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아침 여덟 시 전후로 눈이 떠진다. 딸은 실습 중인 병원으로 출근할 준비를 하고 아내는 그런 딸을 살피면서 나와 아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들과 밥을 먹는 사이 아내는 내 도시락을 만든다. 두 개의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뜨거운 커피를 담고 과일까지 따로 챙기면 내 하루치 먹을거리다. 아들은 취업 공부하러 졸업한 학교로 가고 나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택시를 점검하고 일을 시작한다.
올해 특성화고 3학년이 되는 딸은 작년부터 학교가 아닌 병원으로 월급 없는 실습을 나가고 있다. 등교가 아닌 출근을 하는 고등학생이지만 곧 대학 진학과 함께 다시 등교를 꿈꾸고 있다.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첫 기술직 공무원 2차 시험에서 낙방하고 앞길이 난망한 취업준비생의 삶을 시작했다.
지난해 느닷없이 다니던 병원이 폐업하면서 직장을 잃은 아내는 이참에 아예 전업주부로 살기로 했다. 본인은 재취업 의지가 있긴 하지만 쉰 보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와 누가 보아도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작고 약해 보이는 몸집은 그게 썩 여의치 않다는 걸 한 눈으로 보여준다.
2차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지난 2월 이후 58세가 지났다. 작년부터 외벌이가 되었고 자식들은 아직 독립하지 못했다. 딸은 주말에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생으로는 적지 않은 돈을 벌지만 아내가 주는 용돈은 그것대로 받아 쥔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는 노령수당과 주택연금을 합해 월 100만 원 정도의 수입이 있어 자식들에게 받던 생활비를 몇 년 전 중단시켰다. 몸도 건강하고 활달하게 생활하고 계신지라 병원비도 들지 않는다. 자식들에게는 돈을 떠나 건강한 일상을 보내는 어머니가 고맙다.
덕분에 나는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부양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서 자유롭지만 가성비가 확 떨어진 서울에서의 주거비와 생활비를 해결하는 일은 여전히 부담이고 아마도 끝까지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예상을 한다.
왜냐하면 내가 꾸준하게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라 불과 8년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지방과 섬을 전전하며 자유롭게 살다 어떤 피치 못할 일로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방이라면 집 한 채 사기에 충분할 돈이 서울에서는 전세방도 어렵게 구할 초라한 규모로 작아져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거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런 데다 적어도 몇 년은 실직한 아내와 곧 대학생이 될 딸과 언제 취업할지 모르는 아들까지 가족들에게 필요한 모든 돈을 혼자 다 벌어야 하는 터널에 진입했다.
남편이자 아빠인 나는 전혀 주저함 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큼성큼 내 발로 터널에 들어오긴 했으나 빛이 보이는 끝은 몇 년 뒤에야 보인다는 사실이 가끔은 기가 막힌다.
노동시간에 대한 정직성
이건 아내나 아이들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터무니없이 비싼 아파트를 향한 욕망으로 인해 생긴, 가난한 자를 잡아먹으면서 제 몸집을 불리는 좀비 같은 세상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아이들이 독립하면 지방으로 내려가 지금보다 훨씬 수월한 삶을 살자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견뎌야 할 시간이 아직 몇 년이나 더 남았다. 그래도 그걸 버틸 수 있을 거라며 희망을 걸었던 확실한 실체가 내게 이미 있었다. 개인택시였다.
몇 년 전부터 그러기로 마음먹고 준비했고 시작한 터였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가성비는 떨어지지만 노동시간에 대한 정직성 때문이었다. 오래 일하면 수입이 많고 짧게 일하면 수입이 적은 당연한 논리가 그나마 통하는 직업이었다.
짧게 일하고 많이 벌기를 원하면 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나는 젊은 시절 부가가치 높은 전문직을 부러워했지만 그건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나는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조금 인생을 알았다고 느꼈을 때 편하게 돈을 버는 것과 편하게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부가가치 높은 직업이 부가가치 높은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내게 주어진 가장 합당한 일은 묵묵히 거짓 없이 노동하고 그래서 주어지는 돈의 양이 작든 크든 순전히 내 것이면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밑이나 어떤 조직 안에 들어가서 하는 노동은 반드시 부당한 마음을 불러왔다.
그건 그 노동이 부당해서라기보다 자기 생존과 제 이익에 충실하게 설계된 인간의 마음 때문이었다. 일정한 상호계약을 맺고 시작한 일이라도 연약한 인간의 마음은 자기 노동에 관해서는 엄밀한 객관적 평가보다 부풀려진 주관적 평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갑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갑과 을은 그래서 언젠가는 끊어질 실타래인 것이다.
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불만을 만들고 신뢰를 의심하는 순서로 이어지고 노동하는 삶 안에 자괴감과 피폐함이 조금씩 누적되게 한다. 때로 불만은 자신을 발전시키고 사회가 역동하고 진보하는 긍정적인 형태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와중에 소모되는 엄청난 에너지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전제에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럴 힘이 없었다. 아직 노인까지는 아니지만 나이는 들었고 한창 힘을 떨칠 시기는 분명히 지나갔으며 조금씩 남은 인생의 후반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몇 년 전부터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하다. 그동안 안간힘으로 직장 생활을 버텨냈던 아내에게는 이제 집에서 아이들과 나를 보살피는 것도 충분히 돈을 버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외벌이를 자처했다. 따라서 내가 벌어야 할 돈은 그동안의 아내 몫까지 보태졌다.
그래도 더 이상 갑과 을의 관계에서 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스스로가 갑인 동시에 을인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얻어지는 손해는 내 노동으로 감당하면 될 일이었다. 내가 찾은 그 일이 바로 개인택시였다.
갑이자 을인 택시 운전사

▲택시와 필자
김지영
2023년 9월 13일은 얼떨떨함과 동시에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빈 차 등을 켜고 택시 영업을 시작한 날이다. 그 전 1년 6개월을 투잡으로 택시 기사를 했고 또 그보다 몇 해 전 제주도에서 5개월가량 법인 택시를 몰았지만 회사 택시를 처음 운전했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분명 떨리는 느낌은 같은 종류였지만 이제 내 것으로 내 일을 하게 되었다는 흥분감은 전에 전혀 맛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제 돈을 벌기 위해 내 노동을 팔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이제 곧 눈앞에 닥칠 노년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부터 드디어 내가 갑이자 을인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17개월이 지났다. 모든 새로운 일이 그렇듯 그동안 내게 많은 일이 있었다. 직업의 변화는 단순하게 돈을 버는 일이 바뀌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면서 가족들을 먹이고 따뜻하게 재워야 하는 건 내게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의무다.
따라서 이를 위해 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된다. 이전 내 직업의 역사를 보면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어떤 때는 주저 없이 못 주머니를 차고 망치를 들고 또 어떤 때는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는 일의 결과가 내 가족들을 먹이고 따뜻하게 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고 장단이 있다. 그동안, 그러니까 지난 17개월 사이 어느 날 밤 나는 젊고 건장한데 술까지 취한 사람에게 운전 중 폭행을 당해 파출소도 아닌 경찰서에 가서 고발장을 썼던 적이 있다. 그 전후로 지금까지 112 신고를 모두 네 번 해야 했다.
한 번은 술 취해 잠든 그런데 위아래 모든 옷이 마냥 짧기만 한 여자를 직접 깨우지 못해서였고, 다른 한 번은 술 취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한 것까지는 같은데 다만 이번에는 잠꼬대로 소리까지 내지르는 몹시 과체중인 젊은 남자를 깨우기 위해서였으며, 또 다른 한 번은 차 안에서 극구 담배를 피우겠다고 우겨대는 술 취한 늙은 남자가 제지되지 않아서 였으며, 마지막은 바로 며칠 전 목적지에 도착해 카드를 줄까요 말까요 하며 놀려대는 그러니까 술이 떡이 되기 직전의 젊은 여자와의 말싸움이 지겨워서였다.
물론 신고까지 가지 않았지만 나를 무척 곤란하게 하거나 비겁하게 만들거나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손님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내 운전대 주위에 손으로 집을 수 있는 것 중 무기가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게 만든 손님도 여럿 있었다.
내가 꿈꾸던 읽고 쓰고 노동하는 삶
말하자면 택시는 노동도 상노동에 속하지만 상대해야 하는 많은 사람 중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잊을 만하면 반드시 잊지 않고 탑승하는 (어쩌면) 위험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깨닫는 17개월의 시간이었다.
그것만 아니면 참말로 괜찮은 직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디를 씻고 봐도 몹쓸 점 하나 없는 그런 돈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걸 다 따져보고 실제 17개월을 경험해 본 결과 개인택시는 쉰여덟 초로의 남자가 남은 인생을 걸 만한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만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세 건 있었고 그래서 내년부터는 보험료가 (어쩌면) 500만 원까지 치솟고 3년 할증까지 붙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다. 하루 열 두 시간 노동을 해야 지금의 가정경제를 지켜낼 수 있는 내 형편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한가로이 글을 쓰는 건 아직은 엄두도 못 낼 안타까운 상황이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만족한다. 아내와 아이들을 돈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에.
이런 시간이 쌓이다 보면 아이들은 곧 하나씩 곁을 떠나고 조금씩 늙어가는 아내와 나는 조금씩 더 한가로운 공간과 시간 안에 살게 될 것이다. 물론 내 노동하는 시간도 딱 그만큼씩 줄어들게 된다. 그 시간만큼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거나 오래 묵은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고속버스를 탈 수도 있다.
지금 그린 이 풍경은 상상에 그치지 않고 손에 잡힐 미래다. 내가 건강한 택시 운전사로 계속 살아가는 한은 그렇다. 택시를 시작한 후로 난 더 이상 은퇴 후의 삶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고, 풍족하지 않지만 가난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꿈꾸던 읽고 쓰고 노동하는 노년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오늘 돈을 벌어야 한다면 지금 당장 주차장으로 가서 차의 시동을 걸기만 하면 되고 뿐만 아니라 그 차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게 필요한 노동 시간이 하루 열두 시간이라는 갑갑한 현실 또한 내가 잊을 리 없다. 자, 이제 주차장으로 내려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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