때도 항상 혼자 있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측의 반칙이 자충수가 됐다. 수백 명이 파업에 참여하자, 사측은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대체근로에 손을 댔다. 사측은 인근의 강원도 원산에도 사람들을 보내 대체인력 모집에 응모할 노동자들을 찾아다녔다.

이는 노동운동이 활발한 원산을 영흥 총파업에 끌어들이는 원인이 됐다. <독립운동사>는 "흑연광 회사 측에서 원산에 나와 인부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원산노동연합회에서는 파업 광부들에게 파업 동정금을 보내는 동시에 응모규찰대를 조직하여 응모를 방해하고, 또 중국인 노동자가 응모할 가능성이 있어 중국영사관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기도 하였다"고 서술한다.

외지의 노동자들까지 응원하는 가운데, 영흥 지역의 총파업은 갈수록 확산됐다. 11월 30일에는 영흥인쇄직공조합·운수노동조합·전(全)영흥우차부조합 등도 가세했다. 이런 속에서 사측의 지지세력이 대중을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대중을 상대로 홍보전을 벌이는 양상이 훨씬 우세했다. 노동자들이 여론을 주도하게 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 산업이 파업을 하게 되어 영흥 시가는 살기가 떠돌게 되었다"고 <독립운동사>는 말한다.

영흥 노동자들의 대일 승전보

이때 영흥군민들의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을 감수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총파업을 지역 축제로 승화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독립운동사>는 "경찰은 전원을 동원하여 경계에 임했다"고 한 뒤 그런데도 "영흥시민들은 파업 광부들을 동정하여 온면을 날라 그들을 먹이고 소주를 날라 그들의 기세를 도우니"라고 기술한다.

함경도 사람들이 잔치할 때 삶는 온면, 지금과 달리 도수가 35도나 됐던 소주를 들고 영흥군민들은 일제 경찰의 시선을 무시한 채 파업 노동자들을 응원하러 나섰다. "광부들은 감격하여 천지를 진동하는 환호성으로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고 위 책은 기술한다.

여러 분야의 노동자들이 동정파업을 통해 총파업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한편, 오영근 등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황이 영흥군 내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총파업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다. 지역 업체 고용주들이 동업자 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더니 총파업 지지를 선언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해 12월 6일 자 <동아일보>는 "자긔의 리익만을 위하야 로동자를 부리든 영흥 각자 방면의 고주(雇主)들은 긴급히 각자 자긔 조합의 총회를 열고 여러 가지 선후책(先後策)을 강구하든 중, 이 동정파업이 비록 자긔네에게 손해를 끼치는 중이나 로동자의 처디로 보아서는 동정파업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12월 4일에 각종 업체 대표와 노동자들의 연석회의를 열어 파업 해결과 구속자 석방을 함께 논의했다.

의외의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자, 제3자여야 할 공권력은 이번에는 노동자를 사실상 편드는 쪽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오영근 등을 구속하고 노동자 2인 이상의 회합을 금지했던 영흥경찰서는 지역 자본가들까지 총파업을 지지하자 태도를 바꿨다.

<독립운동사>는 "경찰서장이 앞장서서 중재에 나서게 되었다"라며 경찰서장이 임금 인상분을 제시하고 구속 노동자 석방을 약속했다고 기술한다. 지역민들에 이어 공권력까지 노동자들을 편들게 됐으니, 이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오영근 등을 비롯한 영흥군의 광산 노동자들이 일제 자본과 일제 경찰에 맞서 전개한 항일 총파업은 지역 내의 대중 및 여타 분야 노동자들과 원산 노동운동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온면과 소주가 흥을 돋우는 지역 축제로 승화됐다. 그 결과, 지역 자본가들과 영흥경찰서장까지 노동자들을 편드는 역사적인 순간이 만들어졌다. 독립군이 전투에서 거둔 승리 못지않은, 그보다 값진 영흥 노동자들의 대일 승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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