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 소속 조사관들이 기무사앞에서 연좌농성하는 장면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지만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권우성
또 한희철에게 나쁜 이미지를 덧씌웠다. 12월 19일 자체보고서에서 "한희철은 10월 26일 휴가 차 집에 가서, 자신의 의식화 활동으로 모친이 가출하고 동생이 정신질환을 앓게 된 것을 알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라고 적었다. 가정 문제로 자살했다는 뉘앙스를 담으려 한 것이다. 한희철의 어머니는 입주 가정부를 하느라 집을 비웠고 동생의 투병은 이미 입대 전부터 있던 일이니 모두 거짓이었다.
그 후로도 보안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1988년에 구성된 '5공비리특별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자료 제출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2000년 출범한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문 사실의 은폐에는 헌병대도 한몫했다. 헌병대 수사 책임자인 유영채 중령은 수사관 손영적 중사가 "보안사에서 귀대한 다음 날 사망했는데 한희철의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보안사에서 고문당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보안사의 위상을 고려해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노골적으로 보안사의 만행을 은폐한 셈이다. 5사단 헌병대는 83년 이윤성 사망 사건 조사 때도 사망 시각을 조작해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보안사의 위세에 굽신거리기 바쁜 헌병대의 모습이었다.
서의남은 이런 진실을 가리고 보안사가 한희철을 따뜻하게 보살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한상훈은 서의남의 얘기에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면서도 흔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조사할 때 (내가 헌병대에서 수사해 본 경험에 비춰 보면) 통상 뺨 한두 대씩은 때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자, 서의남은 "보안사령부 수사관은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다. 만일 구타하면 제반 사실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어도 증거력이 미약하거나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일체의 고문이 없었다"고 다시 목소리를 세웠다.
서의남은 보안사에서 누구보다 학생운동에 대해 적대 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5사단에서 2기 심사장교를 한 석락희는 서의남이 심사장교를 교육할 때 학생운동은 의식화여부를 조사하는 데서 머무르면 안 되고 반드시 대공 혐의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그는 학생운동이 반정부차원을 넘어 북과 연계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서의남이 보안사의 수사관은 "대졸 이상의 학력자다"라고 말한 것은 심사장교 제도를 언급한 것이다. 보안사의 수사관은 주로 군무원이거나 부사관인데 이들이 특수학적변동자를 상대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사상을 개조'하고 '자신이 몸 담았던 조직과 선후배를 대상으로 간첩 행위'를 강요하려 해도 대학생이 학습한 내용과 논리를 이해하지 못해 성과가 시원찮았다.
보안사령부는 이 점을 넘어서기 위해 고시 합격자나 명문대 출신 학사장교를 심사장교로 선발해 3개월 정도 단기 교육을 시키고 '심사 및 프락치 강요공작사업'에 투입한다.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운용된 심사장교 제도는 많은 폐해를 낳았다. 실적을 압박당한 젊은 장교들이 고문에 앞장서거나 고문에 가담했다.
심사장교 중에는 해병대의 박정훈 대령만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하더라도 소극적으로 저항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보안사령부 업무에 대부분 충실히 따랐고 2025년 현재까지 전직 심사장교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양심 선언을 하거나 사과를 한 적은 없다. 물론 재직 시 한 행위로 처벌받은 경우도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한상훈은 자정이 가까울 무렵에야 서의남과 대화를 끝내고 영동호텔을 나왔다. 네온사인이 색색을 뽐내고 밤거리를 가르는 노랫소리가 요란했다. 취객의 비틀거리는 어깨가 한상훈의 몸과 엉킨다. 모셔다 드리겠다는 서의남의 말을 뒤로 하고 한상훈은 영동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폐결핵 때문에 나이 서른에 예편했을 때 막막했다. 퇴직금을 끌어모아 여수에 빵집을 냈으나 빚만 지고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이런저런 일을 했으나 돈은 멀리 있었다. 지금 하는 도장 파는 작업, 한 달 10만 원 벌이는 되려나. 보증금 백만 원에 6만 원을 내고 남의 가게 한 귀퉁이에 세들어서 한다. 일거리도 별로 없지만 눈이 아물거려 작업을 못 하고 한 시간씩이나 나아지길 기다리기 일쑤다. 셋째가 한국외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 80만 원을 구하지 못해 포기했다. 딸아이를 볼 낯이 없었다. 아내의 고생은 또 어떻고, 삯바느질에 가정부, 청소부까지. 말 그대로 애옥살이였다. 이런 집안에서 희철이가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장학금으로 입학했으니 큰 효도를 했다. 그런 아들이 억울하게 숨졌는데 보안사의 책임자를 만나 설득만 당했으니 바윗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듯하다.
한상훈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녀석과 지난해 가을 나눈 마지막 한 끼가 떠오른다. 부대 앞 중국집에서 아내가 준비한 찹쌀밥에 소고기지짐을 육개장을 곁들여 먹었다. 소주도 몇 잔 나눴다. 녀석과 단 한 번만이라도 아내가 잘하는, 미더덕 넣은 해물탕에 딸들의 웃음소리까지 곁들여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문으로 비껴 들어온 흐린 달빛이 한상훈의 손등에 쌓인다. 버스는 어둠을 물고 있는 안개비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넋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2024년 12월 11일 열한 시, 한희철의 누나 한영희와 동생들 그리고 서울대 동문과 성남 지역의 옛동지들이 마석 모란공원에 모였다. 한희철의 몸이 한탄강에 뿌려진 후 아쉬움이 컸다. 해마다 기일이 되어도 모일 곳이 없었다. 한희철을 사랑하는 이들이 뜻을 모아 7주기인 1990년 마석 모란공원의 특 3-1198자리에 조그만 묘소를 마련했다. 한탄강의 물과 흙을 담은 항아리를 관에 넣고 희철이의 혼을 부르는 안장식을 했다. 그 후 해마다 무덤 앞에 모여 "혁명가의 길을 철저히 걸어가려 한, 우리의 넋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한희철이 일기에 남겼던 다짐을 되새긴다.

▲한희철의 누님 한영희그는 부모님의 뜻을 이어 유족활동을 해 왔다
민병래
한영희는 이 41주기 추도식에서 유족 대표로서 인사말을 했다. 한상훈이 2006년에, 김인연이 2018년에 숨진 이후 그는 부모의 뒤를 이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나 추모연대에 나가 의문사진상규명운동, 민주화운동유공자법 제정운동 등에 참여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12월 3일에 벌어진 윤석열의 내란을 겪은지라 아직도 희철이의 싸움이 진행 중임을 절감했다. 보안사의 뒤를 이은 방첩사가 또다시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위기는 훈훈했다. 12월 5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한희철의 죽음에 관해 "공권력 즉 보안사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진실규명을 결정한 덕분이다. 2021년 7월 1일 진화위가 조사 개시를 결정한 날로부터 3년여가 흐른 데다가 윤석열 정권이 파쇼화 조짐을 보이자 한희철의 가족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더욱이 12월 3일 친위 쿠데타까지 일어나자 진실 규명이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진화위 결정이 선물처럼 다가온 까닭이다.
짧게 보면 3년여 시간이지만 1983년부터 따지면 41년 만에 이뤄진 결정이다. 한영희와 동생들은 부모님이 이 결정문을 함께 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어려서 중이염을 앓아 귀가 잘 안 들리는 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보청기를 썼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들리지가 않아 입 모양만 보고 대화를 나눴다. 그런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강했다. 5사단으로 달려갔고, 추모제를 챙기고, 이소선·배은심 여사와 함께 422일 동안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앞 천막 농성에 참여했다. 네 딸 가운데 하나뿐인 아들, 서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니 파출부를 하고 청소부를 한 모든 고생이 보상을 받았다. 부뚜막에 앉아 기도를 올린 세월은 얼마던가? 아들이 졸업만 하면 세 여동생의 앞날도 피어갈 거라고 기대했건만, 모든 꿈이 사라졌다. 그 아픔이 속병이 되고 울화가 되어 진화위의 이 좋은 결정을 못 보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보안사는 당신이 추모 자리에 나가서 한마디 할라치면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선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선배님 도와주십쇼"하고 매달렸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헌병대 예비역 소령'이라는 허울을 벗으려 했다. 화랑무공훈장도 소중하지만, 아들의 죽음과 바꿀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한희철의 동료가 전역하면 고문 사실을 증언 받으려 노력했다. 임성수의 진술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당신은 숨지기 전 "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썼고, 희철이는 내가 지킨 나라를 더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아들의 삶을 껴안았다.
당신들의 그런 노력으로 제1기 의문사위원회는 한희철의 죽음이 공권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부족함이 적지 않았다. 2024년 진화위 결정은 한영희가 2021년 입수한 보안사의 존안자료 등을 바탕으로 의문사위 결정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우선 프락치 활용 시도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보안사는 한희철에게 사상 전향은 물론 "귀 사령부 대공업무와 관련 협조 요구 시에 이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라는 서약서를 요구했다. 1983년 2월 4일 보안사가 작성한 '녹화침투공작업무시행지침'에 보면 한희철이 가입한 가톨릭 청년회와 서울 가톨릭 학생회관이 공격 목표로 선정되어 있었다. 진화위는 이 서약이 이들 단체에 대한 정보파악 및 파괴공작을 염두에 두고 한희철에게 강요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한희철의 부모가 진상규명 운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6년여 동안 사찰한 일지도 발견해 부당한 감시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고문에는 70~80cm의 곤봉 외에 철로 된 자가 쓰였고, 5일간 계속된 조사 기간 매일 2시간 이상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도 규명해 냈다.
▲2024년 12월 한희철 41주기 추도식이날 참가자들은 내란 주도 기관 방첩사를 해체하라고 외쳤다.
민병래
▲모란공원의 한희철 묘소1990년에 초혼 안장식을 했다.
민병래
한영희를 비롯해 한희철의 유족과 동지들은 진화위의 진실 규명을 반갑게 받아들이면서 걸음을 늦추지 않기로 했다. 보안사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국가 차원의 공식사과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날 모란공원의 41주기 추도식은 특별한 구호로 끝을 맺었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체포하라."
"내란 주도 방첩사를 해체하라."
<덧붙이는 글>
한희철의 누나 한영희는 2021년 8월 국가기록원을 통해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한희철에 관한 '존안자료'를 어렵게 입수했다. 한희철을 사찰하며 작성한 이 문서에는 그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누가 죽음에 관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특히 대공처 5과장 서의남이 1984년 3월 29일 작성한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 결과보고서'에는 보안사의 은폐 시도와 가족회유가 담겨 있다. 이 글은 이 <존안자료>와 진화위 결정문을 바탕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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