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영국 런던에서 우크라이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의 정상들이 모였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정치전문매체 <
폴리티코>에 따르면,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충돌 이후 유럽연합(EU)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트럼프를 공격하며 다음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했다.
"오늘, 자유세계에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이 도전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 유럽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에스토니아 총리 출신의 칼라스 고위대표가 던진 이 메시지를 살펴보자. '자유세계'를 언급한 것은 트럼프 등장을 기점으로 과거 미국과 유럽 중심의 자유세계에서 더 이상 미국이 리더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리더를 단수(a new leader)로 지칭했다.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어느 특정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결국 그 의미는 다음 문장에서 복수로 표현한 '유럽인들'(Europeans)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그가 말한 자유세계의 새로운 리더는 어느 하나의 국가가 아닌 유럽인들과 유럽 국가들의 연합인 'EU'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 EU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 싱크탱크인 킬 세계경제연구소가 지난 2022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우크라이나 지원 현황을 추적한 것에 따르면 EU는 약 74조 원(513억 달러)을 지원했다. 약 173조 원(1197억 달러)을 지원한 미국에 이어 2위다.
1위인 미국과의 격차가 약 100조 원에 달하지만, EU 뒤를 잇는 국가들의 지원 규모를 보면 칼라스 고위대표가 하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3위인 독일은 약 26조 원, 4위인 영국은 약 22조 4000억 원, 5위인 일본은 약 16조 원을 기록했다).
국가의 부활
그러나 현실에서 EU는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안보 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를 두고 미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개별 국가들만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2일 런던에서 열린 정상회의도 개별 국가들 중심이었고, 대다수의 유력 언론 매체들도 EU가 아닌 개별 회원국 정상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라는 침략자와 우크라이나라는 희생자가 있다"라며 모호해지고 있는 이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밝혔다. 독일의 슐츠 총리는 "우크라이나인들보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없다"라며, 우크라이나 지지 의사를 재확인했다.
이 외에도 벨기에, 폴란드, 네덜란드, 스페인 정상들의 발언들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EU 회원국이 아닌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와 호주의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 발언까지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이렇게 EU는 보이지 않고, 개별 회원국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와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EU 회원국 정상 가운데 극우 정치인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먼저 오르반 총리는 트럼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강한 사람은 평화를 만들고 약한 사람은 전쟁을 만든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트럼프가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고 칭송했다. "고맙습니다, 대통령님!"을 외치면서.
멜로니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고 있는 미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모양새다. 그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라며, '지체 없이' 미국과 유럽의 정상회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틈을 타 중재자 외교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충돌 사태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다. 여기에 자유주의 노선을 천명하는 호주, 캐나다 등과 같은 국가들도 포함된다.
둘째, 트럼프의 미국과 미국을 지지하는 헝가리다. 분명 바이든 행정부 당시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중심으로 유럽과 함께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런 기류가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전면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이번 2월 28일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만남이다.
마지막은 이 둘의 대립 사이에서 나름 중재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탈리아라고 할 수 있다. 멜로니 총리의 행보는 트럼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유럽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 자리가 없는 유럽연합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본부 밖에 유럽연합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에서 미국은 EU와 나토를 중심으로 한 대서양 동맹을 중시했다. 반면, 트럼프는 1기부터 대서양 동맹은 물론 EU와 나토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에 EU는 2022년 이래로 유럽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트럼프의 재등장 이후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EU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돈을 쓰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EU는 보이지 않는다.
EU가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나름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는 1990년대 발칸지역에서 경험한 EU의 무능력과 관계가 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이듬해 EU는 마스트리흐트조약을 통해 단순히 경제 공동체에서 정치·경제 공동체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이는 국제정치사에서 유례없는 국가연합으로,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었다.
야심 찬 계획과 달리 1990년대 초 발발한 발칸 지역의 내전은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 EU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 EU는 발칸 위기가 유럽 내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발칸반도의 화약고'로 불리는 코소보 지역에서 무려 1만 3000여 명이 숨지는 참혹한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미국이 개입하면서 이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EU는 이후 경제 통합을 기반으로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통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 EU는 2000년대 유로화가 도입되고, 15개의 회원국에서 28개 국가로 급성장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과거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이 EU는 물론 나토에 가입하면서 EU는 단순히 경제 공동체를 넘어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EU의 위기는 2010년대 유로존 위기로 시작되어 난민과 브렉시트 이슈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EU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회원국에 지나지 않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단연 돋보이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속에 트럼프의 재등장은 EU에 악재다. 결국 이번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충돌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는 EU의 설 자리가 없다는, 개별 국가 중심의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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