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5 11:10최종 업데이트 25.03.0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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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내가 보기에 가장 뛰어난 전기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인 <링컨>이 그렇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를 보면서 <링컨>을 떠올렸다.

영화 내적인 만듦새나 완성도로 볼 때 <시빌 워>는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가 갖춰야 할 핵심 요건인 입체적 인물(캐릭터) 형상화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내전 사태라는 극적인 사건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러나 <링컨>이 그렇듯이 <시빌 워>도, 선동과 내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지금 한국 사회의 상황에 대해 깊은 울림을 지닌다. 내전(Civil War)은 한 국가 내에서 정치 집단, 혹은 민족이나 종족 집단이 국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 충돌을 벌이는 전쟁이다.

통합된 미국이 무너진다면

영화 <링컨>의 한 장면20세기폭스코리아

<링컨>의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은 남부의 분리 독립을 두고 벌어진 긴 내전이었다. 어려운 시대는 뛰어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요구한다. <링컨>에는 노예제 폐지가 담긴 수정헌법 13조 통과를 위해 링컨이 했던 각고의 노력이 그려진다. 링컨은 두 개의 힘든 과제를 마주했다. 하나는 노예제 폐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칫 북부연방과 남부연합으로 나뉠 뻔한 국가 분열을 막고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미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남북전쟁 혹은 내전을 해석하는 데 자주 보이는 오류는 이 전쟁이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찬반 대립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링컨은 만약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고 국가 통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도 우선 과제인 국가 통합에 필요했기에 추진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백악관과 국회의사당과 함께 링컨 기념관을 나란히 세운 이유도 링컨이 두 개로 쪼개질 뻔한 국가 분열을 막았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후에 미국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민주주의 모범 국가로 인식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미국 모델을 따라 정치 시스템을 만들었다. 강력한 삼권 분립, 특히 의회와 사법부의 행정부 견제 체제를 만들어서 실질적으로 행정부와 의회가 국가 권력을 나눠 갖게 하고,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언론과 시민사회의 기능도 강력하다. 덧붙여 연방 정부와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각 주 정부와 주 의회, 주 사법부의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의 한 장면.(주)마인드마크

영화 <시빌 워>는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근거한다. 그 두려움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도 지금 느끼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구체적인 경위는 안 나오지만, 미국 헌법이 금지하는 3선 대통령이 이끄는 권위주의적인 연방 정부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주(state) 연합을 동력으로 한 분리 동맹(서부 동맹 Western Forces, WF) 사이에 전 미국에 걸친 내전이 전개된 상황이다.

영화에서 민주당 지지가 강한 캘리포니아와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텍사스가 힘을 합쳐서 분리동맹을 구성한 것은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연방 정부의 권위주의 혹은 독재에 반대하는 주들이 연합한 것을 보여준다. 이런 구도는 전통적인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 독재에 맞서는 동맹과 갈등을 강조하여, 내전의 복잡성을 부각하기 위한 설정이다. 왜 내전이 벌어졌는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 점을 부각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그런 과정을 다 보여주려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시리즈가 어울린다.

<시빌 워>는 이미 내전이 전 미국에 걸쳐 진행 중이며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연합해 정부군과 전투 중이라는 상황만이 나온다. 주인공은 궁지에 몰린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수도로 향하는 기자들이다. 베테랑 사진 기자 리 스미스(커스틴 던스트)와 취재 기자 조엘(와그너 모라), 야심을 지닌 새내기 사진 기자 제시(케일리 스패니), 선임 기자이며 리와 조엘의 멘토 역할을 하는 새미(스티븐 헨더슨)라는 언론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독재자로 설정된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내전의 참상을 목격한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몇 장면이 있다.

<시빌 워>에서 분리동맹 군대는 전투 중 링컨 기념관을 폭파한다. 이 장면은 <링컨>이 보여줬던, 미국의 통합과 자유의 상징인 링컨 대통령의 유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상징한다. 국민 통합을 기초로 한 미국의 근본적인 가치와 역사적 유산이 내전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링컨 같은 정치인은 국가 통합을 위해 헌신하지만, <시빌 워>에서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독재자 대통령은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국민 사이의 분열을 선동한다. 역시 이곳에서도 지금 확인하는 모습이다.

그는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3선 독재 대통령으로 나오지만, 어떻게 미국 헌법이 금지하는 3선에 성공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그는 국민을 상대로 한 전투를 "군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하는 등 파시즘을 보여준다. 링컨처럼 뛰어난 지도자는 국가를 통합하지만 졸렬한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분열시킨다.

선동과 분열의 결과는 미국민 사이의 갈등과 학살이다.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에서 무장한 정부군은 자신들이 학살한 시체 앞에서 겁에 질린 리 일행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미국인인가?(What kind of American?)" 이런 질문은 2기 트럼프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불법) 이민자 추방정책을 연상시킨다. 합법 이민과 불법 이민을 어떻게 나누고 불법 이민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쉽지 않은 문제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이민자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을 근본에서 무너뜨리는 태도가 지닌 위험성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 정부군은 자신들이 설정한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진정한 미국인"(true American)의 기준을 내세우며, 거기에 속하지 않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설정된 언론인들을 죽인다. 내전으로 인해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 차별이 극단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통합된 미국이 무너진 것이다.

혼란한 상황에서 언론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의 한 장면.(주)마인드마크

<시빌 워>의 주인공이 언론인이라는 것은 내전이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 언론은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는 혼란과 내전 속에서 언론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론의 역할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권력과 진실의 갈등 속에서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관객이 고민하게 만든다. 내전 같은 참담한 상황의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기자에게는 기록하는 것이 곧 행동이며,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양비론이나 기계적 중립을 언론이 지켜야 할 가치라고 착각하는 언론인이 적지 않은 한국 사회에도 울림이 있다. <시빌 워>의 기자들은 처음에는 내전 상황에서 어느 쪽을 편드는 태도를 정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내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리는 제시에게 기자의 역할에 대해 "우린 묻지 않고 기록하지. 다른 사람들이 묻도록"이라고 말한다. 언론이 직접적인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객관적인 기록자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던 영화 속 기자들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점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결국에는 분리동맹 군대와 함께 백악관으로 가게 되는데, 이런 구도는 이들이 독재와의 싸움에서 더는 중립의 위치를 지킬 수 없으며, 독재와 저항 사이에서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기계적 중립이나 양비론은 듣기에 그럴싸하지만, 민주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명확히 드러난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언론도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섬세하고 신중한 판단은 언론이나 문학계, 문화계에서 꼭 필요한 태도이지만, 그런 섬세함이 민주주의 토대를 무너뜨리거나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방관한다면, 그때 섬세함과 신중함은 미덕에서 악덕으로 바뀐다. 단호할 때는 단호하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쪽에 서는 것이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리, 조엘, 제시가 분리동맹 군인들이 백악관으로 진입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이후의 사태를 대하는 모습은 언론이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서 리와 제시는 백악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상황을 사진으로 찍는다. 리는 제시에게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런 모습은 연방 정부의 독재와 반군 세력의 실태를 기록하는 것이며, 언론이 진실을 알리는 것이 곧 권력과의 충돌을 의미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에는 내전이 전개되면서 더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저들을 죽여야 한다는 전투 상황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그렇게 내전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짐승으로 변모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통쾌할 수도, 불쾌할 수도 있는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은 언론이 단순한 중계자가 아니라 역사적 순간을 기록과 이미지로 남기는, 남겨야 하는 존재라는 걸 표나게 강조한다. 조엘은 대통령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리고 그 말을 기록한다. 제시는 그 장면을 찍는다. 언론인의 역할은 기록할 것을 정확히 기록하고, 찍어야 할 것을 정확히 이미지로 담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글과 말로 먹고사는 언론인과 지식인은 혼란의 시대에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빌 워>는 그런 질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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