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체포구속' '사회대개혁' '개방농정 철폐' 등을 요구하며 서울로 온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이 2024년 12월 2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부근인 한강진역에 도착하자 미리 와 있던 시민들이 환영하고 있다.
권우성
지난 2024년 12월 남태령에서 응원봉과 트랙터가 조우했던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선사했다. 내란의 밤을 뚫고 한파와 폭설을 이겨내는 연대의 장에서 응원봉과 트랙터는 수많은 얘기들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함성과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 주었다. 더 많은 것을 묻고 더 많이 얘기하고 싶었던 아쉬움을 진한 여운으로 간직한 채,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며 다시 이들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어쩌면 응원봉과 트랙터가 1박 2일 동안에도 미처 더 묻지 못했던 것, 더 얘기하지 못했던 것에는 이런 얘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농민에게 더 나은 내일이란 어떤 내일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농업과 농촌은 앞으로도 지속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바탕에는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더 나아가 "농업·농촌·농민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가 된다면, 그런 대한민국을 더 나은 내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응원봉과 트랙터가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것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우리 사회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예전부터 있었다.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1990년대 개방농정 이후 언제나 제기되어 왔던 농업·농촌·농민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해 개방농정의 틀에서 벗어나 지속가능 농정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5년이 끝난 후 농정 전환에 대한 농촌 현장의 반응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냉소적 시선과 부정적 평가가 더 우세했다.
지금도 지속가능 농정으로의 전환이라는 방향성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농정 전환으로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분위기가 우세하다. 그 원인과 이유를 제대로 성찰하고 반추하지 못한다면 조기 대선에 이어 새 정부가 출범하여 새롭게 농정 전환을 추진하더라도 문재인 정부와 똑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 있고, 결국에는 응원봉과 트랙터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진 근원적 물음에 이번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임기 3년 차에 겨우 시행된 농정 전환
문재인 정부 농정 전환이 가장 크게 비판받는 부분은 임기 초반을 낭비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 급박하게 대선을 치르고 인수위원회 준비기간도 없이 당선 다음 날부터 곧바로 임기를 시작한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농정 분야에서 벌어졌다.
임기 2년 차에 실시된 지방선거 때문에 대통령의 농정 전환 의제를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할 주요 농정책임자 자리가 동시에 장기 공백 상태에 빠져 버리면서 농정 전환이라는 의제 자체가 실종되어 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농정 전환 관련 핵심 정책들이 임기 중반인 3년 차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공익직불제 도입 및 개편, 푸드플랜과 로컬푸드 확산,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설치 및 운영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의제들이 모두 임기 3년 차에 겨우 시행되었다.
올해 예상되는 새 정부 역시 탄핵과 대선에 이어 곧바로 임기 시작이라는 문재인 정부 시작과 동일한 상황이다. 게다가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당시와 비슷하다. 농정 전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기 초반 1~2년을 낭비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이번에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기 시작 전에 미리 농정 전환과 같은 국정과제를 정하여 새 정부 시작과 동시에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주요 농정책임자 자리에는 내년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인사를 배치하여 임기 초반 1~2년 차에 농정 전환의 성과를 농촌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속도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임기 5년 대통령제에서 임기 중반에 농정 전환을 시작하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두는 데 시간적 제약이 너무나 뚜렷하여 정책의 효능감을 제대로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환의 속도와 내용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면 농정 전환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책의 신뢰도 역시 낮아질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크고 작은 성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때 폭락했던 쌀값을 회복하여 임기 내내 안정적으로 유지했고, 농산물 수급 및 가격 안정장치를 개선하고 공익직불제를 신규 도입하는 등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제도개선도 이루었다. 이외에 임산부 친환경농산물 지원, 초등학교 과일간식, 농지법 개정을 통한 농지관리제도 강화, 여성농업인 특수건강검진제도 등 새로 시도한 정책들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금도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개별적 정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농정 전환이라는 종합평가 성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농정 전환이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해 체감할 수 있을 만큼의 효능감을 주지 못하고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농정 전환을 추진하는 새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정부와 국가의 책임 분명히 밝혀야 신뢰 얻어

▲정부가 타작물 재배로 인한 손실보전을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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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정 전환을 지치지 않고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지속하려면 정부와 국가의 책임성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쌀의 공급과잉을 막기 위해 재배면적을 줄여야 할 경우, 윤석열 정부와 같이 일방적으로 농가에 일정한 면적을 줄이도록 강요할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생산조정제와 같이 정부가 타작물 재배로 인한 손실보전을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쌀의 생산조정을 위해 정부가 약 1000~2000억 원의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80kg 기준 쌀값이 1만~2만 원 하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농가 전체로는 약 4500억~9000억 원의 소득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정부의 책임과 부담을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농가의 참여와 신뢰를 얻을 수 있고, 담대하게 농정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전 세계가 생생하게 눈으로 목격하듯이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의 기조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듯이 과거의 개방농정 시대는 저물었다. 오히려 기후위기, 에너지위기, 식량위기, 지역소멸위기 등 새로운 복합·다중위기의 파고가 농업과 농촌을 덮치고 있다.
이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기후재난을 지원하고 탄소중립을 추진하는 것, 에너지위기에 대응하여 재생에너지로의 정의로운 전환을 추진하는 것, 식량위기에 대응하여 국민의 식량안보와 먹거리기본권을 보장하는 것, 지역위기에 대응하여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해소하고 양극화와 불평등 및 초고령화를 해소하는 것 등과 같이 수많은 난제들이 농정 전환의 길에 겹겹이 쌓여 있다.
이러한 난제들을 풀어가면서 지치지 않고 전환을 추진해 나가려면 참여와 소통 그리고 협의에 기초한 농정 거버넌스의 성숙이 중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전국 단위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지역 단위 농업회의소 등의 제도적 기능을 강화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하지만 거버넌스의 성숙도가 충분하지 않은 전환의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와 국가의 책임성이 우선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난제들을 풀어가면서 지치지 않고 전환을 추진해 나가려면 참여와 소통 그리고 협의에 기초한 농정 거버넌스의 성숙이 중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전국 단위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지역 단위 농업회의소 등의 제도적 기능을 강화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하지만 거버넌스의 성숙도가 충분하지 않은 전환의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와 국가의 책임성이 우선되는 것이 중요하다.
▲ 국가푸드플랜 등 식량 및 먹거리에 대한 국민의 기본적 권리 확대 ▲ 농산물의 수급 및 가격 안정 확대로 농가소득 및 농가경제 개선 ▲ 공익직불제 확대 및 강화 ▲ 기후위기 관련 농정의 제도·정책·역량을 통합 관리하는 '기후농정' ▲ 정의로운 전환에 기초한 농촌 재생에너지 확대 ▲ 1184개 면을 대상으로 도시와 농촌의 격차 해소, 농촌개발 및 농촌재생 프로젝트 추진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과제들에서 정부와 국가의 책임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농정 전환은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담대하게 이루어 나가야 한다.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은 무너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참여와 소통 그리고 협의와 집행책임을 통해 지속적으로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농민과 국민 그리고 정부 상호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장경호연구위원
포럼 사의재
* 필자 소개 : 장경호 농업제도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10∼2018년 농업농민정책연구소 여름 소장으로 농정 연구와 대안 제시 활동
2018∼2022년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농식품부 정책보좌관으로 농정에 참여
현재 농업제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으로 농정 전환에 대해 꾸준히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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