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6 18:53최종 업데이트 25.02.17 11:15
  • 본문듣기
목포는 처음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나에게 목포는 오랫동안 너무 먼 도시였다. 200만 명이 일본과 대만으로 빠져나간 1월 말, 목포로 향했다. 근대 흔적을 품고 있는 목포가 갑자기 보고 싶었다. 사실 '맥주에 얽힌 도시의 역사와 문화'가 여행의 마중물이었던 나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10년 전 개통한 KTX가 없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KTX 목포역은 기존 역사를 개축했다. 모양과 구조는 바뀌었지만 1913년 처음 들어선 그 자리에 남아있다. 위치가 구도심이라 편했다. 역 안은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밖은 조용했다. 아직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라 그런지 여행객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목포역 횡단보도에서 바라본 원도심 풍광은 묘한 기대감을 부추겼다. 우연히 만난 부라더 미싱 목포점과 갑자옥 모자점은 어릴 적 동네에 있던 작은 상점들을 떠올리게 했다. 낯선 목포의 건물들이 서울 촌놈에게 건네는 즐거움이었다.

'낯섦, 익숙하지 않음'. 목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여행이란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나를 밀어 넣는 것 아닌가. 낯선 환경과 일탈에서 나오는 도파민은 여행의 원동력이 되곤 한다. 누구도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반도 서쪽 끝에서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우라를 판타지로 바꾼 화신 연쇄점

카페로 변신한 화신 연쇄점윤한샘

근대 흔적을 찾아온 나의 첫 목적지는 화신 연쇄점이었다. 카페로 변신한 이곳은 원래 1932년 마루오카 다수쿠치로가 총포와 서양식 가구 같은 수입품을 팔던 상점이었다.

1935년부터 38년까지는 서병재가 인수해 1층은 공예품과 화장품, 2층은 문방구, 가구, 악기 그리고 3층은 식당과 양복을 파는 백화점으로 운영했다. 특히 서병재의 동생, 서병인이 독립 자금을 위해 운영에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41년 조선 운송 주식회사, 1972년 대한통운 목포지점, 최근까지는 갤러리로 사용되다 2025년 카페로 탈바꿈했다. 국가 등록 문화재가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아닌 카페가 된 경우가 있었나? 서울 정동에 있는 구세군 회관이 카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다 결국 갤러리로 바뀐 적이 있다. 문화재 정체성을 유지하며 상업적 니즈를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화신 연쇄점 내부윤한샘

다행히 화신 연쇄점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듯 보였다. 인테리어는 인위적인 터치를 최소화해 날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벽에 걸린 추상화는 건물의 원초적 모습에 현대적 감성을 더했다. 2층에 깔린 카펫은 속살을 감추지 않은 뼈대와 어우러져 이 건물이 품고 있는 진정성을 돋보이게 했다.

아메리카노와 케이크도 맛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건물의 존재와 역사가 보여주는 아우라였다. 종종 나는 역사의 아우라에 압도되어 판타지에 빠지곤 한다. 커피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자 물 건너온 상품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화신 연쇄점의 계단과 창틀, 기둥이 내뿜는 아우라는 나를 100년 전 목포로 이끌고 있었다.

목포 정신을 담고 있는 근대 역사관

밤에 바라본 목포 근대 역사관 1관(구 일본 영사관)윤한샘

이제 본격적인 목포 탐방의 시간. 화신 연쇄점을 나와 목포 근대 역사관으로 향했다. 목포 근대 역사관은 두 개의 관으로 나뉘어 있다. 1관은 구 일본 총영사관을, 2관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개조했다.

1900년 신축한 구 일본 총영사관은 1897년 개항한 목포 침탈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지붕 위 그리스식 작은 페디먼트가 놓여있는 르네상스 스타일의 이 건물은 붉은 벽돌을 입고 있다. 근대 역사관 1관은 당시 사용했던 축음기와 재봉틀, 가방 등 개화기 문물과 함께 개항장으로 번성했던 목포의 역사를 담담히 보여줬다.

차별과 무시를 당한 조선인들의 울분도 묵묵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쟁을 획책하는 일제에 맞서 크고 작은 노동농민운동을 벌인 민중들의 모습에 고개가 숙여졌다. 강추위에 방한포를 뒤집어쓰고 응원봉을 흔든, 그 질기고 징한 힘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1관 표로 2관도 관람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소녀상에게 인사를 한 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목포 근대 역사관 2관으로 사용 중인 이 건물은 1921년 목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에 건립됐다.

목포 근대 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윤한샘

일본인 지주의 금융과 부동산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회사야말로 한반도 경제 침탈 본부였다. 1908년 서울과 부산, 목포 등 전국 주요 도시에 들어선 8개 지점이 자원 수탈 첨병 노릇을 했다. 현재는 부산, 대전, 목포, 세 도시에 건물이 남아있는데 그중 목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2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행했던 침탈의 과정과 당시 사용했던 부동산 계약서와 수표, 저울, 토지측량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항쟁 역사를 다룬 기록들이었다. 목포에서 일어났던 민중운동과 의열단의 행적 그리고 80~90년대 민주화 운동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했던 목포의 정신을 눈과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한때 두 건물 모두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며 당당히 우리 역사를 담아냈다. 아픈 기억과 유산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것 또한 역사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목포, 맥주와 함께 춤을

소년 김대중 공부방에서 바라본 목포항윤한샘

목포 근대 역사관을 나와 마지막으로 소년 김대중 공부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포진 옆에 있는 이 작은 적산가옥은 1936년 소년 김대중이 큰 꿈을 안고 목포로 건너와 공부를 하던 곳이다. 작은 창 너머 목포항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꿈을 키웠을까?

내부는 소년부터 청년 그리고 대통령으로 이어진 삶의 여정이 걸려있었다. 순간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과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 중첩됐다. 과거가 현재를 구하고 있는 현실에 그 힘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목포진에서 바라본 본 목포 전경은 아름다웠다. 섬들로 둘러싸인 항구와 빽빽이 붙어있는 낮은 건물들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붕들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골목을 걸으며 남아있는 옛 건물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거리를 걸을수록 불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거리에는 문을 닫은 상점과 텅 빈 빌딩들이 꽤 많이 보였다.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적산가옥에 '매매'가 붙어있는 장면이었다. 비어 있는 매장들이 보이면 보일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졌다.

매매가 붙은 적산가옥윤한샘

이야깃거리를 풀어낼 공간이 넘쳐남에도 채워줄 콘텐츠가 부족해 보였다. 근대화 거리는 '근대 목포'에 관련된 콘텐츠가 가득해야 하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콘텐츠가 어울릴까? 그 답은 화신 연쇄점에서 느꼈던 판타지에 있었다.

100년 전 사람들이 했을 법한 것들을 입고 먹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에 가는 이유는 판타지를 즐기기 위해서다. 누구나 그 경험이 가짜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여행에서 체험한 공감각은 영원히 기억된다.

근대 역사관은 중요한 장소지만 개항장 목포의 판타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공감각적 체험은 거리에서, 적산가옥에서, 화신 연쇄점에서, 오래된 사진관에서 가능하다. 개화기 사람들의 옷을 입고 인력거를 탈 수도 있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화신 연쇄점에서 가배를 홀짝일 수도 있고 심지어 선술집에서 맥주도 마실 수 있다.

맥주를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상상을 해봤다. 19세기 목포에 맥주가 있었을까? 화장품, 양복, 서양 악기를 파는 화신 연쇄점이 있었는데, 맥주라고 없었겠는가. 100년 전 목포에서 마셨던 맥주는 어떠했을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재현할 수는 있다. 가짜인 것을 누구나 안다. 무슨 상관인가?

'목포 상회', 목포 거리 구석, 적산가옥에 차린 맥줏집을 그려보자. 일본 색이 잔뜩 묻어있지만 괜찮다. 여긴 개화기 목포니까. 항구 노동자와 외국인들로 북적이는 선술집이지만 의열단이 비밀 회동을 하는 아지트기도 하다. 축음기에는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지고, 낡은 괘종시계는 시간에 맞춰 종을 치고 있다. 진짜 같은 가짜지만 그 속에 '근대 목포'라는 진정성이 들어있다면 상관없다.

맥주는 직접 양조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이 생긴다. 평범한 맥주는 재미없다. 항구도시라는 정체성을 살려보자. 포터, 인디아 페일 에일(IPA), 배럴 숙성 맥주면 좋을 것 같다. 포터는 산업혁명 시기 런던 템스강 하역 노동자들이 사랑한 어두운 맥주였다. 목포에도 분명 노동의 갈증을 맥주로 채우는 항만노동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맥주 이름은 '목포는 항구다'

IPA는 18세기 영국에서 인도로 수출하던 맥주에서 태어난 스타일이다. 일제 폭압에도 굴하지 않던 목포 사람들에 헌정하려면 높은 쓴맛과 진한 홉 향을 가진 웨스트 코스트 IPA가 좋겠다. 이 맥주의 이름은 '소년 김대중'

마지막으로 항구도시의 문화적 다양성은 배럴 숙성 맥주로 풀어보자. 럼, 와인, 위스키 모두 뱃사람들이 사랑한 술들이었다. 이런 술을 담갔던 배럴에 맥주를 숙성시켜 항구와 배에 얽힌 사람들을 이야기하면 어떨까. 맥주 이름은 '목포와 함께 춤을'

목포진에서 바라본 목포시내윤한샘

목포를 거닐며 이런 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일본의 교토나 독일의 밤베르크처럼 목포는 오랜 역사가 풍기는 매력을 간직한 도시였다. 다만 그 매력을 드러낼 방법을 못 찾고 있을 뿐.

목포 맥주가 있다고 사람들이 올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맥주는 '근대 목포'라는 판타지를 형성하는 멋진 아이템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목포 맥주가 있다면 그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야 한다. 지역 활성화 사업의 단초가 바로 여기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