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9 19:32최종 업데이트 25.03.0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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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반민특위의 친일파 수사 중에 친일파가 증인 매수를 시도하는 일이 있었다. 고문경찰 하판락(1912~2003)이 그 장본인이다.

하판락은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 경상남도조사부에 체포됐다. 뒤이어 그해 5월 반민특위 수사관이 고문 피해자인 독립운동가 이광우(1925~2007)의 부산 집을 방문했다. 이광우는 비밀결사인 친우회를 결성해 공장·시장·부두 등에서 항일전단을 배포하다가 18세 때 체포돼 하판락에게 고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4권 이광우 편은 "불에 달군 화젓가락 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한 만행"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이광우의 진술을 받아간 반민특위는 3개월 뒤인 8월 중순에 증인 소환장을 발부했다. 24세 된 이광우와 37세 된 하판락을 대질심문하기 위해서였다.

이광우 집에 소환장이 송달되고 며칠 뒤였다. 부산동부경찰서 형사가 사람 하나를 데리고 그 집을 노크했다. 동행자는 하판락의 아버지 하한운이었다. 이광우는 농산물 구매를 위해 인근의 고성으로 출장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이광우의 아버지가 친일파의 아버지를 응대하게 됐다.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이 저지른 만행

2002년 3월 2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캡처. 하판락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모습.MBC 홈페이지

하판락의 아버지는 돈을 내밀었다. 돈봉투에 든 돈은 아니었다. 보훈부의 <이광우 공적서>에는 "돈 보따리를 내밀며"라고 적혀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8권 하판락 편에 실린 이 공적서에 따르면, 하판락 아버지는 "며칠 후면 하판락이 부산으로 피해자와의 직접 대질심문을 하기 위해 내려온다"라며 "그때 당신 아들 이광우가 하판락을 모른다고만 해달라"라고 청탁했다.

전년도인 1948년 9월 22일부터 시행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제4조 제6호에서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모든 일제경찰이 아니라 악질 일제경찰을 반민족행위자로 한정했던 것이다.

하판락은 김태석·노덕술 못지않은 친일 고문경찰이었다. 하판락 측의 증인매수 시도는 '악질적인 행위'의 입증을 곤란케 해서 반민법 적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눈앞에 다가온 돈봉투를 독립투사의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고 공적서는 알려준다. 증인 매수 시도는 허망하게 끝났지만, "밤이 늦어 통행금지 시간으로 됨으로 인해 함께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밥을 대접 후 돌려보냈"다고 공적서는 말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하판락 편에 따르면, 그는 지금의 경남 진주인 진양군 명석면에서 태어나 진주제일보통학교·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1세 때인 1933년에 진주군청 고원(雇員)으로 임시직 근무를 시작한 그가 일제 경찰이 된 것은 이듬해다. 1934년에 순사채용시험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경남 사천경찰서-삼천포주재소-사천경찰서-부산수상경찰서-경남경찰부를 돌며 일제에 부역한 그는 1939년에 부임한 마지막 근무지에서 고등경찰과 경찰로 활동했다. 그가 일왕의 녹봉을 받은 기간은 1945년까지 11년간이다. 마지막 6년간은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부서에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이 시기에도 월급은 봉투로 지급됐다. 그의 월급봉투에 든 것은 한국인들의 피멍이었다.

그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악독한 고문을 자행한 대가였다. 위 공적서에 담긴 이광우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가 돈봉투 아닌 돈 보따리를 내밀어야 했던 이유를 짐작케 된다.

이광우는 "하판락 일당의 가장 악랄한 주특기 고문은 피의자들의 옷을 발가벗긴 후 주사기로 피를 뽑아 몸에 뿌리고, 이로 인해 정신을 잃게 하는 일명 착혈고문"이었다고 진술했다. 731부대의 마루타 실험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 기법을 썼던 것이다.

하판락은 물고문도 활용했다. "꿇어앉힌 상태에서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춧가루를 섞은 미지근한 물을 코에 갖다 붓는" 방식이었다. "지독한 물고문으로 숨을 쉴 수 없어 기절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고 이광우는 회고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잘 나오는 고문 방식도 동원됐다. "손과 발을 묶어 천장에 묶어놓고 주먹과 몽둥이 그리고 와이어로프로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하는 것은 예사"였다.

사극에 나오는 주리 틀기를 응용한 방식도 있었다. 이광우는 "꿇어앉은 본인의 종아리 사이에 야구 방망이를 끼워넣고, 무릎 위에 친일 경찰들이 올라타서 힘껏 굴림으로 인해 다리 근육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으로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도록" 만들어놨다고 회고했다. 그 아버지가 돈 보따리를 단호히 거절한 이유를 이런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이광우는 30대 초반부터 다리를 절게 됐다.

"나무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손가락을 비틀어 손가락 관절이 빠져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만드는 고문도 있었다. 이것이 하판락의 "기본적인 고문"이었다. 그를 만나면 반드시 손가락 비틀림을 당해야 했다. 이런 고문을 가하면서 그는 "조센징! 조센징!" 하며 모욕감을 줬다. 반민법 제4조 제6호의 "악질적"이라는 조건에 잘 부합하는 친일 경찰이었다.

하판락은 고문수사뿐 아니라 사건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이광우를 비롯한 친우회 학생들을 이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울산부산 마르크스레닌주의연맹 소속 운동가들과 엮기 위한 억지 수사도 벌였다.

이 연맹 운동가인 이미동·여경수 외 10여 명이 이광우 등을 포섭해 사회주의자로 만들려 했다는 쪽으로 수사의 그림을 만들었다. 10대 학생들까지 포섭할 정도로 사회주의자가 위험하다는 인식을 조장할 목적이었다. 이 수사의 결과로 독립운동가 여경수는 고문 중에 순국했고, 스무 살이 안 된 이광우는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뒤에 미군정 경찰이 된 하판락은 경남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 9월에 퇴직했다. 1949년에 체포돼 기소됐지만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그 아버지가 돈 보따리를 들고 이광우를 찾은 그해 8월의 일이다. 이광우 매수에는 실패했지만, 이것이 사법처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약화시켜놓은 뒤였기 때문이다.

7년 뒤 하판락은 고향에서 경남도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런 뒤 "부산에서 금융업과 목재업에 종사했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하판락의 자백...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이광우

일제때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경찰을 10여년동안 끈질기게 추적해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한 이광우(왼쪽)씨의 아들 상국씨가 항일운동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2000.8.14.연합뉴스

37세 때인 1949년에 하판락은 '이광우는 하판락을 모른다'는 증언을 끌어내려다가 실패했다. 이것과 대비되는 일이 88세 때인 2000년에 있었다. 그해 1월 17일 자 <대한매일> 인터뷰에서 그는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라고 말하는 한편, 일제경찰 시절 이광우를 수사한 일을 언급했다.

'하판락이 이광우를 안다'는 이 진술은 그때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않았던 이광우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인을 받는 계기가 됐다. 정부는 1989년에 이광우의 서훈 신청을 받았지만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위의 <독립유공자공훈록>은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라고 기술한다. 친일 경찰이 독립운동 사건 때문에 이광우를 수사했다고 언급했으니, 이보다 확실한 독립운동의 증거는 없었다.

하판락이 반민족·반인류 범죄를 사과했지만 이것으로 다는 아니다. 하판락의 독립운동가 탄압은 그 개인의 사업이 아니었다. 그는 녹봉을 받고 일제의 사업을 했다. 그래서 그의 범죄는 그 개인의 범죄이기에 앞서 일본 국가의 범죄였다. 일본이 사과·반성하고 배상해야 그의 사과·반성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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