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5 12:25최종 업데이트 25.02.1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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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 1편 <사병이 자살했다고 군악대가 연주하고 조총까지?>(https://omn.kr/2c5rl)에서 이어집니다.

서의남은 한상훈에게 한희철의 또 다른 '범죄사실'을 알려주겠다며 "한희철은 서울대학교 가톨릭 청년회, 성남 수진동성당의 노동 청년회에서 대정부 투쟁 의식의 확산을 위해 움직였다, 이건 군법회의에 넘겨 높은 벌을 받아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한희철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해서 설득과 이해로 새 사람을 만들려고 했다, 윗분도 이를 받아들여 조사 후 훈방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보안사는 매우 자애로운 수사기관이고 자신 또한 사랑으로 병사를 돌보는 장교인 셈이다.


한희철이 천주교 신자가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다. 한상훈은 폐결핵으로 뜻하지 않게 젊은 시절 전역했고 치료를 받으면서 천주교에 마음을 의지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식은 모두 가톨릭 이름을 얻었으니, 세 딸은 테레사, 젬마, 세실리아이고 한희철은 귀리노다.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굳은 마음을 품었다. 한희철은 대학에 들어가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했다. 서울대 가톨릭학생회는 참여 의식이 높은 단체였다. 한희철은 여기서 실천활동에 눈을 뜬다. 그는 광주가 고립되었던 1980년 5월 26일 혼자 기차를 타고 광주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학살의 증언을 들었고 이를 동지들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노동 사제가 되어 청년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한 청년

철도고등학교 시절의 한희철가운데가 한희철이다한영희제공

한희철은 성남에서도 적극 활동했다. 그의 집은 성남에서 신흥동, 단대동 여러 곳을 거쳤는데 모두 '산1번지'였다. 한상훈이 전역 후 제대로 돈벌이를 못 한 탓이다. 한희철은 가난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군데군데 꿰맨 군용 점퍼를 늘 걸치고 다닌 그는 이웃을 돌아볼 수 있게 가난을 주셨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십자가를 경배하지 말고 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 청년이었다.

한희철은 1980년 겨울, 지역 청년 및 대학생과 함께 성남 YMCA 창립과정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 산하에 탄천 클럽을 조직하고 한문·국어·영어 등을 가르치는 생활야학도 열었다. 그는 1981년에 출범한 성남지역대학생연합(성대련)에도 참여하는데 성대련이 주최한 1982년의 제1회 여명예술제에서 '노동자의 삶과 눈물과 희망을 담은' 그리고 '나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다'라는 시를 발표했다. 그 자신이 청평역과 평내역의 역무원으로 근무했고 철도고 동문을 통해 노동자의 처지를 익히 아는지라 이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물론 성남경찰서 정보과는 한희철의 활동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한희철은 학생운동을 할 때 마음의 짐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한상훈은 한희철이 입대한 해인 1982년에 보낸 편지에서 "너가 민중의 아픔을 해소하는 자인 양 하기에 앞서 우리 가정의 아픔을 먼저 알아주어서 안 될 일이라도 있느냐고 묻고 싶다"며 자신의 바람을 적었다. 어머니 김인연 또한 추모글에서 "나는 다만 네가, 내 아들로서만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서만 머물러 주었으면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라고 가슴 속 갈망을 밝힌 적이 있었다.

한희철은 이같은 부모의 염원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결국 4학년 때인 1982년 6월 신체 검사를 받고 1982년 12월 1일 입대한다. 한희철은 이 무렵 '혁명가'로 살기보다 '사제'가 되어 '노동 사목'을 하겠다는 꿈을 세운다. 그런 마음을 1982년 8월 18일 일기에서 "역사에 나를 남기지 말고 민중과 하느님을 후세에 남기자"라고 표현했다. 9월 2일 일기에서는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꿈이 실현된 나라이다. 이 땅은 하느님 나라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한희철은 이런 청년이었다. 광주의 아픔을 끌어안았으며 야학을 통해 노동자에게 일깨움을 주었다. 노동 사제가 되어 청년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했다. 이게 무슨 죄가 되고 군법회의에 넘길 사안이란 말인가. 전두환의 호위부대인 보안사 간부의 거짓부렁이었을 뿐이다.

역무원으로 일하는 한희철. 그는 군대에 가기 전 평내역과 청평역의 역무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한영희 제공

보안사에서 혹독한 고문

한상훈은 본인이 참전용사라는 '원죄' 탓에 서의남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이 식은 갈비탕을 내가고 커피를 내왔으나 한상훈은 입에 맞지 않아 내려놓았다. 옆방에서는 술이 거나한지 노래 소리까지 들렸다. 한상훈은 서의남의 말에 고개를 옅게 끄덕이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질문이 있었다. 내 아들을 고문했는지에 대한 확인이었다. 아들이 고문이 괴로워 목숨을 끊었다면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서의남은 한상훈이 고문을 언급하자 옆에 있는 유준남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한희철을 수사한 심사 장교인데 고문할 것 같이 보이냐, 가톨릭 신자이고 영세를 받았다. 이런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 말을 믿는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한희철의 경우는 주민등록 용지를 구해달라는 자필 메모까지 있는데 왜 고문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서의남의 말은 과연 진실일까? 한희철은 보안사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성남YMCA 총무에게 전하는 글을 썼다. 보안사에서 고문 당하며 어쩔 수 없이 진술한 내용을 서둘러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료 사병에게 전달을 부탁한 편지에서 그는 "1980년 겨울 YMCA 회원 모집을 보고 들어가 이수열·손기영과 '노동의 역사'와 '근대 민족운동사'를 함께 읽었다, 수열이 기영이와 함께 샘터교양교실을 열어 노동자에게 국어 영어를 가르쳤다, 한편 성대련을 만들고 수진동성당에서 김명희·권해숙·김선희와 함께 가톨릭 노동 청년회 활동을 했다" 등을 진술했다며 잘 대처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자기로 인해 동지들이 고통 받을까 몹시 속을 끓였다. 한희철은 활동 내용만이 아니라 과거 행동을 뉘우친다는 반성문, 보안사에서 조사받은 사실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야 했다. 한희철은 이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하도 고통스러워 수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혀를 끊으려 했고 형광등의 덮개 유리를 빼서 목을 그으려고 시도했다.

한희철은 고문 당한 사실을 자대에 복귀했을 때 털어놓았다. 의문사위원회의 조사에 응한 동료 병사 김OO은 "한희철이 다시 조사받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죽을 뻔했고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라고 말했고 허리와 다리 부위의 멍든 상처를 보았다고 했다. 또 다른 병사 이OO은 사망하기 전날인 12월 10일 점심 식사 후에 한희철이 허리춤을 열어 고문자국을 보여 주며 "어머니 때문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자술서를 썼다는 얘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조사를 통해 의문사위원회는 보안사의 수사관이 한희철을 엎드려 뻗치게 하고 80cm 길이의 곤봉으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시커멓게 멍이 들 정도로 폭행했다고 밝혔다.

보안사는 한희철이 5일 동안 조사받은 직후 12월 12일의 2차 조사를 앞두고 사망한 지라 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은폐를 시도했다. 우선 205보안부대는 소속대의 대대장은 물론 5사단장 신우식에게까지 보안사의 연행 사실을 발설치 못하게 하고 한희철로부터 고문 사실을 들은 동료 병사에게도 입막음 조치를 했다.

부당한 명령 거부하지 않은 심사장교들

2004년 6월 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 소속 조사관들이 기무사앞에서 연좌농성하는 장면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지만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권우성

또 한희철에게 나쁜 이미지를 덧씌웠다. 12월 19일 자체보고서에서 "한희철은 10월 26일 휴가 차 집에 가서, 자신의 의식화 활동으로 모친이 가출하고 동생이 정신질환을 앓게 된 것을 알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라고 적었다. 가정 문제로 자살했다는 뉘앙스를 담으려 한 것이다. 한희철의 어머니는 입주 가정부를 하느라 집을 비웠고 동생의 투병은 이미 입대 전부터 있던 일이니 모두 거짓이었다.

그 후로도 보안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1988년에 구성된 '5공비리특별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자료 제출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2000년 출범한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문 사실의 은폐에는 헌병대도 한몫했다. 헌병대 수사 책임자인 유영채 중령은 수사관 손영적 중사가 "보안사에서 귀대한 다음 날 사망했는데 한희철의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보안사에서 고문당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보안사의 위상을 고려해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노골적으로 보안사의 만행을 은폐한 셈이다. 5사단 헌병대는 83년 이윤성 사망 사건 조사 때도 사망 시각을 조작해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보안사의 위세에 굽신거리기 바쁜 헌병대의 모습이었다.

서의남은 이런 진실을 가리고 보안사가 한희철을 따뜻하게 보살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한상훈은 서의남의 얘기에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면서도 흔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물었다. 조사할 때 (내가 헌병대에서 수사해 본 경험에 비춰 보면) 통상 뺨 한두 대씩은 때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자, 서의남은 "보안사령부 수사관은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다. 만일 구타하면 제반 사실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어도 증거력이 미약하거나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일체의 고문이 없었다"고 다시 목소리를 세웠다.

서의남은 보안사에서 누구보다 학생운동에 대해 적대 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5사단에서 2기 심사장교를 한 석락희는 서의남이 심사장교를 교육할 때 학생운동은 의식화여부를 조사하는 데서 머무르면 안 되고 반드시 대공 혐의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그는 학생운동이 반정부차원을 넘어 북과 연계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서의남이 보안사의 수사관은 "대졸 이상의 학력자다"라고 말한 것은 심사장교 제도를 언급한 것이다. 보안사의 수사관은 주로 군무원이거나 부사관인데 이들이 특수학적변동자를 상대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사상을 개조'하고 '자신이 몸 담았던 조직과 선후배를 대상으로 간첩 행위'를 강요하려 해도 대학생이 학습한 내용과 논리를 이해하지 못해 성과가 시원찮았다.

보안사령부는 이 점을 넘어서기 위해 고시 합격자나 명문대 출신 학사장교를 심사장교로 선발해 3개월 정도 단기 교육을 시키고 '심사 및 프락치 강요공작사업'에 투입한다.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운용된 심사장교 제도는 많은 폐해를 낳았다. 실적을 압박당한 젊은 장교들이 고문에 앞장서거나 고문에 가담했다.

심사장교 중에는 해병대의 박정훈 대령만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하더라도 소극적으로 저항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보안사령부 업무에 대부분 충실히 따랐고 2025년 현재까지 전직 심사장교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양심 선언을 하거나 사과를 한 적은 없다. 물론 재직 시 한 행위로 처벌받은 경우도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한상훈은 자정이 가까울 무렵에야 서의남과 대화를 끝내고 영동호텔을 나왔다. 네온사인이 색색을 뽐내고 밤거리를 가르는 노랫소리가 요란했다. 취객의 비틀거리는 어깨가 한상훈의 몸과 엉킨다. 모셔다 드리겠다는 서의남의 말을 뒤로 하고 한상훈은 영동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폐결핵 때문에 나이 서른에 예편했을 때 막막했다. 퇴직금을 끌어모아 여수에 빵집을 냈으나 빚만 지고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이런저런 일을 했으나 돈은 멀리 있었다. 지금 하는 도장 파는 작업, 한 달 10만 원 벌이는 되려나. 보증금 백만 원에 6만 원을 내고 남의 가게 한 귀퉁이에 세들어서 한다. 일거리도 별로 없지만 눈이 아물거려 작업을 못 하고 한 시간씩이나 나아지길 기다리기 일쑤다. 셋째가 한국외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 80만 원을 구하지 못해 포기했다. 딸아이를 볼 낯이 없었다. 아내의 고생은 또 어떻고, 삯바느질에 가정부, 청소부까지. 말 그대로 애옥살이였다. 이런 집안에서 희철이가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다 장학금으로 입학했으니 큰 효도를 했다. 그런 아들이 억울하게 숨졌는데 보안사의 책임자를 만나 설득만 당했으니 바윗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듯하다.

한상훈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녀석과 지난해 가을 나눈 마지막 한 끼가 떠오른다. 부대 앞 중국집에서 아내가 준비한 찹쌀밥에 소고기지짐을 육개장을 곁들여 먹었다. 소주도 몇 잔 나눴다. 녀석과 단 한 번만이라도 아내가 잘하는, 미더덕 넣은 해물탕에 딸들의 웃음소리까지 곁들여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문으로 비껴 들어온 흐린 달빛이 한상훈의 손등에 쌓인다. 버스는 어둠을 물고 있는 안개비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넋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2024년 12월 11일 열한 시, 한희철의 누나 한영희와 동생들 그리고 서울대 동문과 성남 지역의 옛동지들이 마석 모란공원에 모였다. 한희철의 몸이 한탄강에 뿌려진 후 아쉬움이 컸다. 해마다 기일이 되어도 모일 곳이 없었다. 한희철을 사랑하는 이들이 뜻을 모아 7주기인 1990년 마석 모란공원의 특 3-1198자리에 조그만 묘소를 마련했다. 한탄강의 물과 흙을 담은 항아리를 관에 넣고 희철이의 혼을 부르는 안장식을 했다. 그 후 해마다 무덤 앞에 모여 "혁명가의 길을 철저히 걸어가려 한, 우리의 넋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한희철이 일기에 남겼던 다짐을 되새긴다.

한희철의 누님 한영희그는 부모님의 뜻을 이어 유족활동을 해 왔다민병래

한영희는 이 41주기 추도식에서 유족 대표로서 인사말을 했다. 한상훈이 2006년에, 김인연이 2018년에 숨진 이후 그는 부모의 뒤를 이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나 추모연대에 나가 의문사진상규명운동, 민주화운동유공자법 제정운동 등에 참여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12월 3일에 벌어진 윤석열의 내란을 겪은지라 아직도 희철이의 싸움이 진행 중임을 절감했다. 보안사의 뒤를 이은 방첩사가 또다시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위기는 훈훈했다. 12월 5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한희철의 죽음에 관해 "공권력 즉 보안사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진실규명을 결정한 덕분이다. 2021년 7월 1일 진화위가 조사 개시를 결정한 날로부터 3년여가 흐른 데다가 윤석열 정권이 파쇼화 조짐을 보이자 한희철의 가족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더욱이 12월 3일 친위 쿠데타까지 일어나자 진실 규명이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진화위 결정이 선물처럼 다가온 까닭이다.

짧게 보면 3년여 시간이지만 1983년부터 따지면 41년 만에 이뤄진 결정이다. 한영희와 동생들은 부모님이 이 결정문을 함께 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어려서 중이염을 앓아 귀가 잘 안 들리는 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보청기를 썼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들리지가 않아 입 모양만 보고 대화를 나눴다. 그런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강했다. 5사단으로 달려갔고, 추모제를 챙기고, 이소선·배은심 여사와 함께 422일 동안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앞 천막 농성에 참여했다. 네 딸 가운데 하나뿐인 아들, 서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니 파출부를 하고 청소부를 한 모든 고생이 보상을 받았다. 부뚜막에 앉아 기도를 올린 세월은 얼마던가? 아들이 졸업만 하면 세 여동생의 앞날도 피어갈 거라고 기대했건만, 모든 꿈이 사라졌다. 그 아픔이 속병이 되고 울화가 되어 진화위의 이 좋은 결정을 못 보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보안사는 당신이 추모 자리에 나가서 한마디 할라치면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선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선배님 도와주십쇼"하고 매달렸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헌병대 예비역 소령'이라는 허울을 벗으려 했다. 화랑무공훈장도 소중하지만, 아들의 죽음과 바꿀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한희철의 동료가 전역하면 고문 사실을 증언 받으려 노력했다. 임성수의 진술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당신은 숨지기 전 "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썼고, 희철이는 내가 지킨 나라를 더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며 아들의 삶을 껴안았다.

당신들의 그런 노력으로 제1기 의문사위원회는 한희철의 죽음이 공권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부족함이 적지 않았다. 2024년 진화위 결정은 한영희가 2021년 입수한 보안사의 존안자료 등을 바탕으로 의문사위 결정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우선 프락치 활용 시도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보안사는 한희철에게 사상 전향은 물론 "귀 사령부 대공업무와 관련 협조 요구 시에 이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라는 서약서를 요구했다. 1983년 2월 4일 보안사가 작성한 '녹화침투공작업무시행지침'에 보면 한희철이 가입한 가톨릭 청년회와 서울 가톨릭 학생회관이 공격 목표로 선정되어 있었다. 진화위는 이 서약이 이들 단체에 대한 정보파악 및 파괴공작을 염두에 두고 한희철에게 강요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한희철의 부모가 진상규명 운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6년여 동안 사찰한 일지도 발견해 부당한 감시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고문에는 70~80cm의 곤봉 외에 철로 된 자가 쓰였고, 5일간 계속된 조사 기간 매일 2시간 이상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도 규명해 냈다.

2024년 12월 한희철 41주기 추도식이날 참가자들은 내란 주도 기관 방첩사를 해체하라고 외쳤다.민병래
모란공원의 한희철 묘소1990년에 초혼 안장식을 했다.민병래

한영희를 비롯해 한희철의 유족과 동지들은 진화위의 진실 규명을 반갑게 받아들이면서 걸음을 늦추지 않기로 했다. 보안사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국가 차원의 공식사과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날 모란공원의 41주기 추도식은 특별한 구호로 끝을 맺었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체포하라."
"내란 주도 방첩사를 해체하라."

<덧붙이는 글>

한희철의 누나 한영희는 2021년 8월 국가기록원을 통해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한희철에 관한 '존안자료'를 어렵게 입수했다. 한희철을 사찰하며 작성한 이 문서에는 그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누가 죽음에 관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특히 대공처 5과장 서의남이 1984년 3월 29일 작성한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 결과보고서'에는 보안사의 은폐 시도와 가족회유가 담겨 있다. 이 글은 이 <존안자료>와 진화위 결정문을 바탕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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