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월 26일 자 <조선일보> 2면에 "무단석방했던 장준영"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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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험악하고 어수선한 속에서 반민특위 강원도지부 이기용 조사관이 3월 24일 상경 길에 올랐다. 위원회 결의로 발부된 장준영 구속영장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지금의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 바로 옆인 관수동에서 장준영을 체포했다. 26일 자 <조선일보>는 24일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일 오전 10시경 관수동 강원여객자동차부 앞에서 반민 혐의자 장준영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준영 편은 그가 "1906년 5월 15일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준다. 체포 당시 43세인 그는 이기용 조사관에 이끌려 관수동에서 서남쪽 인근인 지금의 을지로입구역 근처로 이동했다. 이곳에 위치한 반민특위 본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 <조선일보>는 특위 본부의 특경대 사무실로 끌려갔다고 알려준다. 그곳 1층 구석의 특위 경찰 사무실로 갔던 것이다.
그날 이기용 조사관은 장준영을 데리고 춘천으로 가야 했다. 그가 반민특위를 떠나려 할 때였다. 그는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 장준영은 두고 가라는 것이었다. 본부 조사관 이종순이 구속영장을 취소하고 장준영을 석방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위 기사는 이기용이 "아연케" 됐다고 전했다.
이 사건은 대번에 파장을 일으켰다. 이튿날인 25일 오전 10시에 반민특위가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표명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반민특위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입장표명이 나왔다. 2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독립운동가 출신인 김상덕 특위 위원장은 25일 기자회견에서 딱 부러지는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조사위원회에서 장(張)을 구속하는 것을 당분간 보류"했다고 답변함으로써 구속 취소가 위원회 결정인 듯이 했다. 그러더니 "이(李)의 개인 문제이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던졌다. 구속 취소가 이종순 조사관의 판단에 따른 것인양 말한 것이다. 그러자 기자 하나가 "위원장이 결제하였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답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이기용 조사관이 전면에 나섰다.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운동가에 가까운 모습이 그에게서 나왔다. 위 <조선일보>에 따르면, 기자들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분노를 표시한 그는 "나는 오직 민족정기에 비추어 3천만 동포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솔선(해서) 이 사업에 몸을 밭이러 나왔는데, 중앙 당국의 이러한 처사에는 아니 놀랄 수 없으며"라고 성토했다.
그러더니 항명의 의지를 표시했다. "나는 나대로 또다시 잡을 것"이라고 그는 선포했다. 반민특위 차원이 아니라 자기 개인 차원에서 정준영을 체포해 강원도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반민특위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투로 결의를 밝혔다. "만약 체포치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반민자를 도피케 한 전기(前記) 조사위원 이종순을 반민법 제7조에 의하여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반민법 제7조는 친일파에게 "도피의 길을 협조한 자"를 친일파와 똑같이 처벌한다는 규정이다. 이 조문을 거론한 뒤 이기용은 기자들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잠시 뒤 장준영을 다시 찾아냈다. 김상덕 위원장의 기자회견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25일 오전 11시 40분경에 이기용은 두 번째 체포를 끝냈다. "시내 자유신문사 사장실에서 장을 체포"했다고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특위 본부를 믿지 못하게 된 이기용은 장준영의 신병을 성동경찰서에 일단 인계했다.
적산가옥이 자기 것인 양 서류 조작도
이기용 조사관에게 연이틀 체포된 장준영은 20세 때인 1926년에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중등)를 졸업한 뒤 경영인의 길을 걸었다. 동아일보사 영월지국장과 관동운수주식회사 이사 및 사장 등이 그의 이력이 됐다. 총독부 기관지를 발행하는 매일신보사의 영월지국장도 그 이력에 들어갔다. 또 강원도평창주조(酒造)조합과 원목생산조합 등에도 그의 관여가 있었다.
식민지 정치활동의 경력도 있었다. 광역 의회인 강원도 도회의 의원을 세 차례 역임하고, 국회의원급인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총력조선연맹 강원도연맹 같은 관변단체에도 가담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했다.
일제를 위한 기부 활동도 많았다. <친일인명사전>은 영월군청 및 강원신사 건축비도 지원하고 기관총도 헌납했다고 알려준다. 기관총은 영월군 연초 경작자 대표 명의로 기부했다.
바치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42년에 중추원 참의가 돼 연봉 600원을 받았고 1944년 12월에는 1200원으로 인상됐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의 직공 노동자들은 1년에 120원도 벌까 말까였다.
친일 사업가인 그는 사업상의 특혜도 받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 장준영 편에 따르면, 1939년에 강원도 정선군에서 90만 4천 평에 해당하는 광업권을 확보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그의 친일재산은 중추원 참의 봉급을 훨씬 상회한다.
친일 활동으로 수익을 거둔 그는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옛 주인들'의 재산도 탐냈다. 적산 혹은 귀속재산으로 불리는 일본인들의 재산에도 손을 댔다. 1949년 3월 26일 자 <경향신문>은 "적산 가옥을 자기 명의로 변경하여 수억 원 대에 오르게 모리를 하였다"고 보도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적산을 친일파들에게 헐값으로 불하했다. 장준영은 그 가옥을 그런 식으로 인수하지 않고, 아예 자기 것인 양 서류를 조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기 전부터 수사 당국의 내사를 받았다. 그런 와중에 이기용 조사관에게 연이틀 체포됐던 것이다.
4월 25일에 장준영에 대한 구속이 취소되자 "이때가 기회다"라며 달려든 곳이 서울고등검찰청이다. 서울고검은 적산가옥 부정취득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장준영을 이참에 데려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장 청구 시점은 이기용이 다시 체포한 뒤인 26일이다. 그래서 서울고검의 구속영장은 휴지 조각이 됐다.
반민특위에 두 번이나 구속되고 서울고검에도 구속될 뻔했던 장준영의 인생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공격한 그해 6월 6일 이후로 잘 풀려나갔다. <친일인명사전>은 "같은 해 7월 특별재판부에 의해 보석으로 풀려났다"고 기술한다. 1949년 연초에 잠깐 통쾌했던 한국인들은 이런 일들로 인해 그해를 허탈하게 보냈다.
그 뒤 장준영은 계속해서 '사장님'으로 살았다. <친일인명사전>은 "1956년 현재 강원도 평창군 부암광산과 홍천군 가족(可足)광산 사장으로 재직했다"고 알려준다. 1975년 12월 23일, 69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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