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진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가 열린 국회 당대표회의실에 나란히 걸려 있다. 2022.10.07.
남소연
민주당은 지주세력이 집결해서 만든 정당이니 출발점에서는 보수정당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와 투쟁하면서 진보적 색채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당 계열의 진보적 색채는 좀 더 강화되었다. 두 정권에서는 기초생활보장제도, 국민임대주택, 근로장려세제, 종합부동산세, 지역균형 발전 정책 등 의미 있는 진보적 정책이 실행되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정권의 새정치국민회의와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을 중도진보 정당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당 강령에서도 드러나고, 대통령과 주요 정치인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당시 여당의 당 강령을 보면 진보적 내용이라 할 만한 것은 기껏해야 '공정한 시장경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새정치국민회의),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는 시장경제 질서', '저소득층에 대한 완전한 기초생활 보장'(열린우리당)을 추구한다는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당은 중도우파 정당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기 때문에 우파이고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중도다"라고 강조한 것은 정치적 목적의 페이크(fake)가 아니었던 셈이다. 두 정권에서 여러 중책을 맡았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도 민주당이 중도우파 정도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참여정부를 "진보를 지향하는 정부"라고 규정했고 대통령 퇴임 후에도 진보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고민하고 연구했으니 중도진보 성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나 그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진보적 색채가 뚜렷하지 않았다(이 간극을 깊이 인식하고 노 대통령의 진보적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여 출범한 정당이 유시민, 천호선 등이 주도해서 만든 국민참여당이다).
당 강령에서 진보적 색채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는 민주통합당 시절(2011~2013년)이었다. 민주통합당은 2011년 12월 민주당, 시민통합당, 한국노총이 참여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민주통합당의 당 강령에는 재벌개혁,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 근절, 성장지상주의와 토건 중심 불균형 성장 배격,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차별 철폐, 보편적 복지 지향 등 진보적 가치가 대거 담겼다. 민주통합당은 명백히 중도진보 정당이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의 진보화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재벌·부동산부자 위주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인 데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의 진보적 색채는 당이 안철수의 새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새정치민주연합(2014~2015년)으로 바뀌면서 다시 퇴색했다. 새로운 당 강령에는 기존의 불로소득 근절, 성장지상주의 배격,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차별 철폐 등 진보적 내용이 빠지는 대신에, 산업화 시대 압축성장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혁신적 시장경제'를 추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 주도의 양적 성장이라는 낡은 방식을 벗어난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방지한다'며 보수적 색채를 분명히 하기도 했다. 서민을 보호하고 중산층을 튼튼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지만,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말은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의 당 강령(2024년 8월 개정된 강령)은 어떨까.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는 말이 되살아났고,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기본사회를 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편중된 토지보유와 지대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보아 예전 새정치민주연합보다 진보적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통합당 시절 담았던 재벌개혁, 불로소득 근절, 성장지상주의 배격 등의 내용이 크게 완화되거나 아예 빠졌다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약한 중도진보 정당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요컨대 당 강령을 중심으로 볼 때, 민주당 계열의 정당은 보수정당에서 출발하여 중도보수 정당 → 중도진보 정당 → 보수색 짙은 중도보수 정당 → 약한 중도진보 정당으로 변신해 왔다. 긴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진보와 보수의 배합비율을 변화시켜 온 셈이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출발 당시와 새정치민주연합 시기를 제외하면 민주당은 중도정당, 즉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부터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을 주창하면서 진보 인사의 면모를 강하게 부각했기 때문에, 그의 이번 발언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당 강령으로 볼 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반면, 김부겸·임종석·이인영·김두관 등의 인사들이 민주당은 진보정당이라는 이유로 이재명 대표의 발언을 비판한 것은 틀렸다. 민주당은 중도보수와 중도진보를 오락가락한 정당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시대 상황에 따라 진보의 가치가 더 필요한 때도 있고, 보수의 가치가 더 필요한 때도 있었으니 민주당이 중도보수와 중도진보 사이를 왔다 갔다 한 것을 두고 나무랄 수는 없다.
개혁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의 협력을 주창한 고 김기원 교수

▲고 김기원 교수
오마이뉴스 남소연
생전에 한국의 대표적 진보학자로 인정받았던 고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 외에 개혁과 수구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수 상황을 반영하는 평화협력과 긴장대결의 구분도 필요하다고 했으나 여기서 그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을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을 높이는 것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을 높이는 것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뜻한다.
진보-보수라는 축과 개혁-수구라는 축을 기준으로 정치세력을 구분하면, 개혁적 진보, 수구적 진보, 개혁적 보수, 수구적 보수 네 가지가 나온다. 김 교수는 지나치게 우경화되어 있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정한 정도로 사회를 진보 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수구를 타파하고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별세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김 교수가 제시한 과제는 정확한 현실 인식과 논리정연한 이론에 입각해 도출한 것이어서 누구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대표의 개혁적 보수 노선, 어떻게 봐야 할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행복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반도체특별법 노동시간법 적용제외 어떻게?'라는 주제로 열린 정책 디베이트를 주재하고 있다.
남소연
김기원 교수의 견해에 비추어 이재명 대표의 발언과 정책 행보를 평가해 보자. 민주당은 중도보수 정당이라고 한 발언은 일부 맞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발언과 그의 정책 행보를 연결해서 보면, 이재명 대표의 생각은 사회를 진보 쪽으로 이동시키기는커녕 거꾸로 보수적 색채를 강화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하고 노동자·농민·자영업자·중소기업가의 지위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친화적 정책과 감세 정책으로 '먹사니즘'과 '잘사니즘'을 실현하려고 하고 있으니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정책 내용으로만 보면 오랜 세월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성장만능주의·시장만능주의의 재판(再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재명 대표의 발언이 단지 정치적 언술에 불과하다면 모르겠지만, 집권 후 새 정부 정책의 기본 방향을 지금 말하는 대로 잡는다면 과연 성공한 정부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재명 대표와 현재의 민주당이 개혁 세력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개혁적 보수'의 노선만으로 심각한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는 한국의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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