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이정민
민주주의가 자만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정치적 효능감이 높아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하려면 민주적 경쟁이 내용을 갖춰야 한다.
정치란 국가가 당면하거나 미래에 준비해야 할 주요한 일에 대해, 문제 해결의 비전과 방식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 간에 일어나는 경쟁과 협력이다.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직면한 공동체에서 갈등의 표출이 폭력적인 수준으로 격화되는 것을 막고, 최대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어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정치의 역할이란 단순히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 토론, 숙의, 조정, 합의 등 많은 민주적 조건과 수단들이 제도와 행위에 안정적으로 구축되고 관례로 자리잡아야 한다.
민주주의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협력할수록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높다. 이런 정치가 잘 이루어지려면 좋은 제도가 있어야 하고, 그 제도들을 잘 운영할 줄 아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필요조건이지 실질적 충분조건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도 혹은 민주주의에서 더욱 정치는 타락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하게 된다. 운이 나쁘면 공동체의 소멸을 막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러하다.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은 책 <정치를 옹호함>에서 정치의 가장 선결 조건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은 다음에 정치가 하는 일은 '조정(conciliation)'이다. 이때의 조정은 "말로 달래어 설득하고 회유하고 타협하는 모든 과정"을 말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정치가 이러한 역할을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다가올 문제들에 대비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다원적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이자 "정부에 대한 공적인 이의 신청과 광범위한 정치 참여가 다 같이 가능한 정치 체제"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이 '폴리아키'라고 부른 체제의 비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서 이러한 유형의 정치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다수결 민주주의와 다수의 폭정이 가진 한계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참여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참여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든지 타인의 발언권을 제약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적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동등한 투표권(equal voting)이라면, 그에 앞서 존재해야 하는 토론과 숙의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동등한 발언권(equal saying)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인들이 적수(adversary)와 적(enemy)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적수는 꺾고 싶은 상대이며, 적은 말살해야 할 상대다. 정치를 적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적과의 대립 관계로 보면 민주정치는 작동하지 않는다."(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다양성과 토론이 빠진 투표는 아무리 많은 동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민주적일 수 없다. 인민의 의견을 지도자가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의 체제는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어렵다. 우리는 이미 여론조사에 따른 다수결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정치의 한계를 지난 몇 년간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다. 다양성에 기반을 둔 정치를 복원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탄핵과 대선을 거치더라도 또다시 새로운 위기, 지속적 위기에 처할 것이다.
민주 헌정이 다른 형태의 체제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다수결의 원칙을 지킨다는 데에 있지 않다. 게다가 다수결에 의한다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표결에서나 선거에서나 표의 계산보다 중요한 것은 최종 투표에 앞서서 어느 정도의 토론과 상호 이해의 노력을 거쳤느냐는 문제다.
정치의 복원을 어렵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정치혐오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만이다. 그것은 어느 쪽에서든 포퓰리즘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주 정치는 양편에서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열기 사이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한 태도와 결연한 의지, 지치지 않은 인내로 지나가야 하는 오솔길과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어두운 숲을 통과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한 번의 계엄은 비극으로, 한 번의 계엄은 희극으로 끝났다. 세 번째 계엄은 포퓰리즘적 방식으로 나타나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 8년 전 탄핵은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이번 탄핵심판의 결과는 아직 미정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선 자리이고, 시대정신을 읽어야 하는 조건이다. 탄핵이나 대선 결과와 별개로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라는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는가가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관후 / 국회입법조사처장
이관후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관후 국회입법조사처장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학부·석사를 마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강대와 경남연구원 등에서 강의와 연구를 했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과 국무총리비서실 소통메시지비서관을 지냈습니다.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다 2024년 11월 역대 최연소로 국회입법조사처장에 임명됐습니다. 공저로 <South Korea' Democracy in Crisis>, 번역한 책으로 <정치를 옹호함> 등이 있고, 최근 <압축소멸사회>를 출간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