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9 20:37최종 업데이트 25.02.1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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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뉴올리언스로 이동하는 에어포스원 기내에서 2월 9일 '미국만의 날'을 선포하는 선언문에 서명할 준비를 하며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을 남발하며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관세 부과와 더불어 영토 야욕까지 드러내며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10일, 트럼프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12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안토니오 코스타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그리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철강과 알루미늄 대미 수출 규모에서 각각 1위와 3위인 캐나다와 유럽연합은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또한 구글은 전 세계인들이 사용하는 자사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인 구글맵에서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명칭을 미국만(Gulf of America·아메리카만)으로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구글은 정부의 공식 지명을 따라온 오랜 관례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멕시코는 하루아침에 앞바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덧붙여 트럼프의 백악관은 AP통신에 백악관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렸다. AP통신이 멕시코만을 '미국만(아메리카만)'으로 변경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촌극이다.

트럼프의 관세 정치와 영토 야욕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이런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미국의 전임 대통령이 있다. 미국의 25대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다. 미국의 CNN은 지난 12일 미국의 매킨리를 특집으로 다루며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하나는 '관세왕'(tariff king)이고,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우상'(Trump's idol)이다.

지난 12일, CNN은 ‘관세왕이자 트럼프의 우상이었던 윌리엄 매킨리에 대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다.CNN

이 보도는 트럼프가 지난 한 세기가량 세계 정치는 물론 미국 국내적으로도 잊혔던 매킨리를 되살려냈다고 평가한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는 자신의 취임식에서 매킨리를 언급하며 "그는 관세와 그의 능력을 활용해 미국을 매우 부유하게 만들었다"라고 칭송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곧장 북미 대륙 최고봉인 알래스카주 디날리산의 명칭을 매킨리산(Mt. Mckinley)으로 변경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를 두고 미국 정치 전문매체인 폴리티코는 왜 트럼프가 갑자기 인기 없는 매킨리를 언급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매킨리의 정책, 특히 관세 정책을 따라 하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 이유로 100여 년 전과 다른 경제적 여건과 공화당 내부의 구조적 차이를 제시한다.

매킨리는 관세왕?

그러나 나는 폴리티코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과 매킨리를 생각하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관세 이미지를 활용하고 싶을 뿐, 궁극적으로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매킨리가 보여준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의 모습인 듯하다. 매킨리는 제왕적 인사권과 외교권을 통해 유례없는 영토 야욕을 드러냈고, 실제로 획득했다.

1843년 1월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윌리엄 매킨리는 1860년대 남북전쟁에 북부군으로 자원입대해 보급병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뉴욕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7년 동안 지방 검사로 근무한 뒤, 공화당에 입당해 연방 의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1890년, 당시 매킨리 하원의원은 평균 수입 관세를 38%에서 무려 49.5%로 상향하는 법안을 주도해 통과시켰다. 이때부터 그는 '보호주의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유력 정치인이 된다. 결국 그는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승리하고, 1900년 재선까지 성공하며 새로운 20세기 미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재선 이듬해인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이런 매킨리에 대한 CNN의 '관세왕'이라는 평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미국 정치사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1861년부터 1929년 경제 대공황까지를 공화당의 황금시기로 평가한다. 이 황금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1861년~1881년: 링컨 대통령부터 5차례 연속 공화당이 석권한 시기, 2) 1881~1897년: 공화당과 민주당이 두 차례씩 집권한 시기, 3) 1897~1933년: 우드로 윌슨을 제외하고 모두 공화당이 집권한 시기다. 공화당의 관점에서 보면 제2차 황금시기의 문을 연 대통령이 바로 매킨리다.

윌리엄 매킨리위키미디어 공용

당시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18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landslide)을 거두며 상·하원을 장악했다. 이 중간선거로 민주당의 하원 의석 점유율은 61%에서 29%로 급락했다. 매킨리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1896년 대선을 승리한 것이다. 이에 당시 매킨리는 자신의 대표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관세를 고수하거나 오히려 더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매킨리는 전혀 다른 경제정책을 펼쳤고, 이를 기반으로 1929년 경제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공화당 황금시기의 출발점을 연다.

매킨리 대통령 취임 당시의 미국은 1873년 이후 지속적인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농산품인 밀과 면화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동시에 전기, 석유, 철강 등을 중심으로 한 소위 2차 산업혁명으로 과잉생산이 가능해지며 경기침체 현상은 오히려 고착되었다. 미국의 실업률이 당시의 경기침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892년 4%이던 실업률이 1893년 9.6%, 1894년 16.7%까지 치솟았고, 매킨리 행정부가 들어선 1899년에 7.7%로 떨어졌다.

이때 매킨리가 경제침체를 벗어난 것은 고관세 정책을 고수하지 않고 오히려 저관세 정책으로 선회해서였다. '관세왕'으로 불리는 매킨리가 저관세 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회복했다는 점이 다소 아이러니하긴 하다.

18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은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되는 물품을 판매할 해외시장이 필요했다. 실제 미국 내부적으로는 경기침체를 회복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안은, 고관세 정책으로 국내 시장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저관세 정책으로 원자재를 저렴하게 확보하고 이를 재생산해 해외시장에 판매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선순환이 일어나야 노동자들의 완전고용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더글라스 어윈 다트머스 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19세기 말을 팽창의 시기로 정의하며, 당시 세금은 미국의 경제성장에 큰 영향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보다 앞서 언급한 전기, 철도 등의 발전이 산업화를 촉진했으며, 이와 함께 자유로운 이민으로 인한 저렴한 노동력의 유입이 중요한 요소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매킨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무역 정책으로 선회했다고 말한다. 결국, 매킨리를 '관세왕'으로 평가하는 것은 반은 틀린 것이며, 트럼프가 관세 때문에 매킨리를 소환한다는 주장 또한 반만 맞는 것이다.

관세왕 이미지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 '제왕적 대통령'

19세기 후반 미국의 확장주의에 대해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 월터 라페버 코넬대 교수는 두 가지 이유로 매킨리를 제왕적 대통령으로 정의했다.

먼저, 인사권이다. 매킨리는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는 자신의 사사로운 측근을 중용했다. 예를 들어, 1897년 스페인 대사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외교 경험도 없고 스페인어도 못하는 우드퍼드 의원을 공화당 중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사에 임명했다.

그리고 매킨리는 자신이 아끼는 정치 참모였던 마크 해나를 상원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상원의원이었던 존 셔먼을 국무장관에 기용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매킨리의 이 같은 인사권 행사는 트럼프가 1기 행정부에서 장녀인 이방카를, 이번 2기 행정부에선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를 활용하는 것과 닮아있다.

2016년 공화당 경선주자 시절 트럼프 가족 사진이다. 트럼프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딸 이방카 가족이고, 왼쪽이 아들 트럼프 주니어 가족이다.EPA/연합뉴스

다음은 외교권이다. 학자들은 강력한 외교권을 행사한 미국 대통령으로 매킨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꼽는다. 매킨리가 대통령 선거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으로 선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킨리가 강력한 대통령상을 확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킨리를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의회를 거치지 않거나 선전포고 없이 해외에 파병한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헌법에 규정된 연방 의회의 외교권에 제동을 건 정치적 행위이며, 동시에 대통령의 외교권을 확대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실험이었다.

실제 매킨리 전후로 대통령의 외교에 대한 의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매킨리 이전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면, 1898년부터는 대통령의 의견을 '듣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 이에 매킨리는 적어도 외교에 있어서 대통령을 '선출직 왕'(Elective Monarchy)의 지위로 스스로 격상시켰다고 분석된다.

매킨리가 인사권과 외교권에 있어 제왕적 대통령이 되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의 영토 확장이었다. 매킨리는 인사권을 활용해 영토 확장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했고, 외교권을 활용해 실제 영토 확장을 이뤘다.

인사권을 활용해 영토 야욕을 드러낸 것은 1900년 재선 당시 제국주의를 미국의 가치로 주장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이다. 1899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이 집필한 <분투하는 삶>에서 외교의 바탕은 군사력이며, 이에 기반한 팽창주의 외교가 미국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과의 전쟁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음으로 외교권, 즉 전쟁을 통해 미국의 영토를 태평양 너머까지 확대했다. 1896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매킨리는 하와이 병합, 해군력 증강,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 서인도제도에 해군기지 건설 등을 자신의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럼에도 1898년 초기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문제로 스페인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1898년 7월 하와이를 병합하면서 카리브해만이 아니라 태평양 너머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하기로 계획한다. 결국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정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손쉽게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파리조약에서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을 양도받고,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에 대한 영유권 포기도 얻어낸다. 또한, 패전국인 스페인은 푸에르토리코와 괌까지 미국에 헌납하기에 이른다. 1898년 전쟁으로 미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스페인은 지는 해가 됐다.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중남미, 태평양,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영토를 확보한 매킨리의 미국은 미주 대륙을 넘어 미국 외교의 원칙을 세계 무대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대중들과 언론들은 매킨리의 관세 정치를 트럼프와 연결시키고 있다. 실제 매킨리의 관세왕 이미지는 트럼프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는 도구로는 유용하다. 그러나 막상 매킨리의 정책과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면, 트럼프가 매킨리를 언급한 진짜 이유는 매킨리의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과 그 권한을 활용한 영토 확장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토를 확장하겠다며 그린란드, 멕시코만, 캐나다, 파나마 운하, 심지어 화성까지 언급하는 것은 결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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