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회,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용균재단, 직장갑질119 등 55개 단체가 모여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출범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
유성호
2월 4일은 고 이재학 PD가 돌아가신 지 5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14년간 청주방송에서 일한 베테랑 PD 이재학은 방송 건마다 임금을 받는 '건당노동자'였습니다. 그가 받은 월급은 160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함께 방송을 만드는 조연출, 방송작가, 촬영 스태프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재학PD가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청주방송에 요구했다가 해고당했습니다.
이재학 PD는 포기하지 않고 부당해고를 다투기 위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방송을 만들다 간이침대에서 눈을 붙이곤 해 '라꾸라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회사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그에게 법원이 근로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재학 PD가 청주방송국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했고 절망한 이재학 PD는 2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 "눈 뜨는 게 괴롭고 힘들다.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이후 이재학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2심에서 근로자지위를 확인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사측이 위증한 것이 드러나 관련자가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방송국의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직접 만난 비정규직 방송 노동자들만 해도 수십명입니다. 최저임금 문제를 다룬 1분 30초 뉴스를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노동자가 만듭니다. 그의 카메라에 방송국 로고는 없었지만 그가 만든 영상에는 방송국 로고가 새겨졌습니다. 인터뷰를 했는데 방송이 되지 않아 전화를 걸었더니 방송이 연기되어 자기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눈물을 흘리는 작가도 있었습니다. 비상계엄 등으로 프로그램이 연기되거나, 올림픽 등 대형 이벤트로 프로그램이 취소되면 비정규직 방송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노동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새벽시간까지 원고준비를 하는 방송작가와 촬영감독이 있었습니다. 이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은 적용이 안 되고 산업안전보건법도 일부만 적용됩니다. 방송국들이 비용을 이유로 업무를 외주화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입니다.
4 년전 이재학PD를 추모하면서 <경향신문>에 '엔딩크레디트(엔딩크레딧)의 죽음'이라는 추모칼럼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엔딩크레디트. 사람들이 영화관을 나가거나, TV채널을 돌리는 찰나의 순간에 그들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제 방송이 끝날 때까지 TV를 보더라도 이재학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얼굴과 그의 주장이 엔딩크레디트가 아니라 TV화면의 한가운데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바랐던 '노동자'라는 이름이 판결문과, 수많은 비정규직 언론종사자들 앞에 붙을 수 있기를 바란다. TV는 아니지만 신문의 한쪽에 '언론노동자 이재학'을 새기는 이유다."
불행히도 이재학 PD의 뒤에 기상캐스터 오요안나라는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더 이상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으려면 특고, 플랫폼,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의 권리를 법전에 새겨야 합니다. 당연히 법이 만들어진다고 곧바로 현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지난 2일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MBC, KBS, CBS, YTN, UBC, 국회방송 등 수많은 방송국의 아나운서·작가·PD들이 프리랜서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회사로 복직한 노동자는 CBS 아나운서 1명 뿐이라고 합니다.
오요안나씨의 죽음 이후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가 개인이 아니라 방송국과 정치로 흐르지 않는다면 이재학과 오요안나 뒤에 또 다른 이름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엔딩크레딧에서 방송노동자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함께 마음 모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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