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고 있다. 박영선 화백 그림.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그는 1909년에 어이없는 일을 당한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는 일이 일어난다. 위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1909년 10월 31일 오전 6시 안중근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서울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알려준다. 안중근 의거 닷새 뒤에 안중근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붙들렸다. 11월 27일 공판 때 안중근은 "김명준은 알고 있으나 서로 의견을 교환한 일은 없다"고 진술했다. 이에 힘입어 1910년 2월 19일 김명준은 석방됐다.
1907년 봄에 서울에서 안중근과 인사를 나눈 일로 인해 그런 고초를 겪은 김명준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 뒤에는 오성학교 이사, 중앙학회 부회장,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중등) 교원장려위원을 지냈다. 안중근 의거 이전과 비교할 때, 그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잠잠해졌다.
그랬던 김명준이 갑자기 활력을 띤 것은 1919년 3·1운동 때부터다. 49세 때인 이 해부터 그의 정치적 목소리가 높아졌다. 총독부 기관지인 그해 4월 19일 자 <매일신보>는 일본군 투입으로도 시위가 종식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김명준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면서 "(김명준 등이) 30여 명의 유력자 연명으로 전도(全道)에 경고문을 반포하는 동시에 총독부에도 건의서를 제출한다더라"라고 전했다. 이 부분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은 "3·1운동의 진정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배포했다"고 기술한다.
3·1운동을 계기로 친일 무대의 전면에 선 그는 한국과 일본이 하나 되게 해달라는 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그가 친일진영의 지도자로 부각되는 원동력이 됐다. 1920년에 당시의 대표적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총무가 된 그는 1922년에는 이 단체의 회장이 됐다. 이 지위는 1930년까지 유지됐다.
그는 1921년에는 국회의원급인 중추원 참의가 됐다. 이 직책은 1945년 6월까지 이어졌다. 1928년에는 히로히토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고, 1935년에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제국의회 상원인 귀족원의 의원이 됐다. 이 외에도 그의 친일 직책은 허다하다.
그런 인생 경로에서 확인되듯이,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잠잠해졌던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정치적 활력을 띠었다. 한국과 일본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운동을 벌여 일제 지배자들의 주목을 받고 국민협회 회장, 중추원 참의, 제국의회 의원 등의 지위를 얻었다.
3·1운동을 방해한 일은 그에게 수지맞는 장사였다. 이는 그의 생활 문제도 일거에 해결했다. 그는 1921년부터 해방 때까지 중추원 의원 월급을 받으면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동족의 해방투쟁을 훼방한 대가로 일제강점기의 나머지 26년간을 그는 편안히 보냈다.
이 땅에 죄악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는 아무런 처벌도 없었다. 정부수립 직후의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가 그를 소환했다는 기록도 없다. 3·1운동을 방해한 김명준 같은 인물이 세상의 단죄를 제대로 받았다면, 한국인들이 세상을 바꾸고자 일어설 때마다 제2, 제3의 김명준이 계속 등장해 분탕질하는 일이 되풀이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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