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1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커피 한잔에 가을 한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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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1996년 11월 13일 자 전면 기사 '커피 한잔에 가을 한 스푼'에서 손님이 왔을 때 커피를 직접 만들어 '이국의 향'을 즐기라고 권했다. 손님 접대를 집에서 하는 문화가 남아 있던 시절, 손님이 찾아왔을 때 품위 있게 대접하는 법의 하나가 특별한 커피를 내놓는 것이었다.
이 기사에서는 강하게 볶은 원두와 계피가루를 섞어 내린 에스프레소에 우유 거품과 휘핑크림은 얹어 만드는 카푸치노, 유리잔에 위스키를 부어 불을 붙인 뒤, 불을 끄고 초콜릿 시럽과 설탕, 에스프레소, 휘핑크림을 넣어 만드는 아이리시커피를 소개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존재 자체를 모르던 식음료 재료들 이름이 많다.
이 외에도 비엔나커피, 카페오레, 그리고 카페로열 레시피가 실렸다. 1990년대 중반에 유행했던 '카페로열'은 나폴레옹이 즐겼다는 풍문과 함께 고급 호텔이나 커피전문점에서 '작은 방종'을 뽐내기에 적합한 커피였다. 커피를 담은 잔 위에 별도로 제조한 스푼을 걸치고, 각설탕을 스푼 위에 올린 후 브랜디를 부은 다음에 불을 붙여서 설탕을 녹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브랜디와 함께 녹은 설탕을 커피에 붓는 것이다. 보는 재미가 있는 커피였다.
<조선일보>는 1996년 10월 10일 자에서 당시 유행하던 '향커피'를 크게 소개했다. 헤이즐넛, 에메랄드아이리시, 프렌치바닐라 등은 커피에 무엇인가를 가미한 '향커피'였고,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하와이 코나, 케냐 AA, 스칸디나비얀브랜드는 그 자체의 향이 진해서 향커피에 못지않은 고급 커피로 소개되었다.
<조선일보>는 1996년 8월 31일 자에서 몇 곳의 신상 카페를 소개했다. '작은 방종'의 중심지 서울 강남 신사동과 청담동에서 커피 한잔에 5천 원 내지는 1만 원을 받는 업소들이었다. 일반 카페의 두세 배 가격이었다. 해외에서 직접 들여온 생두를 그날그날 볶고, 갈아서 내놓는 커피바 '하루에'와 '팔라디오'였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아무 커피나 먹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방종을 자유라고 부르짖는
커피 메뉴 소개와 함께 나라별 커피의 특징이나 커피문화 소개로 해외여행을 부추기는 기사도 넘쳐났다. 서울올림픽 이듬해에 시작된 '해외여행' 자유화, 그리고 1년 전에 달성한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부른 해외여행 붐에 편승한 기사들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커피의 부상(<동아일보>, 1월 15일), 케냐 커피 맛의 비결(<조선일보> 1월 30일), 커피로 점치는 터키인들(<조선일보>, 2월 29일), 지구촌 카페 여행(<매일경제>, 3월 13일), 커피 생산국 에티오피아(<매일경제>, 3월 22일), 커피하우스의 나라 오스트리아(<조선일보>, 4월 18일), 커피 한잔에 토론 한 마당 프랑스(<한겨레>, 7월 4일) 등이었다. 2월 어느 날 EBS는 터키 커피를 소개했고, 5월에 KBS는 예멘 커피를 다뤘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넘치는 사회가 되었다. '작은 방종'이 아니라 '큰 방종'을 자유나 권리라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일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고 기가 차다.
1996년 12월 16일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항소심에서 내란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방종을 일삼은 전두환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게 시종 전두환의 뒤를 따라 영화를 누렸던"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에서 17년으로 감형이 선고되었다. 이들의 감형에는 6.29선언으로 7년여 만에 내란을 종식시킨 공이 참작되었다.
방종을 일삼던 내란범들에게 천수의 길을 열어주고, '작은 방종'을 뽐내던 대한민국은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97년 12월 대선에 출마한 여야 후보 3명은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된 김대중은 공약을 지켰다.
방종을 자유라고 부르짖는 무식한 인간들이 넘치는 요즘, 과연 내란범들의 운명은, 일 년 후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커피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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