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재료를 잘 썰어 넣고 육수만 부어 끓이면 완성되는 전골. 틈날 때마다 끓여 먹는다. 좌측 위로 부터 시계방향으로 버섯, 홍가리비, 굴 시금치, 낙지 미더덕 전골
여운규
한 달 전쯤, 눈이 제법 내렸다. 눈은 내리기 시작할 때 조금 예쁘고 멋지지만, 시간이 지나 바닥에 쌓인 눈은 (우리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대개 그러하듯)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로 변한다. 나처럼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사람은 눈이 오면 걱정을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내가 겪는 고생에 비하면 나의 퇴근길 정체는 걱정 축에도 끼지 않는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아내는 눈이 올 때마다 그야말로 근심이 가득하다. 차를 몰고 한참 가야 하는 길도 위험하지만, 외진 곳에 위치한 직장의 특성상 눈 내리는 날이면 전 직원이 나서서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가 회사에서 눈 치운 얘기를 듣노라면 군대가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날은 눈 치우다가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한동안 고생한 적도 있다.
그날도 눈이 많이 왔다. 아하, 이 사람 또 눈 치우겠구나. 나는 쓴 입맛을 다시며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분명히 추위에 떨고 잔뜩 지쳐 퇴근할 텐데. 어떻게 한다? 그럴 때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바로 뜨끈한 전골을 끓여 먹는 거다. 그래. 추운 날은 뜨거운 국물이 최고다. 전골을 끓여 먹자.
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냉장고에 있을법한 전골 재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디 보자. 얼마 전 사 둔 어묵이 있었지. 딸이 일본 여행 가서 사 온 네모난 유부도 생각났다. 마침 계란도 몇 개 삶아뒀겠다. 어묵전골을 끓이면 되겠네.
전골, 찌개, 국, 탕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물을 참 좋아한다. 제대로 된 한 상 차림에는 반드시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한다. 밥상에 앉자마자 우선 국물부터 한 숟갈 떠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일러 '술적심'이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밥이 들어가기 전에 숟가락도 촉촉하게 적시고, 아울러 뱃속에도 밥 들어가니 준비하라고 알리는 일종의 워밍업이다. 내가 알던 어떤 어른은 매 끼니 국 한 그릇과 찌개 한 냄비가 동시에 갖춰지지 않으면 밥상에 손도 대지 않으셨다. 사모님께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모른다.
우리 민족이 국물 음식을 일컫는 단어도 정말 다양하다. 국과 찌개가 다르고, 찌개와 전골이 다르다. '탕(湯)'은 국을 높이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는데, 수라상에 오르는 국은 또 '갱(羹)'이라고 불렀다. 찌개는 다른 말로 '조치'라 하기도 했다니 이쯤 되면 우리가 국물을 대하는 감각이란 눈과 얼음을 그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한다는 이누이트족의 그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수십 년 살아온 경험과 몇 가지 주워들은 얘기, 기타 그 밖의 것들을 조합하여 정의를 내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건더기가 상대적으로 적고 물이 흥건하면 국이고, 반대로 국물을 진하고 바특하게 건더기 위주로 끓이면 찌개다.
찌개와 전골이 어떻게 다른가엔 다양한 견해가 난무한다. 건더기의 크기와 양, 또는 국물을 부어가며 끓이는지 여부에 따라 나누는 사람도 있고, 담아내는 그릇의 모양과 크기로 분간하기도 한다. '전골'이라는 말의 어원이 옛날 군인들이 쓰던 전립 모양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언젠가 소셜미디어(SNS) 친구들에게 찌개와 전골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대답이 다음과 같았다. "뚝배기에 담기면 찌개, 그렇지 않으면 전골", "뒤에 백반이란 단어가 착 붙느냐의 여부가 중요하죠", "밥과 어울리면 찌개, 술하고 어울리면 전골 아닐까요", "낮에 먹으면 찌개, 밤에 먹으면 전골", "라면 사리가 들어가면 찌개고 우동 사리가 들어가면 전골이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내 생각에 두 음식의 가장 큰 차이는 조리 방법에 있다. 찌개는 미리 끓여 나오고 전골은 상 위에서 끓여가며 먹는 음식이란 거다. 요식업계의 분류도 대충 그러하다고 알고 있다. 사실 친구들도 대부분 "가스렌지와 함께 나오면 전골"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부대찌개는 손님상에서 끓여 먹는 게 대부분이니까. 여튼 중요한 건 이거다. 나는 미리 끓여 나온 찌개보다 끓이면서 먹는 전골을 더 좋아한다. 전골은 전골만의 미덕이 있다.
전골의 미덕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전골은 국보다 더 자유로운 음식이다.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역국을 끓인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미역국도 다양한 재료로 끓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많은 재료를 이것저것 넣을 수는 없다. 미역국이니까 당연히 미역이 주재료다. 그리고 맛을 더해주는 부재료는 소고기면 소고기, 홍합이면 홍합, 한 가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겠다고 소고기 미역국에 콩나물을 넣을 수는 없는 거다.
반면 전골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재료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버섯전골은 버섯과 함께 두부, 고기, 각종 채소를 내키는 대로 넣으면 된다. 콩나물? 왜 안 되나. 심지어 여기에 미역을 조금 넣어도 된다. 그러다 다른 재료가 더 많아지거나 두드러지면 어떻게 하냐고? 그럴 땐 음식 이름을 바꾸면 된다.
전골의 자유로움은 조리 과정에서도 두드러진다. 냉장고에 잠자고 있는 고기며 채소들을 씻고 썰어서 냄비에 적당히 담고 따로 마련한 육수를 부은 다음 버너에 올리는 것까지가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다들 둘러앉아 가스불을 켜는 순간 조리가 시작되는데, 그다음 과정은 먹는 사람들이 하기에 달려 있다.
먼저 익은 재료부터 건져 먹을 수도 있고, 맛있는 건 추가할 수도 있다. 먹다가 국물이 모자라면 육수를 더 부으면 된다. 그뿐인가. 남은 국물에 면이나 밥을 넣어 다시 끓이면 전골은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다 같이 만들어 먹는 전골이다. 그러니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골이 참 쉽고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골의 가장 큰 미덕은 식구들의 마음을 한 데 합쳐주는 효과가 있다는 거다. 불은 사람을 모은다고 하지 않는가. 피어오르는 불을 둘러싸고 음식을 나누는 광경은 생각만으로 따뜻하다. 그렇다 해도 모닥불 피워 음식을 해 먹는 일은 원래 야외에서나 가능할 것인데, 식탁 위에 피어나는 불이라니. 생각해 보면 이게 참 신비하기도 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 집중하다 보면 가족들도 어느새 한마음이 되고, 이런저런 얘기 꽃도 함께 피어나기 마련이다. 하긴 고기를 구울 때도 마찬가지다. 식탁 위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 K 바비큐가 요즘 외국에서도 인기라지 않은가.
마음을 데워주는 전골
▲눈 오는 날 끓여 먹은 어묵전골. 정작 어묵은 밑에 깔려 안 보이지만 하여간 주재료는 어묵이었다.
여운규
퇴근하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있는 대로 꺼냈다.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로 육수를 내는 동안 살짝 데쳐낸 어묵과 버섯, 유부, 청경채 등을 썰어 냄비에 담고 있는데 예상대로 잔뜩 지친 모습의 아내가 들어왔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스버너에 불을 켜고 아이들을 불렀다. 밥 푸고 접시랑 수저 놓는 건 아이들 몫이다. 이내 끓기 시작한 전골냄비. 한 숟갈 뜨는 아내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돈다. 와,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한 마디에 내 마음도 녹는다.
아이들도 잘 먹는다. 이미 성인이 된 녀석들이라 더 이상 살가운 구석이라곤 없지만, 부모가 음식을 거둬 먹이는 순간만큼은 아직도 내 새끼들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둥지를 떠나 저마다의 세상으로 나갈 아이들이지만, 어느 눈 오던 날 밤 식탁에 조그만 불을 피워 놓고 나누던 한 냄비의 전골과, 그렇게 주고받던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몇 자락과, 자기도 한몫 끼고 싶어 무릎 위에서 낑낑대던 하얀 강아지 한 마리에 대한 기억을 부디 잘 간직해 주면 좋겠다. 그렇게 사소한 추억들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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