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6 11:48최종 업데이트 25.02.1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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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의 자유당 정책위원장은 경기도 부천군의 재선 의원인 친일파 장경근(張暻根, 1911~1978)이다. 부정선거를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은 그는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5.29) 일주일 전인 1960년 5월 22일 밤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소환돼 밤샘 조사를 받은 뒤 다음 날 오후에 구속됐다.

그달 3일의 국회 상황을 전하는 4일 자 <동아일보>는 "하오 본회의에서 3·15 부정선거의 원흉인 박만원(자)·장경근(자)·이존화(자)·신도환(자)·손도심(자) 등 5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가결하였다"고 보도됐다. 재석의원 142명 중 120명이 그의 의원직 박탈에 찬성표를 던졌다.


1958년 제4대 총선 당시, 무소속(27석)과 민주당(79석)·통일당(1석)이 얻은 의석은 전체 233석 중 107석이다. 위의 국회 투표에 자유당이 대거 불참했는데도 107표보다 많은 찬성표가 나왔다. 자유당 사람들이 볼 때도 장경근은 부정선거 원흉이었던 것이다.

지명수배 뚫고 일본으로 간 장경근

대한민국 국회 의정단상에 답변을 하러나온 장경근위키미디어 공용

그는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상태에서 또 다른 혐의로 추가 입건됐다. 이승만 정권이 1960년 대선에 대비해 진보세력(당시 표현은 혁신계)을 묶어두고 지방권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벌인 일이 1958년 12월 24일의 국가보안법 파동(2·4파동)이다. 그가 이 사건을 기획한 일이 4·19혁명 뒤에 불거져 추가 입건됐다.

1960년 7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장경근·조순·임철호 등 자유당 운영위원회 위원들은 2·4파동 때 3백 명의 무술경위를 임시 채용하여 야당 의원들을 불법감금 해서라도 국가보안법 및 지방자치법을 통과시키자는 사전 협의를 하였으며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불법감금 및 불법체포의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장경근의 일생에서는 역사적 고비마다 의원이나 요원을 어딘가에서 끌어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다시 언급된다.

부정선거 원흉으로 구속돼 서울형무소(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간 그는 그해 11월에 또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6월 10일과 7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당뇨병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해 7월 16일 석방된 그는 11월 13일에 종적을 감췄다. 통쾌한 듯 활짝 웃음 짓는 그의 사진과 함께 실린 이틀 뒤의 <경향신문>은 그의 부부가 서울대병원 입원실에 있다가 휴대용 라디오, 회중시계, 핸드백, 혈압계 등을 챙겨 도주한 사실을 보도했다.

검찰은 전국 지명수배를 내리는 한편, 밀항에 대비해 해안 봉쇄를 경찰에 지시했다. 하지만 체포에는 실패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경근 편은 "일본에 도피 중이던 1960년 11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도쿄의 무라타 사법서사 사무실 법률자문역으로, 박종근 법률사무소 법률고문 등으로 활동했다"라고 기술한다. 지명수배를 뚫고 일본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11월 중순에 망명한 그는 바로 그달에 사법서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일본에 대한 적응력이 상당했던 것이다.

일제 판사, 해방 후엔 반민특위 공격 주도

1911년 5월 18일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그는 용천군 남시공립보통학교 및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중등학교)와 교토제3고등학교를 거쳐, 윤봉길 의거의 달인 1932년 4월에 도쿄제국대학 법률학과 학생이 됐다. 그런 뒤 1935년에 24세 나이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통과했다. 한국이 아닌 일본에 가서 재학 중 고시패스에 성공했을 정도로 적응력이 대단했다.

대학 졸업 2개월 뒤인 1936년 5월 경성지방법원 사법관시보가 된 그는 이듬해부터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일제 판사로 부역했다. 단 한번도 지방 발령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미군정하에서도 경성지방재판소 수석판사와 서울지방법원장을 역임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그는 일왕(천황)의 녹봉을 받았다. 그렇게 제국주의 침략국의 판사로 부역하면서 9년간이나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그런데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죄를 지었다. 친일청산 저지에도 앞장을 섰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공포(9.22)되고 3주가 흐른 1948년 10월 13일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틀 뒤 <조선일보>는 그가 반민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그렇게 물러나는 듯했던 그가 1949년 4월에 내무부차관이 된 뒤 자행한 일이 반민특위 청사 공격이다. 그가 친일청산 기구를 공격한 이 사건을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무부 차관으로 근무 중이던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에서 친일 경찰인 최운하를 체포하자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원들을 무장해제시킨 후 연행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 당시 남대문로 2가(현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쪽)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특위 해산 후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되었다.자료사진

국회의원이 겸하는 반민특위 위원과 달리 반민특위 특경대는 경찰 요원들이었다. 이런 무장 요원들을 반민특위에서 끌어내는 일을 그가 지시했다. 이는 친일청산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타를 날렸으니, 1936년부터 9년간의 친일 녹봉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물론이고 일제를 위해 잔무까지 처리해 준 셈이다.

이승만 정권은 그런 장경근을 또 다른 용도로도 활용했다. 평화선(이승만라인) 선포로 한일관계가 경직된 상태에서 그를 한일회담 대표로 내세웠다. 1953년 5월 6일 자 <조선일보>는 4월 15일부터 도쿄에서 협상 중인 한일회담 한국대표단에 장기영 조선일보사 사장과 더불어 장경근도 합류해 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 정권이 민족의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한일회담에 임하지 않았다는 점은 장경근 같은 친일파를 대표단에 넣은 데서도 확인된다.

이듬해인 1954년, 장경근은 자유당 공천을 받고 경기도 부천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이 상태에서 1957년에 내무장관이 된 그는 끌어내기 특기를 또다시 발휘했다. 1957년 5월 25일 약 20만 명이 운집한 서울 장충단공원의 민주당 시국강연회에 깡패 50여 명을 투입해 주최 측을 해산시키고 행사를 망치도록 지시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이듬해인 1958년 5월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그는 앞서 설명한 2·4 파동 때 끌어내기 기술을 한 번 더 보여줬다.

"내가 특별히 반일적인 것은 아냐"... 13년이나 일본 거주

평안도 출신인 장경근은 선거구인 부천 주변을 자신의 왕국으로 건설했다. 그래서 그가 서울대병원에서 종적을 감춘 직후에 경찰은 수사망을 그 지역으로 좁혔다. 도피 나흘 뒤에 발행된 1960년 11월 17일 자 <경향신문>은 "경기도 경찰당국은 인천·김포·부평지구가 장(張)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던 만큼 이곳의 어느 섬에 '장'이 틀어박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점 아래 수사는 계속 중"이라고 보도했다. 외교부가 주일대표부에 '장경근이 일본에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라'고 긴급훈령을 내린 것은 18일 오후다.

일본으로 도주할 당시에 장경근이 걱정했던 것이 있다. 자신이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를 지지한 일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였다. 12월 1일 일본에서 가진 기자회견 때 그는 그 점에 신경을 썼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은 "장을 만난 현지 기자들은 장이 건강하게 보였다고 말하였다"라고 전했다. 두 차례의 보석 신청을 무색게 하는 보도다.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내가 특별히 반일적인 것은 아니었다"라며 "나는 평화선의 설치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반민족행위도 모자라 반민특위 청사를 공격하고, 민주당 집회를 방해하고, 국회의사당 불법 폭력 사태를 기획했다. 이후 활짝 웃는 사진을 한국에 남기고 일본으로 간 그는 무려 13년간이나 일본에 그곳에 거주했다. 그 후 상황을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요약한다.

"1973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74년 11월 브라질로 이민 갔다. 1977년 5월 한국으로 돌아왔고, 1978년 7월 25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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