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5 06:57최종 업데이트 25.03.0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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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태당 샤를 푸르니에 의원 샤를 푸르니에 페이스북

3년간의 팬데믹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을 장기 침체의 늪으로 끌고 갔다.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며 에너지 공급원이던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재정을 지원하는 동안 프랑스 국내 물가는 폭등했다. 시민들의 고통은 커져만 갔다.

지난 20일 프랑스 국회에서 첫 논의가 시작된 <음식 사회 보장제(Sécurité Sociale Alimentation)> 법안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치권이 내놓은 대안이다.


1945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드골 임시정부는 최우선 과제로 사회보장제도 구축을 제시하고 우직하게 실천해 갔다. 이처럼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진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건강한 음식을 섭취할 권리를 시민 누구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게 법안이 담고 있는 핵심 생각이다. 동시에 지역 농산물이 집중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구조를 통해 농축산 업계와 지역 소규모 상인들도 경제적 활력을 누리고, 건강한 식생활을 통해 국민 건강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것까지를 목표로 삼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업체 칸타(Kantar)가 진행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시장이나 전문 매장에서 신선한 야채, 과일, 생선, 육류 등 가공되지 않은 재료들을 직접 구입하는 구매자의 50%는 60대 이상의 세대다. 이 세대는 그들이 어릴 적부터 배워온 대로, 싱싱한 식재료를 시장에서 구입하여 직접 조리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젊은 층일수록 날 것의 식재료를 이용해 조리하거나, 영양을 생각하며 좋은 식재료를 고를 수 있는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어, 간단한 가공식품으로 배를 채우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습관이 청년 세대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음식보건카드'의 필요성

현재 프랑스의 44개 지자체에서 발급 사용되고 있는 음식보건카드 Carte Vitale AlimentationSSA 홈페이지

이 제도의 핵심은 '음식보건카드'에 집약되어 있다. 전국민이 지니고 있는 건강보험카드(carte vitale)를 통해 각자 소득에 따른 분담금을 내고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음식보건카드(carte vitale alimentation)도 전국민에게 배포된다. 그 카드에 매달 150유로(약 22만 5000원)의 지원금을 적립, 이 돈으로 지자체와 계약을 맺은 생협· 시장·식료품점 등에서 신선한 지역 농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는 설계되어 있다.

전 국민이 받게 되는 식료품 지원비는 150유로로 동일하지만, 분담금은 각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르게 설계된다. 이 점도 건강보험 제도와 같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전 국민이 건강한 음식들을 주식으로 삼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국민건강보험에 투여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까지 제도 설계 속에 담겨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 제도의 채택은 정부와 국회에서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이미 2~3년 전부터 보르도, 낭트, 스트라스부르그, 파리의 일부 구 등 44개 지자체에서 시험 가동에 들어갔다. 지자체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음식보건카드의 디자인은 건강보험카드와 거의 유사하다. 이미 70년의 역사를 가진 건강보험제도의 연장선에서 '건강한 식품에 대한 권리'를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카드의 명칭과 디자인을 비슷하게 고안한 것이다.

현재 지자체에서 시험 가동 중인 제도는, 국비가 투여되지 않은 예산상의 한계로, 저소득층에 한하여 시행되고 있으나,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된 법안은 최저 10유로의 분담금을 내는 것을 전제로 전 국민에게 동일한 금액을 향후 5년간 지급하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주제를 오랫동안 추적해 온 언론인이자 <잘 먹는 것이 사치가 될 때>의 저자이기도 한 벤자민 세즈는 "살림이 빠듯할 때, 사람들은 집세와 공과금을 먼저 내고, 난방비와 식비는 절약하게 마련입니다. 음식에 있어선 필요한 영양소나 기호가 아니라 건강에 좋지 않은 값싼 고칼로리 음식 위주로 구입하게 되죠"라면서, 이 제도가 경제적 이유로 사람들이 포기해 온 식사의 질적 측면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설계된 것임을 강조한다.

시민사회가 씨뿌린 식량사회보장제

국가적 차원의 정책으론 지난 2월 20일 사회생태당 의원 샤를 푸르니에가 대표 발의하였으나, 생각의 씨앗은 시민사회단체에서 나왔다.

농업, 음식, 환경, 대중 교육 분야의 시민사회단체가 식량사회보장제(SSA : Sécurité Sociale Alimentation)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모였던 것이 2019년이다. 이들은 1945년 암브루아즈 크루아자가 제안한 사회보장제도의 원칙을 음식과 농업 분야로 확장하여 건강한 식생활 시스템의 민주적 조직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바로 이들이 원동력이 되어 파리, 보르도, 몽펠리에 등 지자체들에서의 식량사회보장제 시도가 가능케 했다. 현재 프랑스 뿐 아니라 이웃의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까지 사회 운동의 범위가 확산되어 있다.

암브루아즈 크루아자(Ambroise Croizat, 1901-1951)
프랑스의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 노조활동가. 13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소년 노동자로 성장한 그는 36세에 프랑스노동총연맹(CGT)의 금속노조 위원장.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드골 임시정부 하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사회보장제도를 프랑스에 정착시킨 사회보장제도의 아버지로 불린다. 1945년 장관으로 임명된 후 가진 첫 연설에서 "우리는 고통과 모멸감, 배제를 종식시켜야 한다. 은퇴를 더 이상 죽음의 전초전이 아닌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만들겠다"라고 밝히며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들은 계층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에 널리 확산된 만성 질환과 생식 장애(당뇨, 암, 고혈압, 생식력 감소, 불안, 우울증 등 심리 장애) 등이 대규모 공장식 생산과 대형 유통 구조, 글로벌화로 대변되는 식품 공급 구조에 있다고 본다. 이는 국민 건강을 파괴할 뿐 아니라, 기후 변화, 토양의 질 악화, 생물 다양성 붕괴, 그리고 지역 농민들의 생존 기반 위협 등 광범위한 범위에서 현대인의 삶에 악영향을 미친다. 환경을 해치지 않는 유기농업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이 단체는 현재 12개의 다양한 분야의 전국 단위 시민 단체들이 가입된 공동체가 되었으며, 20일 발의된 법안의 근간을 제공했다.

프랑스-독일 공영방송 ARTE에서 2월 25일 방영한 음식사회보장제도 소개 방송ARTE 동영상 캡쳐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식량 보조금인가?"

많은 언론이 던진 이 질문에 샤를 푸르니에 의원은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 법안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식사를 할 우리의 존엄한 권리를 사람들이 인식하고 되찾는 게 하는 데 있다. 음식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공짜로 먹을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충분히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건강한 음식을 섭취할 권리를 의미한다."

이날 시간 부족으로, 법안에 대해 발표할 시간만 있었을 뿐 논의와 표결은 다음으로 미뤄졌으나, 맥락을 같이 하는 두 가지 법안이 같은 날 통과되었다는 사실에서 샤를 푸르니에 의원은 매우 고무적이고, 낙관적이라고 밝힌다.

첫 번째는 화장품, 의류, 신발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영구 오염 물질 과불화 화합물(PFAS)이 2026년부터 사용 금지되는 법안이 최종 채택(찬성 213, 반대 51, 기권 7)된 것이다. 방수, 방염, 얼룩 방지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 화학 물질은 생식능력 장애, 갑상샘 질환,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는, 자산 규모 1억 유로를 초과하는 슈퍼리치(약1800명)들의 재산에 대해 최소 2%의 세금을 부과하는 일명 주크만법이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이 법안은, 찬성 116 반대 39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다. 상원에서도 해당 법이 통과된다면 정부는 최소 250억 유로를 세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연대의 정신을 바탕로 온국민의 건강도 개선하고, 농민들과 도시 소상공인들도 살리며, 환경을 되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이것(식량사회보장제)"이라고 샤를 푸르니에 의원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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