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10 11:59최종 업데이트 25.03.1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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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해 소련에 새 지도부가 들어서고, 미국은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건 정권으로 바뀌면서 휴전협상이 다시 진전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양 진영의 최고 당사자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힘이 실렸다.

1953년 4월 판문점에서 양측은 휴전회담 본회의와 참모장교회의가 연속해서 열렸다. 토의하고 논쟁하고 설전을 벌이면서 중국측이 양보하고 미국이 수정하면서 6월 8일 포로송환 협상에 합의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전선에서는 새로운 공세를 퍼부어 밀리고 밀린 전선을 업데이트해서 군사분계선도 6월 17일 합의했다. 이제 조인하는 일만 남았다. 휴전협상은 다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휴전협상 일시에 중단시킨 이승만의 돌발행동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NARA/박도

6월 18일 0시 휴전협상에서 가장 난제였던 송환거부 포로에 관한 미국과 중국측의 합의를 깨버릴 것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소위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육지의 7개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들은 한국 헌병대의 언질을 받고 수용소를 집단적으로 탈출했다. 이날 오전 6시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은 제네바 협약(제12조 전쟁포로는 그를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에 따라 한인 애국 포로수용소를 접수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한다는 성명을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했다. 아울러 수용소 인근의 부대 경찰관 애국청년단과 일반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3만5689명의 송환거부 포로 가운데 77%인 2만7389명의 포로가, 헌병대가 잘라 놓은 철조망 사이로 빠져나갔다. 포로수용소는 유엔군이 관리했지만 경비는 주로 한국군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용소에서 미군은 이런 사태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심각한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부평의 미군기지 내에 있던 제10포로수용소에서는 한국군 경비병을 철수시키고 미 해병대가 이중의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헌병대가 수용소의 전선을 끊어 포로들의 탈출을 유도하자 이들 포로를 저지하는 미군이 사격을 가해 47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했다. 전국에서 탈출한 포로 가운데 931명이 다시 체포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반공포로는 한국 당국의 비호 아래 현지 주민들 사이로 빠르게 흡수돼 사라졌다.

6월 19일 이승만은 자신의 책임 하에 포로를 석방했다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 중인 모든 한국군 장교들에게 긴급 소환령을 내리고 휴전회담 대표단에서 한국군 장교를 철수시켰다. 이것은 이미 이승만이 예고한 사태였다.

거제도, 유엔군들이 포로송환을 위하여 친공 및 반공포로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1953. 4. 13.).NARA/박도

이승만은 애초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 추진에 불만이 많았다. 한국전쟁에서 제1의 당사국이었고 명색이 동맹국이었지만 휴전협상에서 배제됐고 국내외에서 이승만의 존재감이 저하되고 있었다.

1953년 4월 휴전협상이 재개되자 이승만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4월 21일 남한의 국회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지지한다고 결의했다. 거리에서 관제데모 군중집회까지 열리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는 선동적인 구호가 울렸다. 이승만은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수하지 않으면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유엔군 사령관으로부터 철회하고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하면서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5월 25일 미국이 송환 거부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이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최종 타협안을 중국 측에게 제시하자 이승만은 더 강하게 반발했다. 동맹국인 자신과 다시 협의해 새로운 제안을 하지 않으면 중국군과 유엔군이 동시에 철수하는 남한 단독의 휴전안을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송환거부 포로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이들을 곧 석방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 말했다. 이때 구체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언급했지만 이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휴전협상은 송환거부 포로들의 처리 방법 때문에 1952년 7월부터 진척되지 않고 전선에서는 계속되는 공세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누적되고 있는데, 반공포로를 협정체결 이전에 남한이 일방적으로 석방한다면 이미 합의한 휴전협상이 깨질 수도 있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조인만 남겨둔 휴전협상을 일시에 정지시켰다. 중국 측은 미국과 유엔군 사령관 이름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하면 남한도 그것을 준수하고 이행할 것인지, 미국의 책임과 보장을 추궁했다.

반공포로를 석방한 다음 6월 19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포로 탈출은 남한 정부가 공모한 것으로 미국은 책임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석방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한국군 경비대가 유엔군 사령관에게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의 지휘를 위반한 것에 대해서만 문제를 지적했다.

사실상 일방적인 석방은 미국이 휴전협상을 해오면서 검토하던 방책의 하나였다. 중국 측을 압박하기 위해 1952년 6~8월에 민간인 억류자 2만7504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한 전례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측이 미국의 5월 25일자 최종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협상을 끝내버리고 공세를 재개하면서 송환거부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할 계획도 있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무책임한 행동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전협정이 조인되면 자동적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있던 작전지휘권을 회수한다고 맞섰다. 미국은 국무부 차관보인 로버트슨을 파견했다. 미국으로서는 이승만이 휴전에 동의하고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하에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슨은 이승만과 여러 차례 만나 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이 주장한 핵심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의 증강을 약속하면 휴전에 동의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엔군 사령관에게 두겠다는 것이다. 7월 11일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최종 회담이 열리고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성명을 양국이 발표했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시기와 내용에 대해 명확한 답을 받지는 못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기로 한 7월 24일에도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긴급한 문제라면 서신을 보냈다. 덜레스는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에게도 당신에게 준 것만큼 준 적이 없다"는 꽤나 짜증나는 말투로 답신했다.

이승만은 인기 얻고, 병사들은 목숨 잃었다

서울, 정전반대 시위학생들과 대치한 미8군 헌병들(1953. 6.).NARA/박도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과는 갈등이 발생했지만 국내 정치로는 큰 성공을 거뒀다. 반공포로를 공산국가로 보낼 수 없다는 이념적인 정당성이 크게 공감대를 만들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외교적으로 일부 주도권을 잡았고 휴전협정에서 배제됐다는 국민들의 불만을 적절히 대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는 급상승했다. 그가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 직후인 8월 8일 가조인됐고 10월 1일 정식으로 조인됐다. 그 부속협정으로 1954년 11월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합의 의사록에 서명했다. 이승만의 휴전반대와 북진통일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었고 적국은 물론 동맹국에게도 설득력이 없었지만 이를 통해 국내 정치에서는 불리한 위치를 크게 개선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전선에서는 공세가 다시 심해졌다. 6월 15일 양측 참모장교회의에서 새로운 군사분계선에 합의하자 중국의 펑더화이는 더 이상 주도적인 공격은 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6월 18일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협정체결이 불투명해졌고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6월 23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협정체결을 미루고 한국군 1만여 명을 섬멸하라"고 전문을 보냈다. 중국측은 적극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6월 24일 동부와 중부 전선에서 공세를 시작하고, 7월에는 7.13공세로 강원도 금성 지역을 공격했다. 유엔군이 1951년의 추계공세에서 확보한 금성지역은 폭 31km, 종심 10km로 북으로 돌출된 지역이었다. 중국군의 공세로 돌출부의 반을 빼앗겼다. 중국군은 화천 저수지와 발전소까지 염두에 두었으나 그곳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군은 1만4409명이 전사 부상 또는 실종됐고, 금성지구 돌출부의 반 정도를 빼앗겼다.

포로협상에 합의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만 따지더라도 인명피해가 엄청났다. 1953년 6월과 7월의 전투에서 유엔군 사상자가 5만3000여 명이었고 중국군 측은 10만8000명에 이른다고 평가했다. 그 가운데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바람에 2주 정도 지연되는 동안 유엔군에 1만7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과 미국 특사 로버트슨의 회담에서 이승만이 휴전에 동의하고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 아래 둔다는 의사가 확인되자 미국은 6월 29일 협정의 발효일자를 협의하는 회담을 제의했다. 이는 이승만에게도 통보했다. 미국이 이승만의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며 시간을 끌기에는 전선에서의 인명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중국측도 이승만을 고립시킨 채 정전협정을 체결하기로 입장을 정했다.

중국군은 금성지구 돌출부를 탈취하고 공세를 멈췄다. 판문점에서는 7월 24일 다시 군사분계선을 조정해서 최종합의를 했다. 군사분계선 1차 합의는 1951년 11월 27일이었고, 1953년 6월 15일 두 번째 합의를 했으나 7월 24일 새로 합의해야 했다.

세 차례 합의를 갱신하면서 1차에 비교하면 2, 3차 모두 중국 측에 유리한 결과가 됐다. 면적으로는 332.6㎢를 북측에 빼앗겼다. 이것만으로 보면 미국의 전투계속의 원칙은 자신이 주장해서 관철시킨 원칙이지만 수많은 희생자만 내고 전선에서도 손해를 봤으니 실패한 정책이다. 그렇다고 중국 측이 성공했다는 말도 성립하긴 어렵다. 유엔군에 비해 두 배 또는 그 이상의 인명피해를 냈으니.

7월 10일 휴전회담 본회의가 다시 열렸다. 중국 측은 계속해서 한국의 정전협정 준수를 미국이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은 한국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행위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북한은 7월 20일 조인식장 건설을 한 달 만에 재개했다. 당초 24일로 예정했던 조인은 다시 27일로 밀렸다.

정전회담 조인식, 미군 측 해리슨 제독과 북측의 남일 대장이 쌍방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1953. 7. 27.).NARA/박도

드디어 1953년 7월 27일이 됐다. 10시에 양측 수석대표 두 사람이 정전협정 조인장에 들어서서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각각 서명을 했다. 서명이 끝나자 웃는 얼굴도, 맞잡은 악수도, 기념촬영도 없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퇴장했다. 오후 1시 문산의 유엔군 기지에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서명했다. 김일성은 그날 밤 10시 평양에서 서명했고 중국인민의용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28일 아침 9시 반 개성에서 서명했다. 최고위 인물들은 판문점 조인장에 나타나는 경호상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전협정은 수석대표가 서명한 지 12시간 후인 밤 10시에 발효됐다. 한 참전용사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비무장지대를 만들기 위해 2km 후퇴를 했다. 그가 있던 지역에서는 남과 북 양쪽에서 야포를 철수시키면서 남아 있는 포탄을 전부 쏘아버렸다고 한다. 그러더니 밤 10시에 거짓말같이 포성이 멎었다. 달빛만 남더란다. 그날이 음력 18일이었으니 달빛이 환했을 것이다. 포성은 그렇게 멎었다.

포성은 멎었지만

미 해병 1사단 11연대의 제1 로켓포대가 야간 포격을 하고 있다(1953. 4. 15.).NARA/박도

포성이 멎고 판문점에서는 포로교환 준비에 부산했다. 포로 송환은 8월 5일 시작해 9월 6일 완료했다. 유엔군 측에서 7만5823명을 송환했다. 중국인이 5640명, 한국인이 7만183명이었다. 중국측은 포로 1만2733명을 송환했다. 미국인 3597명, 한국인 7862명 그 외 다른 국적자들도 일부 있었다.

6월 18일의 반공포로 석방에서 탈출하지 않았던 한국인 포로를 포함한 송환거부 포로는 2만2604명이 있었다. 이들은 9월 23일 비무장지대의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도됐다. 중국측에서 인도한 송환거부 포로는 359명으로 대부분 남한 출신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양측이 자군 포로를 대상으로 송환을 설득하는 절차는 10월 15일 시작됐다.

그러나 반공포로들의 조직적 저항에 설득 절차는 원활치 진행되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12월 23일 90일이란 시한이 만료됐다. 137명은 마음을 바꿔 송환에 응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중국인 포로는 90명, 한국인 포로는 47명이 그렇게 추가로 송환됐다.

나머지 송환거부 포로들은 다시 정치회담에 넘겨 30일 이내애 처리하기로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정치회담 자체가 전망이 불투명했다. 중립국 송환위원회는 이들을 원래의 수용 지휘부로 돌려보냈다. 미국은 유엔군 포로수용소로 돌아온 이들을 석방해 버렸다. 중국측은 이를 비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국인 송환거부 포로들은 본국이 아닌 타이완으로 송환했다. 송환이 아닌 송환이었다. 1954년 12월 1일 중립국 송환위원회는 해산했다. 한국전쟁을 마무리하는 정전협정에서의 포로교환은 이렇게 끝났다.

이제 정전협정이 규정한 마지막 절차는 정치회담이었다. 1953년 10월 26일 예비회담을 시작했으나 12월 12일 무기휴회하고 말았다. 중국측은 소련과 인도를 중립국으로 참여시키는 원탁회의로 정치회담을 하자고 주장했고 미국은 양측의 대좌로 하자고 했다. 서로 합의될 수 없는 차이였다.

1954년 1월 25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 외상회의에서 제네바 정치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4월 27일부터 6월 15일까지 남한과 북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유엔군 파병 15개국과 중국 소련 등 19개국이 참석했다. 미국은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로 한반도를 통일하자고 했다. 중국측은 남북한이 외부의 간섭 없는 독자적인 선거 또는 중립국이 감시하는 선거로 하자고 대립했다.

중국측은 집요하게 유엔을 공격했다. 유엔이 한국전쟁의 당사자이고 적군인데 어떻게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치를 수 있냐는 주장이었다. 또한 유엔은 중국과 북한도 가입시키지 않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했다. 미국은 유엔에 공격이 집중되자 회의를 종결시켰다. 회의의 결론은 없었다. 남한과 유엔군 참전국들이 한국 문제를 유엔총회에 넘긴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끝났다.

한국전쟁은 1953년 조인한 정전협정으로 전면전이라는 전투행위는 중지됐으나, 전쟁 후의 체제를 구축하는 강화조약이나 평화조약은 성립되지 않았다. 미소의 냉전체제가 한반도를 냉전의 전장으로 압도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날 밤 10시 포성이 멈추기는 했지만 한국전쟁은 종결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2025년 3월까지 70년이 훌쩍 넘었건만 전쟁은 계속됐다. 서로 '저놈이 나쁜 놈'이고 '저놈 때문'이라는 격렬한 정치적 구호와 몸부림 속에 권력은 더욱 탄탄하기만 했다. 북한에서는 세습 3대의 신공이라고나 해야 할 정도니 더 이상 뭐라 말할 게 없다. 남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또는 전쟁을 핑계로 독재와 탄압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노고 속에 경제발전을 이뤘고,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희생을 감수하고 투쟁한 끝에 힘겹게 정말 힘겹게 민주화도 이뤘다. 민주화는 한때 불가역적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외피를 이리저리 바꿔 민주화를 수시로 흔들었다.

지금도 '저놈 나쁜 놈'이라는 저주와 '나쁜 놈은 죽여도 된다'는 한국전쟁의 공포와 망령이 남한 내부에서 내부를 겨냥하여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2024년 12월의 계엄령 사태가 그것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은 그 외연을 달리하고 있을 뿐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적인 우경화와 극우의 득세 속에 '더 큰 전쟁'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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