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8일 4.19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3.8민주의거 제59주년 기념식'이 국가기념일 지정 이후 처음으로 대전시청 남문광장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기념식 이후 진행된 재현행사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
오마이뉴스 장재완
그런데 대구·마산·서울 등지와 더불어 대전의 역할도 인상적이었다. 대구에서 형성된 시민혁명의 에너지가 마산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중간 길목 역할을 한 곳이 대전이다. 대전의 기여도 역시 3·8민주의거 기념일이라는 명칭으로 달력에 반영돼 있다. 이날은 2018년 10월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의 개정을 통해 국가기념일이 돼있다.
3월이 졸업 시즌이고 4월이 입학 시즌이었던 1960년 당시에는 3월이 고교 재학생들의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민감할 때인데도 자유당은 학생들을 선거 유세장에 동원했다. 당시 학생들의 눈에 비친 자유당의 부정선거 실태를 대전고등학교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던 박제구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부의장의 기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념사업회가 대전·충남4·19혁명동지회와 함께 발행한 <3·8민주의거>의 공동 저자로 참여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야당의 선거유세 방해, 공무원의 공공연한 선거 간여, 각종 유령단체들의 지지성명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 각종 부정선거 방법을 총동원하던 나머지, 우리 학원에도 교장 선생님은 물론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학부형을 3인조·4인조 등으로 조편성까지 하도록 획책하고, 걸핏하면 각종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수업시간을 중단하고 교내 방송을 통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화된 사상과 어록, 담화문 등을 듣게 하는가 하면, 사실이 왜곡된 보도로 메워진 정부여당지 서울신문을 강제 구독케 하기까지 이르렀다."
대전을 비롯한 전국의 학생들이 이런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대구 학생들이 2·28의거를 일으켰고 이는 대전 학생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박제구 부의장은 2·28 직후인 3월 초순을 회고하는 대목에서 "신문보도를 보고 온 다음날 아침부터는 교내 어느 교실이고를 막론하고 동병상련의 출렁이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3월 8일로 예정된 민주당 유세에 맞춰 대전공설운동장·대전역·충남도청 등을 행진하는 시위 계획이 대전고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이들의 준비 과정을 살펴보면, 저항시인 김수영이 그해 4월 26일 새벽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라며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이라고 쓴 것이 결코 시인의 주관적 감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당 충남도당 부위원장인 아버지를 1년 전에 사별한 대전고 기율부장 최정일은 박제구로부터 2·28대구의거 이야기를 듣더니 얼굴표정이 상기됐다. "지긋지긋한 자유당 놈들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며 그는 박제구의 시위 계획을 받아들였다.
4년만 채우고 퇴임할 것 같았던 이승만이 임기 중에 계엄을 선포하고 개헌을 강행해 재집권에 성공하더니 1960년에는 어느덧 4선에까지 도전하게 됐다. 거기다가 민주주의도 억압하고 경제까지 망쳤으니, 그 얼굴만 떠올려도 지긋지긋할 만했다. 최정일·박제구도 그랬고, 서른아홉인 김수영도 그랬다.
"지긋지긋한 그놈"을 상대로 대전고 학생들은 학교 측의 제지를 뿌리치고 3월 8일에 거사를 일으켰다. 2018년도 <사회과 교육> 제57권 제1호에 실린 유명철 경북대 교수의 논문 '2·28민주운동, 3·15 1차 마산의거와 4·11~13 2차 마산의거, 4·19혁명'은 그날 시위를 이렇게 요약한다.
"3월 8일 대전에서는 대전고 학생 1천여 명이 민주당 유세 강연장에 가지 못하게 하는 학교 처사에 반발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자유로운 학생 동태 감시 말라'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이틀 뒤에는 대전상고 학생 3백여 명(위 논문) 혹은 6백 명 이상(<3·8민주의거>)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며 시위를 일으켰다. 참가 인원이 줄어든 이유가 있다. 8일 시위에 당황한 경찰은 정보력을 가동해 10일 시위 계획을 알아낸 뒤 10일 새벽부터 체포조를 파견해 대전상고 호국단 및 학생회 간부 15명을 연행했다. 이것이 시위대의 규모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끌려간 학생들은 지하실에 감금돼 구타를 당했다. 대전상고 학도호국단 대대장 채재선은 그날의 일을 아주 고통스럽게 기억했다. 2023년도 <지식과 교양> 제11호에 실린 이내관 강원대 강사와 이영조 배재대 교수의 논문 '민주시민 양성을 위한 3·8민주의거의 지역학적 위상'에 따르면, 채재선은 이렇게 회고했다.
"군용 침대. 그걸로 때리니까 아파가지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고통스러워서. 아주 고통스러웠죠."
그 뒤 채재선은 재야운동권 인사나 정치인처럼 가택연금을 당했다. 형사들이 통행금지 전까지 감시했다. "4·19 나기 전날까지 있었어요"라며 "꼼짝을 못 하고 집에서 감시·감금당했죠"라고 증언했다.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한 시위

▲2024년 3월 8일 ‘정의의 들꽃으로 빛나리라’를 주제로 대전 국립한밭대학교 아트홀에서 3·8민주의거 관계자와 정부 주요 인사, 학생,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3·8 민주의거’ 64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심규상
대전 학생들의 시위는 해외로도 보도됐다. 3월 9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중단에 따르면, UPI 통신은 "여당인 자유당의 승리를 확고히 하기 위한 이른바 정부의 학원 간섭에 반대하여 데모를 일으켰다"고 전했다.
4면으로 된 국내 신문들에도 대서특필됐다. 위 기념사업회의 공동의장인 최우영 충남대 교수는 <3·8민주의거>에 실린 기고문에서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조석간 3면 톱기사로 특필하였고, 이어서 연일 후속기사를 내보면서 3면 즉 사회면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비중 있게" 다뤘다고 알려준다.
정치권 반응도 대단했다. "여야는 경악과 흥분, 유감을 표하면서 상반된 주장과 견해를 나타내었다"고 최 교수는 말한다. 자유당은 대전고 학생들을 민주당의 조종을 받는 괴청년들로 매도했다. 3월 9일 자 <조선일보> 1면 중간에 따르면, 자유당 충남도당은 "중앙에서 파견된 듯한 정체불명의 청년 50여 명"이 폭동을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공부만 하던 학생들이 자기 당을 상대로 대규모 저항을 일으킨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문교부는 진상 조사에 착수하고 내무장관은 경고 입장을 발표하고 충남경찰국장은 경고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 정권이 대전 학생들 때문에 꽤 당황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세상을 얼마나 움직였는지는 시위 현장의 시민 반응으로도 확인된다. 최우영 교수는 "시민들은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는 한편, 경찰에 뒤쫓길 때는 서슴없이 숨겨주었다"라며 "대흥·문창·인동의 골목길까지 쫓겨오는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숨겨주던 집주인들, 중앙시장 골목에서 쫓기는 학생들을 진열대 안으로 숨겨주던 점포 주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층 창문을 열고 격려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자유당과 친이승만 경찰을 제외한 대전 시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됐던 것이다.
3·8민주의거는 2·28의거로 폭발한 반이승만 항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중간 기폭제였다. 이는 3·15 마산 의거 및 4·19 경무대 앞 시위 등과 함께 1960년 시민혁명을 구성하는 핵심 장면 중 하나다. 그것이 지금은 3·8민주의거 기념일이라는 문구와 함께 달력 속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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