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02 11:28최종 업데이트 25.03.0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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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을 심란케 하는 재주를 지닌 독립군이 있었다. 그 재주는 특히 밤만 되면 잘 발현됐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옌볜(연변) 조선족 작가 등으로 알려진 김학철은 일본군이 학을 떼게 만든 항일 선전전의 귀재였다.

본명이 홍성걸인 그는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1만 8162명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군이 진절머리를 내게 만든 항일선전 전문가였다. 그렇게 말할 만한 근거가 있다. 그의 선전전을 근거로 일본 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일이 그것이다.


일본 법무성의 전신인 사법성이 1943년 6월에 발간한 <사상월보> 제103호는 김학철 사건에 관해 "검사는 피고인의 소위(所爲)는 치안유지법 외에 형법 제81조 후단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형을 구형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달 14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는 징역 10년을 선고했지만, 검사의 사형 구형은 일본군이 그만큼 그를 위험시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죄목은 치안유지법 제1조 및 형법 제86조 위반이다. 친일파들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계승된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가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그 일원이 되거나 그런 목적의 수행을 도운 사람을 사형·무기징역이나 3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김학철에게 적용된 일본 형법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적용된 제86조는 '증발'됐다. 일본의 '전자정부 종합창구'(www.e-gov.go.jp)에서 현행 형법 조문을 확인하면 "제83조부터 제86조까지 삭제"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내란죄에 상응하는 외환죄를 처벌하는 제3장의 일부 규정이 일제 패망 뒤인 1947년에 폐지된 결과다.

본문에 인용된 일본 형법전.일본 전자정부 종합창구

위 <사상월보>에 실린 나가사키지방재판소의 판결문은 "적국에 군사상 이익을 준 점은 형법 제86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김학철은 일본제국주의에 세뇌당한 일본 병사들의 머릿속에 전혀 다른 정보를 입력했다. 그래서 일본군의 전투 수행에 지장이 생겼다. 적국에 군사상 이익을 줬다는 말은 그것을 가리킨다.

항일 무대에서 홍보와 선전의 귀재로 활약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3권에 실린 김학철 재판의 예심종결 결정서에 의하면, 그는 3·1운동 3년 전인 1916년 원산에서 출생하고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훗날의 보성고)에 다니다가 병에 걸려 중퇴한 뒤 가업인 광산업을 도우며 요양했다. 그러다가 20세 때인 1936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황푸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가담했다. 그 뒤 항일 무대에서 홍보와 선전의 귀재로 활약했다.

그는 총을 쏘아 일본군을 쓰러트리기보다는 언어를 쏘아 적군 머릿속의 정보체계를 흐트러뜨리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일본군에 부담을 줬다는 점은 검사의 사형 구형과 더불어 재판부의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재판부는 그의 핵심 죄목을 대일 선전전에서 찾았다. 괄호 부분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첨부한 것이다.

"피고인은 이상(의) 목적 수행을 위해서 각 방면에서 장개석 정권의 군대와 협력하여 중국 민중에 대해서는 연극·연설·벽신문 및 전단 등에 의해서 '외국인인 우리들까지도 항일전쟁에 참가하고 있으므로 중국 민중은 자진해서 대일항전에 참가해야 한다'라는 뜻의 선전을 하고 항일의식 앙양 고취에 활약하였으며, 일본군에 대해서는 전단(을 뿌리거나) 또는 호소하고 절규하는 방법으로 '고향집에는 일할 손이 부족해서 곤란하고 어버이와 처자가 기다리고 있는 이 전쟁은 무익하므로 속히 전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뜻의 반전·염전 사항을 선전·고취하여 이상과 같은 방법에 의하여 적국인 중국군에 군사상 이익을 끼쳐주었다."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김학철 전문가인 김해양 전 옌볜공회간부학교 교장이 김호웅 옌볜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과 공저한 <김학철 평전>은 그의 선전전을 자세히 소개한다. 중국대륙 중부인 후베이성의 라오허커우(老河口)에서 전개한 선전전은 일본군이 김학철 때문에 심기가 얼마나 불편했겠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지역에서 적군과 대치한 조선의용대 제2지대부와 김학철 분대장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적진의 턱밑까지 접근해 플래카드를 세워"놓았다. 시간이 지나 날이 어슴푸레해지자, 연이은 총성과 함께 플래카드들이 쓰러졌다.

땅바닥에 넘어진 플래카드들에는 일본어로 적힌 반전 표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횡포한 상관에게 총부리를 돌려대라" 같은 문구도 있었다. 일본군이 한국 독립군이나 중국군이 아닌 헝겊 조각에 발포를 해댔을 정도로 그의 대일 전단은 적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밤, 독립군은 똑같은 장소에 가서 전단을 수거한 뒤 중국군 병사들에게 회람시키고 실적으로 보고했다.

총알구멍이 뻥뻥 뚫린 플래카드들은 일본군의 마음을 교란시켰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일본군의 사기에 영향을 줬으니 실적으로 보고될 만한 것이었다.

김학철은 '대일 확성기 방송'도 활용했다. '야간 대화'라는 선전전이 그것이다. 위 평전은 "야밤을 타서 적진 150미터쯤까지 접근하면 우선 징 소리 대신 수류탄 한 발을 터뜨려 개막을 알린다"라며 "고요한 적막이 뒤덮인 끝없는 전야에 이 느닷없는 폭발음에 놀라 깨지 않는 놈은 없다"고 한 뒤 야간 대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그런 다음, 프롤로그로 일본 여자 이무라 요시코(당시 스물한 살인 포로)가 고운 목소리로 <황성의 달> 따위의 일본 노래를 부른다. 적군의 살벌한 마음을 녹이기 위한 수단이다. 연후에 반전을 종용하는 강화(講話) 즉 정치 선동, 이것을 함화(喊話)공작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것이 주목적이다. 모두 끝나면 에필로그로 밤하늘에 대고 총 몇 방을 쏜다.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뜻인 셈이다."

한밤중에 가냘픈 노래로 주의를 집중시킨 뒤 큰소리로 고함치듯 반전평화 메시지를 전달한 다음에 총성이 울려퍼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대화'로 불렀다. 일본 병사들은 이 상황을 귀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 단막극 형식의 선전전을 기획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군에 미친 영향이 상당하지 않았다면 일본 검사가 사형까지 구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으로 되돌아가 작가의 길

그는 기획력뿐 아니라 담대함도 갖췄다. 평전에 따르면, 적군 인근에서 자신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또 부대를 이끌고 적진 앞에서 어이없는 행동도 벌였다.

25세 때인 1941년 12월 10일 밤중에는 일본군 진지 코앞에서 "방자무기(放恣無忌)"한 모습을 연출했다. 건방지고 거리낌 없는 모습을 일본군에게 과시했던 것이다. 평전은 "조선의용군 대원들의 행동이 보루 속에 가만히들 엎드려 있는 일본군의 비위를 크게 거슬러놓았다"고 기술한다.

이렇게 일본군을 농락하며 반전 캠페인을 벌인 김학철은 이틀 뒤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이듬해 5월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총상을 입은 다리의 상태가 심각했지만 전향서를 쓰지 않아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때부터 한쪽 다리만 쓰는 사람이 됐다.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 9일 석방돼 서울로 간 그는 1946년 11월 월북했다. 4년 뒤 좀 더 위쪽으로 '월북'했다. 한국전쟁(6·25전쟁) 발발 4개월 뒤인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었다. 참전(10.14)한 중국군이 남하하는 그달에 그는 중국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미군정과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일성과 박헌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사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그가 '박헌영 만세' 소리에도 분개했고, 인명에 대한 김일성의 경시 태도에도 실망했다고 말한다.

중국으로 되돌아가 작가의 길을 걷던 그는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때 핍박을 받아 1967년부터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0년에 64세 나이로 복권된 뒤 한중 양국을 무대로 문학 활동을 하다가 2001년 9월 25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몸은 가루가 되어 두만강에 뿌려졌고, 그 일부는 우편함에 담겨 한국해에 띄워졌다. 바닷물에 뜬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행(行)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이라고 적혔다고 위 평전은 말한다.

2001년 6월 3일 경남 밀양을 방문한 '항일 독립군 마지막분대장'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여사의 묘를 찾아 묵념하고 있다.오른쪽부터 김학철, 박여사의 조카, 김원봉의 여동생.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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