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8 10:11최종 업데이트 25.03.0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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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권기는 한국전쟁(6·25전쟁)과 함께 연상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안보 위협이 오로지 북한발이었던 것은 아니다. 상당 부분은 동남쪽에서도 기원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하에 일본이 재무장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의 대일 공포심은 반일이냐 친일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안보문제였다. 그는 그 현실에 주목했다.

1870년대부터 80년 가까이 세계적 규모의 침략전쟁을 벌이다가 패망한 국가가 불과 몇 년 만에 재무장하게 됐다. 그것도 사과와 반성 없이 그렇게 하게 됐다. 그러니 그의 안보 불안감은 절대 과하지 않았다.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을 닷새 앞둔 1951년 9월 3일, 그는 기자회견에 나섰다. 이틀 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이 재기되는 데 있어서 대위험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 조약은 "장래의 일본 재무장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지 못하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별 제약 없이 재기하고 재무장하면 한반도가 직접적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에서 확인되는 1952년 연설문 중에 '한일회담에 대하여'가 있다. 이 연설문에서 그는 "우리 동양의 강한 리웃 중에 한인(韓人)들이 가장 고려할 바는 일본"이라고 한 뒤 "미국이 재무장을 허락한다면 제일 먼저 희생당할 나라는 우리 대한반도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1952년 이승만 연설문 '한일회담에 대하여'대통령기록관

한국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이웃 강대국은 소련이나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했다. 또 미국의 용인하에 일본이 재무장하면 한반도가 1번으로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연설을 한 시점은 한국전쟁(6·25전쟁) 휴전 1년 전이다. 그가 북한에 대한 혐오를 한창 표출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일본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남북한을 한 데 묶어 '대한반도'로 지칭했다.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한반도 내에서 '한일 연합군 대 인민군'의 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꺼렸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발을 디디면 그것이 어떤 상황을 낳을지를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에 미국이 일본 병력을 투입하려 했을 때 자신의 정부가 "만일 일병(日兵)이 얼마든지 우리나라에 하륙(下陸)하면 우리는 반공전쟁을 막론하고 먼저 일병을 싸워서 물니치겟다"고 미국에 경고한 일을 연설문에서 언급했다. 일본군이 개입했다면 한국전쟁이 아니라 한일전쟁이 됐을 것이라는 언명이다.

한미 간에 벌어진 군사 외교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의식해 위와 같이 입장을 표명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군사대국 일본의 위협을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해군력 지원을 미국에 요청한 것이 그것이다.

2023년도 <국제정치논총> 제63집 제2호에 게재된 김명섭 연세대 교수와 이호준 박사수료생의 공동논문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전후 이승만 정부의 해군정책'은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1월과 12월에 이승만 정권이 60척 규모의 함정 지원을 미국에 요청하면서 "공산주의세력의 팽창과 일본의 재무장 위협을 해상에서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표명한 사실을 소개한다. 북한뿐 아니라 일본과도 싸워야 한다며 해군력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뒤에도 동일한 입장을 유지했다. 미국은 이를 경계했다. 한국이 북한을 상대할 정도의 해군력만 갖기를 희망했다. 한국 해군이 일본은 물론이고 소련이나 중국과도 대결해서는 안 된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었다. 군사적 균형이 깨진다는 이유에서였다.

1953년 7월 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정한 방침은 "이 대통령이 정전협정 체결에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해군을 원조하되, 그 규모를 '러시아인들이나 중국인들을 겁주기에 충분하지 않은 정도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고 위 논문은 알려준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의 망상을 접고 한국전쟁을 끝내는 데 동의하면 북한을 상대할 정도의 해군력만 지원하고, 그 이상의 해군력은 갖지 않게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한국 해군이 북서쪽, 그중에서도 북한만 방어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동남쪽으로는 함포를 겨눌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위 논문은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국제 공산세력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지상군을 보유한 상태에서 추가로 대규모 해군을 보유할 경우 이를 북서쪽의 위협이나 남동쪽의 위협에 대응해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한 뒤 1953년 연말의 이런 장면을 소개한다.

"12월 2일 덜레스 국무장관은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만일 한국이 일본과 싸우기 위해 해군을 운용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몇 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은 해군 지원을 요청하는 동기 중 하나가 대일 방어임을 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54년 7월 29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은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는 지역에서 일본 어선을 몰아내기 위해 추가 해군 함정을 요구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미 간에 벌어진 이런 군사 외교는 이승만이 북한의 위협뿐 아니라 일본의 위협 역시 절감했음을 증명한다. 일본군이 들어오면 김일성과의 전쟁을 접고 일본부터 상대하겠다는 발언은 북한만큼이나 혹은 북한 이상으로 일본을 두려워했음을 보여준다.

안보보다 정권 유지를 더 중시

1951년 3월 23일 이승만 대통령과 조병옥 내무부 장관.연합뉴스

재무장이 가시화되는 194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한국 영토를 실질적으로 위협했다. 일본이 미국을 부추기는 가운데 미군이 독도를 폭격하는 일이 1948년과 1952년에 있었다. 1952년부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이 해마다 나왔다. 그해 7월 26일에는 일본이 아무 권한도 없이 독도를 미군 훈련구역으로 제공했다. 일본에 대한 공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승만 정권은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독도를 안쪽에 두는 평화선을 선포했다. 이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가능성을 그만큼 실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인식을 토대로 해군력 증강을 추진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충분한 노력은 아니었다. 북한만큼 일본 역시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면서도, 북한을 겨냥한 반공 냉전체제의 형성에만 과도한 에너지를 투입했다. 일본의 위험성을 알리고 이에 대비하는 데에는 상응하는 노력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반공을 소리 높여 외치며 냉전체제 구축에 혈안이 됐을 뿐이다.

북한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일은 미국의 지지를 받지만 일본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일은 미국의 견제를 불렀다. 그는 미국의 견제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전자를 강조하는 데에 방점을 찍었다. 전자를 중심으로 냉전체제를 강화하며 국민들을 정신없이 만들었다. 일본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안보보다 정권 유지를 더 중시했던 것이다.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그것을 토대로 안보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가 운용한 한반도 냉전체제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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