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식
대통령기록관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진짜 위험은 도외시한 채 입법부의 권능을 약화시키는 데만 관심을 보인 선례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이 만들었다. 이승만은 리더십 부족과 경제적 실패, 민간인 학살, 민족분단, 친일청산 방해 등으로 민심 이반이 생긴 것은 고려하지 않고 국회의 권능에 문제가 있다며 국회를 약화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이런 태도가 낳은 결과물 중 하나가 국회 양원제다.
이승만은 1948년과 1950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한국전쟁(6·25전쟁) 직전의 5·30총선 당시 그를 지지한 당선자는 210명 중에서 약 60명이었다. 이런 여소야대 국면에 압박을 느낀 그가 국회를 견제하고자 내놓은 것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양원제 개헌이다.
1948년 헌법 제53조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이승만의 직선제 추진은 이 권능을 국회로부터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원제 추진 역시 동일한 의도의 산물이다. 국회가 상하 양원의 둘이 되면 국회가 강해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지만, 이승만은 후자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 전쟁 중인 1951년 11월 30일, 직선제 및 양원제를 담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다음달 7일 자 <동아일보> 1면 해설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개헌 제안서에서 거야의 횡포를 개헌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양원제를 실시하면 "다수당의 전제적 경향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제1당 지위를 한 군데가 아닌 두 군데서 유지하자면 대통령을 견제할 여력이 떨어지리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는 양원제하에서는 상원과 하원 간의 견제가 생긴다는 점도 거론했다. 의회와 정부의 충돌도 완화되리라고 기대했다. 양원이 상호 견제하다 보면 대정부 투쟁력이 약해지리라고 봤던 것이다.
10개월 전인 2월 9일, 이승만은 부산임시수도 대통령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그는 정부 기구 간소화를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입법부를 늘려 둘로 나눠야 한다는 말을 했다.
다음날 <조선일보> 톱기사에 정리된 질의응답 요지에 따르면, 그는 "상하원 제도는 절대 찬성이며 하로바삐 양원제 되기를 바란다"며 "나로셔도 이번 환도하여 위선(爲先) 북한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상하 양원제를 확립한 다음 대통령직선제 선거를 하도록 하면 할 일을 다(뒷부분 판독 불가)"라고 말했다. 서울로 환도하면 우선 북한 지역 총선거와 더불어 양원제부터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국회를 둘로 나눈 다음에 직선제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의회 권력을 분산시키는 게 그에게 얼마나 시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양원제 및 직선제 개헌'을 내세우는 이승만에게 맞서 민주국민당(민국당)을 비롯한 야권은 '단원제 및 의원내각제 개헌' 카드로 맞대응했다. 이런 대결구도하에서 정상적으로 자기 의견을 관철하기 힘들었던 이승만은 자기 쪽 개헌안에서 '직선제'를, 상대방 개헌안에서 '단원제'를 임의로 발췌해 1952년의 직선제 개헌을 불법적 비상계엄하에서 강행했다(발췌개헌).
양원제로 국회를 약화시킨다는 이승만의 목표는 1952년 개헌에는 반영되지 못했지만 1954년 개헌에는 반영됐다. 3선 개헌을 강행할 만큼의 권력이 생기자 양원제 개헌을 끝내 관철시킨 것이다. 위 <동아일보> 해설 기사는 양원제와 직선제를 "팔십 노령의 대통령 이 박사의 숙원"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숙원이 1954년에 가서야 헌법에 다 담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헌법 조문에만 반영됐을 뿐 실제로 양원이 다 설치된 것은 아니다. 하원인 민의원과 달리 참의원은 구성되지 못했다. 국회 권력을 분산시키겠다는 의욕에 매몰된 나머지 상원 구성의 현실성을 도외시했던 결과다.
제왕적 국회? 윤 정권 실패 원인은 여의도 아닌 용산에 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 심판 7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1960년에 자유당과 허정 권한대행체제는 최소한의 기득권이라도 지켜낼 목적으로 '선 개헌, 후 총선'을 밀어붙였다. 자유당이 다수 의석을 유지한 상태에서 새로운 헌법질서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구도 속에서 이승만의 '숙원'인 양원제가 4·19 직후의 개헌 과정에서 살아남아 그해 7·29 총선 때 참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하지만 이듬해 5·16 쿠데타와 함께 양원제는 무대 뒤로 내려갔다.
양원제가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한 것은 제도의 현실성 여하를 떠나 그것이 이승만의 급박한 정치적 필요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무능과 불법을 감추고자 국회를 탓하고 국회 견제에 치중한 이승만 집권기의 산물이었다.
이승만 때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가장 큰 국가권력상의 문제는 국회가 아닌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상태에서 올바른 대통령을 뽑지 못한 것이 지금 사태를 낳았다. 직무정지 상태에서도 군병력을 동원해 관저를 사수하는 모습은 제왕적 권력의 진원지가 용산인지 여의도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탄핵 및 처벌과 대통령제 개선에 집중하지 못하고, 제왕적 국회를 운운하며 국회를 탓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것은 국회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상원이 제때 구성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것은 전제적 대통령을 앞세운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조리에 일차적으로 기인한다. 이승만 정권은 그 원인을 경무대가 아닌 국회에서 찾다가 무너졌다. 윤석열 정권의 국정 실패 원인도 여의도보다는 용산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국민의힘의 시선은 용산을 공경하는 시선이 아니라 냉철히 직시하는 시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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