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철도고 친구 김영래의 집에서 찍은 사진. 한희철이 대학교 3학년 때인 81년 1월경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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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덮어두고 갔지만 제일 의문이 든 점은 총알이 남기고 간 상처다. 5사단 헌병대는 20일의 조사 끝에 12월 31일 "한희철이 한국 민주주의의 부진을 비관해 M16(총번:829704)를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키고 자동으로 세 발을 격발시켜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6·25 당시 본 많은 시신, 총알이 관통한 몸뚱이는 끔찍했다. 몸으로 파고든 탄환은 회전하면서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허벅지나 종아리를 파고 들면 살점이 덩어리 채 떨어져 나가고 뼈는 여러 조각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데 희철이는 수의로 덮여있기는 하나 M16이 연발로 뚫고 나간 몸치고는 너무 온전해 보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장례식에 군악대가 나와서 연주를 하고 조총까지 쏘았다. 일개 병졸, '자살했다'는 사병을 위해 그런 예우를 하다니? 장례식은 콩 볶듯이 밀어붙이고 화장터에서 신부님 축성도 기다리지 못하게끔 재촉했으면서.
한상훈이 유영채에게 보안사령부 면담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 5사단 헌병대를 나왔을 때는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었다. 꽃샘추위는 한겨울 된추위보다 살점을 더 아리게 한다. 서울대학교 대운동장에 세워진 게시판에서 합격자 명단에 희철이 이름이 있는 걸 발견하고 세상을 다 가진듯 했다. 아내와 손을 잡고 외쳤다. 고맙다, 고맙다고. 후회가 밀려온다. 아들 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고 겨울 강가에 흩뿌려 물고기 밥을 만들었으니, 어디 산비탈에라도 무덤을 썼으면 허전할 때 다녀오기라도 할 터인데 마음을 붙들어 맬 기둥이 없다.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그는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손으로 저으며 연천에서 상봉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공기가 버스를 가로막는다. 유리창을 때리는 진눈깨비 사이로 희철이의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위기감 느낀 보안사 중령
5사단 헌병대를 찾아간 날로부터 나흘 후인 1984년 3월 28일, 한상훈은 서울 강남에 있는 영동호텔(현 보코서울 강남호텔)에서 보안사 서의남 중령과 법무관 박준광 중령, 심사장교 유준남 중위를 만났다. 유영채의 안내로 한상훈이 삼청동에 있는 보안사를 방문하자, 서의남은 강남에 있는 영동호텔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서의남은 1982년부터 본격 시작된 '강제징집·프락치 강요공작'사업의 실무총책이었다. 전두환의 명을 받아 보안사의 박준병·최경조·서의남이 주도한 이 공작은 징집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운동가를 군대로 끌고 가고 녹화라는 미명아래 학생운동가에게 자신의 동료를 향해 간첩 활동을 하게끔 강요한 국가 차원의 범죄였다.
서의남은 유영채 중령으로부터 한상훈의 요구를 전달받고 위기감을 느꼈다. 1983년 12월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에서 가톨릭학생회가 한희철을 살려내라고 농성을 한 데 이어 새해 들어서는 제적 학생 140명이 기독교회관에 모여 '강제징집 철폐와 군 의문사 사건'의 진상 규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기에 더해 민주한국당의 김병오 의원이 국회에서 강제징집 후 숨진 6명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강제징집은 없으며 사망은 자살이나 안전사고다, 녹화사업은 일부의 오해다,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다"라고 해명하며 수습에 나섰으나 불씨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서의남은 이런 상황에서 한희철 문제가 떠오르면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서울대 담당 한준남 준위가 3월 24일 자로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한희철사망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분향소까지 설치된다고 하니 그로서는 어떻게든 한희철 문제를 매듭지어야만 했다.
서의남은 박준병 사령관과 최경조 대공처장에게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계획'이라는 문서를 작성 결재를 받았다. 이날 자리는 이 계획에 따른 것이고 서의남은 영동호텔에 27,500원의 임대료를 주고 방까지 빌려두었다. 한희철이 헌병대의 발표처럼 단순 자살이었다면 보안사와 서의남이 이렇게 황망하게 나왔을 리가 없을 터였다.

▲서의남이 작성한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결과 보고서. 서의남은 치밀하게 한상훈 부를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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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 용지 훔치려 한 중범죄자?
서의남은 영동호텔에 도착하자 갈비탕을 주문하고 입을 떼어 "한희철은 정기휴가 중이던 1983년 11월 9일 도피 중인 신재근을 만나 그를 돕고자 주민등록증 용지를 구하려고 시도했다, 당 사령부에서 이를 파악하고 1983년 12월 5일 한희철을 임의동행했다, 한희철의 안전을 고려해 소속대에는 우리 사령부가 '차트작성' 때문에 임시 차출한다라고 말했다"라고 했다. 서의남은 또 "최근 북괴가 주민등록증 용지 입수에 혈안이 되어 주민등록증 절취자는 일반 절도범과 다르게 취급치 않을 수 없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한상훈은 갈비탕을 몇 숟가락 뜨다 말고 서의남의 설명을 묵묵히 들었다.
한희철과 신재근은 성남지역대학생연합(성대련)에서 만난 사이다. 신재근은 한국외대 불어과 학생으로 1983년 10월 29일의 학내 시위를 주도해 수배 중이었다. 1983년 가을, 전두환 정권은 주민등록증 갱신 작업을 추진했다. 주영복 내무장관은 1983년 10월 18일에 낸 담화문에서 불순분자들이 교묘한 수법으로 주민등록증을 위·변조하는 일이 있어 이에 대한 대응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업이 광주민중항쟁과 학생운동으로 수배된 사람을 겨냥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한희철은 정기휴가 마지막 날, 신재근의 사정을 듣고 돕고 싶었다. 그는 성남의 수진동 성당 가톨릭청년회에서 알고 지내던 전봉일을 떠올렸다. 한희철은 전봉일이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상대원 2동 동사무소를 찾아갔으나 만나지를 못했다. 다음 날 귀대를 해야 하는 처지라 한희철은 전봉일에게 주민등록증 용지를 몇 장 구해달라는 메모를 써서 이를 신재근에게 건넸다. 공교롭게도 신재근이 11월 16일 보안사령부의 고병준에게 검거되면서 한희철의 메모를 빼앗기고 말았다.
한희철은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자대에 복귀해 근무하다가 12월 5일 보안사로 잡혀갔다. 그는 5사단을 담당하는 205보안부대를 거쳐 사령부의 과천분실로 연행되어 5일 동안 조사받았다. 한희철은 주민등록증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대와 성남지역의 학생운동 전반에 관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여기 수사책임자가 바로 서의남이 데리고 나온 유준남이었다.
2편 <보안사 이은 방첩사도 또... 희철이의 싸움은 진행 중>(https://omn.kr/2c5rs)
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한희철의 누나 한영희는 2021년 8월 국가기록원을 통해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한희철에 관한 '존안자료'를 어렵게 입수했다. 한희철을 사찰하며 작성한 이 문서에는 그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누가 죽음에 관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특히 대공처 5과장 서의남이 1984년 3월 29일 작성한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 결과보고서'에는 보안사의 은폐 시도와 가족 회유가 담겨 있다. 이 글은 이 <존안자료>와 진화위 결정문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2) 1928년생인 한상훈은 6·25 당시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에서 헌병 일등상사로 근무했고 8사단 16연대에서 현지 소위로 임관했다. 금성부근전투(속칭 돌고지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철도고등학교 교장이 이 사실을 알고 철도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강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한상훈은 임성수가 전역했을 때 영등포에서 그를 만난다. 이때 고문받은 증언을 받았고, 유서에 관해서도 보안사 관련 문구가 빠진 것을 확인받은 것으로 보인다.
3) 막내딸은 한애영 세실리아다. 당시 초등학생으로 사고가 일어난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서울대 합격 소식을 들은 날, 자신이 엿을 사서 벽에 합격 축하 글씨를 붙이고 기쁨을 나눴다고 회상한다.
4) 유준남은 한희철을 1983.12.5~9까지 보안사의 과천분실에서 수사한 심사장교이다. 그는 학사장교 1기로 임관하여 보병 제9사단, 30사단에서 1983.1.12.까지 복무한 이후 1983.1.14. 보안사령부 3처에서 2기 심사장교로 근무하였으며, 1993.2. 기무사령부 310부대에서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 진화위 결정문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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