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1 10:55최종 업데이트 25.03.0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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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년 전 만세 시위 현장에는 시위대와 진압군뿐 아니라 행인들도 당연히 있었다. 행인들은 그냥 행인으로 남아 응원 혹은 구경을 하거나 아니면 3.1운동 시위대로 합류했다.

1919년 그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은 자기 목청에서 나온 그 울림을 일차적으로 자기 가슴에 전하고자 했다. 더 이상 일제의 착취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기 다짐의 성격이 가장 컸다. 그들은 그 울림을 진압군의 눈귀를 통해 일제에도 전하고자 했고, 행인들에게도 전파해 참여와 동조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시위 현장의 행인들 중에는 일제의 한국 지배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3.1운동에 관한 기록들 곳곳에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친일파 최병혁을 비롯해 이 시리즈에서 소개된 적 있는 친일파 박의병, 친일의 최일선인 헌병보조원 일을 하는 이주석 등의 모습이 마치 '쇼츠 영상'처럼 역사기록 여기저기에 짤막하게 남아 있다.

"천시를 모르는 일"... 군중들 자극한 친일파

3.1운동을 표현한 조각
3.1운동을 표현한 조각위키미디어 공용

박의병은 일제강점 훨씬 전부터 일본의 군용지 및 철도부지 확보를 돕고자 민간 가옥 철거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시세의 45분의 1 정도로 매입하는 강탈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처럼 자기 손에 피를 많이 묻힌 대가로 강원도 철원 갑부가 됐고, 부인 유주경(박주경)은 일본 왕족 여성들이나 받던 훈장인 보관장을 받았다.

그랬던 그가 철원에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10일 시위대에 동조하는 일이 있었다. 시위대가 그의 집인 철원군수 관사 앞에 몰려갔을 때의 일이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2권은 "군중에게 끌려 나가 매를 맞아 만세를 불렀"다고 기술한다.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라고 시키지는 않은 듯하다. 시위대가 그곳에 몰려간 것은 이완용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완용의 은신처를 찾고자 그를 끌어내 매질했더니, 엉뚱하게도 '대한독립 만세'가 나왔던 것이다. 이날 화를 모면한 그는 그 뒤 더욱 열심히 친일을 해서 1927년에는 국회의원급인 중추원 참의가 됐다.

이주석 같은 헌병보조원들은 3.1운동 때 표적이 됐다. 위 책에 따르면, 1919년 3월 9일 서울(경성) 수송동 중동학교 앞에서 "조선인 헌병보조원이나 순사보는 각자 그 직장을 버리고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전력하라"는 항일전단이 배포됐다.

이 유인물 30장을 받은 학생 이영준은 거주지인 용강면(서울 마포 일대)에 가서 배포했다. 이주석도 그 한 장을 받았다. 이주석은 "당신네들도 우리와 같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민족의 이익이 되도록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독립운동사>는 이 일로 인해 이주석이 투옥됐다고 알려준다. 그 권유에 따라 시위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투옥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만세를 외친 박의병이나 항일전단에 호응한 이주석과 달리, 최병혁은 꽤 대담한 방법으로 시위 현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의 극우단체인 자제단(자제회)이 벌이는 '일제배격 반대집회'에 참여하는 정도를 벗어나, 아예 '일제배격 찬성집회' 쪽에 접근해 시위대를 자극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병혁 편에 따르면, 강압적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2년 뒤인 1878년에 태어난 그는 1902년에 24세 나이로 황해도관찰부(황해도청) 주사가 됐다. 대한제국하에서 탁지부(재정기획부) 세무관, 해주재무서(세무서와 비슷) 서장, 평양재무서 서장, 의주재무서 서장을 역임했고, 1910년 일제강점 뒤에는 황해도 신계군수·금천군수·은율군수 등으로 부역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 최병혁 편에 따르면, 그가 일제의 녹봉을 받은 것은 국권침탈 4개월 뒤인 1911년 1월 18일부터다. 일제에 부역하던 중인 1920년 8월에 42세 나이로 '순직'했으므로 9년 넘게 친일재산을 축적한 셈이다. 1910년 8월 29일부터 1911년 1월 17일까지만 친일 녹봉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모범적인 친일파였다. 일제는 그를 자주 칭찬했다. 1912년 8월 1일에는 일본 정부가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했고, 1915년 11월 10일에는 요시히토일왕(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하사했다.

그가 마지막 임지가 될 은율군에 부임한 것은 1917년 10월 27일이다. 이로부터 약 1년 반 뒤인 1919년 3월 26일, 그는 은율장터의 만세 현장에 출현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이 현장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친일파들"이란 표현을 쓴 것을 보면, 그곳에 홀로 가지는 않은 듯하다. 이날 그는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했다. "독립운동은 천시(天時)를 모르는 일"이라는 발언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민중들의 진정을 요망"한다는 입장 표명도 있었다.

'천시를 모르는 일'이라는 말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천시·지리·인화(人和)'를 하나의 세트로 인식하는 데 익숙했다. 그 셋은 세상사의 3대 요소로 이해됐다. 그런 시절이기 때문에, "천시를 모르는 일"이라는 발언은 지리와 인화에도 어긋나는 일이라는 의미를 함께 전달하기가 쉬웠다. 이는 '너희는 세상을 잘못 살고 있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나온 군중들을 단단히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연설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현장 분위기는 격분 상태로 일변했다. 위의 <독립운동사>는 "애국 동포들 중에는 분을 참지 못하여 친일파들에게 대들 기세를 보이기도 하였다"고 기술한다. 때마침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다.

독립투사에 총 맞고 사망... 사후 일제에게 훈장 받아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당시의 독립 의지를 담은 진관사 태극기를 형상화한 대형 현수막이 국회 의사당 외벽에 걸렸다.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당시의 독립 의지를 담은 진관사 태극기를 형상화한 대형 현수막이 국회 의사당 외벽에 걸렸다.유성호

그날은 화를 모면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연설은 그를 독립운동진영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위의 진상규명보고서는 "최병혁은 대한독립단에 의해 독립운동을 방해한 친일파 군수로 지목"됐다고 알려준다. 만주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단체까지 그를 주시하게 됐던 것이다.

1년 반 뒤인 1920년 8월 15일 밤 11시경, 대한독립단 대원들이 최병혁의 은율군수 관사 앞에 출현했다. 그들은 담장을 뛰어넘어 방안으로 침입한 뒤 최병혁의 우측 가슴에 권총을 겨누었다.

이듬해 7월 20일의 <동아일보> 3면 좌단에 실린 해주지방법원 예심결정문은 "11시경 이지표는 군수 최병혁 주택 외담을 승월(乘越)하야 동가(同家) 방내(房內)에 침입하여 소지(所持)의 단총(短銃)으로 방내에 재(在)한 동인(同人)을 저격하여 기(其) 우유부(右乳部)를 명중, 즉사케" 했다고 기술한다. 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3권에 따르면, 독립투사 이지표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죽인다"고 선고한 뒤 총을 쐈다.

독립운동진영이 최병혁을 처단함으로써 '친일의 대가는 이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자, 일제 당국도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보름 뒤이자 한국 강점 10주년인 8월 29일, 일제는 고 최병혁에게 훈장(서보장)을 추서했다. '충성의 대가는 이것이다'라고 맞불 메시지를 날린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최병혁의 명예가 뚝 떨어졌다. 오늘날 일본 정부는 최병혁 같은 인물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반면, 그의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표기돼 있다. 그날 그의 연설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결정적 계기다. "천시를 모르는 일"이라며 시위 군중을 꾸짖은 그의 행동이야말로 천시는 물론이고 지리와 인화를 포함해 세상사를 잘 모르는 '무식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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