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5 12:18최종 업데이트 25.02.1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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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한희철의 아버지 한상훈은 1984년 3월 24일 국군 제5사단 헌병대를 찾았다. 아들이 숨진 1983년 12월 11일로부터 백여 일이 지났으나 울분이 삭지 않았다. 슬픔도 가시지 않았다. 외아들로 소중하게 키운 녀석, 철도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에 들어간 자랑스러운 아들이 '자살했다'는 사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16일 후면 의가사제대가 예정되어 있지 않았는가? 그는 수사 책임자였던 유영채 중령을 만나 아들의 유서 원본을 달라고 요청하고 무언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 아침, 예비역 헌병대 소령인 한상훈은 성남시 단대 3동의 향군 모임에 참석 중이었다. 막내딸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집으로 군인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아들 희철이에게 무슨 사고가 생긴 걸까, 가슴이 철렁했다. 서둘러 그들이 타고 온 차에 올라탔으나 속 시원한 설명은 없었다. 가보시면 안다, 저희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만 했다. 연천군 청산면에 있는 5사단 본부부대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없다. 매운 눈발이 가시처럼 얼굴에 박혔던 느낌만은 선명하다.


사령부에 도착해 그들이 안내하는 영현실로 갈 때 심장은 쿵쿵대고 발은 허든거렸다. 아들은 이미 관속이었다. 수의를 입고 두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아무리 불러도 말이 없었다. 넋을 잃고 있는 한상훈에게 군은 '타이핑된 유서'를 내밀었다. 한상훈은 차마 펼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부대를 에워싼 겨울 산은 마음을 더 시리게 하고 바람은 음산한 울음으로 창문을 흔들어댔다. 아내에겐 아무 일이 없을 터이니 걱정말라고 했는데…

한상훈이 유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간부인 듯한 사람이 각서를 내밀며 서명을 요구했다. 아들이 '자살'한 데 대하여 "하등의 이의 없으며 차후 본 건으로 민·형사상 문제를 제기치 않을 것임을 서약하며 이에 각서를 제출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한상훈은 각서라는 말이 거슬렸으나 사인했다. 자신이 헌병대 소령으로 예편했기에 까마득한 후배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체를 부검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와 '사체 처리 위임장'까지 내밀고 오늘 안으로 장례식까지 치러야 한다는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아들 몸이 식은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헌병대의 조사는 시작도 안 했을 터인데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유서 하나 내밀고 서두른단 말인가, 엄마와 누이들도 없는 상황인데.

아들 추모제에서 들은 말에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

5사단이 한희철의 부에게 요구한 각서민형사상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한영희 제공
부검을 하지 않는다는 동의서를 군은 요구했다. 한희철의 부 한상훈은 사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영희제공

한상훈은 1979년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학생운동 쪽을 기웃거리고, 성남에서 성당 청년회니 야학이니 하면서 돌아다니기에 걱정이 많았다. 그는 억지로 아들을 멈춰 세워 군대로 밀어 넣었다. 후회스럽다. 아들의 맑은 눈망울이 "아버지" 하고 달려올 것 같은데 둘러보면 차가운 바람뿐이다.

한상훈은 눈물을 훔치며 그래도 군에서 하는 일이니 도와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6.25 전쟁 때 자신이 세운 공으로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지 않았는가? 언제나 나랏일에는 발 벗고 나선 몸이다. 그날 저녁 6시, 군이 친구들의 참석을 막은 가운데 한상훈은 5사단 보급대 영현실에서 열린 장례식에 앉혀졌다. 희철이 소속대의 대장, 병참대장, 헌병대장의 짐짓 엄숙한 표정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장례식 후 백일째 되는 날 홍제동성당에서 열린 희철이의 추모제에 한상훈은 내키지 않았으나 아들 친구들의 간청에 자리를 지키고 인사말도 했다. 그날 한상훈은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5사단에서 이미 1982년 7월에 연세대생 정성희가 주검이 되었고 1983년 5월에 성균관대생 이윤성이 변사체가 되었다는 말에 마음이 황망했다. 아들의 죽음을 곱씹을수록 의문이 커졌던 터인데…이날, 한상훈은 헌병대를 찾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

한상훈은 5사단 헌병대의 수사 책임자 유영채 중령을 만나자 우선 유서 원본을 달라고 요구했다. 희철이의 글씨가 맞는지 빠진 내용은 없는지를 확인해야 가슴 속 화가 풀릴 것 같았다. 유영채는 한상훈의 요구에 군의 규정이라 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서는 유품이나 마찬가지니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느냐며 간청도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희철은 같이 보초를 서던 임성수 일병에게 유서를 전달했는데 글 마지막에 "보안사에 뺏기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문장이 있었다. 군은 이 구절을 빼고 타이핑을 쳐 한상훈에게 건넸으니 보안사가 죽음에 관련되었음을 암시하는 이 문장을 감춘 것이다.

한상훈은 유영채가 단호히 거부하자 유서 원본은 포기하겠지만 보안사령부의 책임자는 만나야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제동 성당에서 친구들에게 들은 고문 사실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확인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는 청와대에도 진정할 터이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한탄강에 희철이의 유골을 뿌리고 나서 며칠 후 아내가 5사단을 찾아갔을 때 이미 희철이가 숨진 초소는 물청소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안내를 맡은 장교는 다른 병사들이 무서워해 핏자국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헌병대의 수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현장 보존은 아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상훈은 막막했다. 시신은 불태워지고 현장에서 증거가 사라졌으니 어찌 진실을 규명한단 말인가.

한희철의 철도고 친구 김영래의 집에서 찍은 사진. 한희철이 대학교 3학년 때인 81년 1월경 사진이다.한영희제공

그때는 덮어두고 갔지만 제일 의문이 든 점은 총알이 남기고 간 상처다. 5사단 헌병대는 20일의 조사 끝에 12월 31일 "한희철이 한국 민주주의의 부진을 비관해 M16(총번:829704)를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키고 자동으로 세 발을 격발시켜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6·25 당시 본 많은 시신, 총알이 관통한 몸뚱이는 끔찍했다. 몸으로 파고든 탄환은 회전하면서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허벅지나 종아리를 파고 들면 살점이 덩어리 채 떨어져 나가고 뼈는 여러 조각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데 희철이는 수의로 덮여있기는 하나 M16이 연발로 뚫고 나간 몸치고는 너무 온전해 보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장례식에 군악대가 나와서 연주를 하고 조총까지 쏘았다. 일개 병졸, '자살했다'는 사병을 위해 그런 예우를 하다니? 장례식은 콩 볶듯이 밀어붙이고 화장터에서 신부님 축성도 기다리지 못하게끔 재촉했으면서.

한상훈이 유영채에게 보안사령부 면담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 5사단 헌병대를 나왔을 때는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었다. 꽃샘추위는 한겨울 된추위보다 살점을 더 아리게 한다. 서울대학교 대운동장에 세워진 게시판에서 합격자 명단에 희철이 이름이 있는 걸 발견하고 세상을 다 가진듯 했다. 아내와 손을 잡고 외쳤다. 고맙다, 고맙다고. 후회가 밀려온다. 아들 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고 겨울 강가에 흩뿌려 물고기 밥을 만들었으니, 어디 산비탈에라도 무덤을 썼으면 허전할 때 다녀오기라도 할 터인데 마음을 붙들어 맬 기둥이 없다.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그는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손으로 저으며 연천에서 상봉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공기가 버스를 가로막는다. 유리창을 때리는 진눈깨비 사이로 희철이의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위기감 느낀 보안사 중령

5사단 헌병대를 찾아간 날로부터 나흘 후인 1984년 3월 28일, 한상훈은 서울 강남에 있는 영동호텔(현 보코서울 강남호텔)에서 보안사 서의남 중령과 법무관 박준광 중령, 심사장교 유준남 중위를 만났다. 유영채의 안내로 한상훈이 삼청동에 있는 보안사를 방문하자, 서의남은 강남에 있는 영동호텔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서의남은 1982년부터 본격 시작된 '강제징집·프락치 강요공작'사업의 실무총책이었다. 전두환의 명을 받아 보안사의 박준병·최경조·서의남이 주도한 이 공작은 징집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운동가를 군대로 끌고 가고 녹화라는 미명아래 학생운동가에게 자신의 동료를 향해 간첩 활동을 하게끔 강요한 국가 차원의 범죄였다.

서의남은 유영채 중령으로부터 한상훈의 요구를 전달받고 위기감을 느꼈다. 1983년 12월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에서 가톨릭학생회가 한희철을 살려내라고 농성을 한 데 이어 새해 들어서는 제적 학생 140명이 기독교회관에 모여 '강제징집 철폐와 군 의문사 사건'의 진상 규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기에 더해 민주한국당의 김병오 의원이 국회에서 강제징집 후 숨진 6명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강제징집은 없으며 사망은 자살이나 안전사고다, 녹화사업은 일부의 오해다,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다"라고 해명하며 수습에 나섰으나 불씨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서의남은 이런 상황에서 한희철 문제가 떠오르면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서울대 담당 한준남 준위가 3월 24일 자로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한희철사망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분향소까지 설치된다고 하니 그로서는 어떻게든 한희철 문제를 매듭지어야만 했다.

서의남은 박준병 사령관과 최경조 대공처장에게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계획'이라는 문서를 작성 결재를 받았다. 이날 자리는 이 계획에 따른 것이고 서의남은 영동호텔에 27,500원의 임대료를 주고 방까지 빌려두었다. 한희철이 헌병대의 발표처럼 단순 자살이었다면 보안사와 서의남이 이렇게 황망하게 나왔을 리가 없을 터였다.

서의남이 작성한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결과 보고서. 서의남은 치밀하게 한상훈 부를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한영희제공

주민등록증 용지 훔치려 한 중범죄자?

서의남은 영동호텔에 도착하자 갈비탕을 주문하고 입을 떼어 "한희철은 정기휴가 중이던 1983년 11월 9일 도피 중인 신재근을 만나 그를 돕고자 주민등록증 용지를 구하려고 시도했다, 당 사령부에서 이를 파악하고 1983년 12월 5일 한희철을 임의동행했다, 한희철의 안전을 고려해 소속대에는 우리 사령부가 '차트작성' 때문에 임시 차출한다라고 말했다"라고 했다. 서의남은 또 "최근 북괴가 주민등록증 용지 입수에 혈안이 되어 주민등록증 절취자는 일반 절도범과 다르게 취급치 않을 수 없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한상훈은 갈비탕을 몇 숟가락 뜨다 말고 서의남의 설명을 묵묵히 들었다.

한희철과 신재근은 성남지역대학생연합(성대련)에서 만난 사이다. 신재근은 한국외대 불어과 학생으로 1983년 10월 29일의 학내 시위를 주도해 수배 중이었다. 1983년 가을, 전두환 정권은 주민등록증 갱신 작업을 추진했다. 주영복 내무장관은 1983년 10월 18일에 낸 담화문에서 불순분자들이 교묘한 수법으로 주민등록증을 위·변조하는 일이 있어 이에 대한 대응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업이 광주민중항쟁과 학생운동으로 수배된 사람을 겨냥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한희철은 정기휴가 마지막 날, 신재근의 사정을 듣고 돕고 싶었다. 그는 성남의 수진동 성당 가톨릭청년회에서 알고 지내던 전봉일을 떠올렸다. 한희철은 전봉일이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상대원 2동 동사무소를 찾아갔으나 만나지를 못했다. 다음 날 귀대를 해야 하는 처지라 한희철은 전봉일에게 주민등록증 용지를 몇 장 구해달라는 메모를 써서 이를 신재근에게 건넸다. 공교롭게도 신재근이 11월 16일 보안사령부의 고병준에게 검거되면서 한희철의 메모를 빼앗기고 말았다.

한희철은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자대에 복귀해 근무하다가 12월 5일 보안사로 잡혀갔다. 그는 5사단을 담당하는 205보안부대를 거쳐 사령부의 과천분실로 연행되어 5일 동안 조사받았다. 한희철은 주민등록증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대와 성남지역의 학생운동 전반에 관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여기 수사책임자가 바로 서의남이 데리고 나온 유준남이었다.

2편 <보안사 이은 방첩사도 또... 희철이의 싸움은 진행 중>(https://omn.kr/2c5rs)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한희철의 누나 한영희는 2021년 8월 국가기록원을 통해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한희철에 관한 '존안자료'를 어렵게 입수했다. 한희철을 사찰하며 작성한 이 문서에는 그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누가 죽음에 관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특히 대공처 5과장 서의남이 1984년 3월 29일 작성한 '한희철 부 한상훈 설득 결과보고서'에는 보안사의 은폐 시도와 가족 회유가 담겨 있다. 이 글은 이 <존안자료>와 진화위 결정문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2) 1928년생인 한상훈은 6·25 당시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에서 헌병 일등상사로 근무했고 8사단 16연대에서 현지 소위로 임관했다. 금성부근전투(속칭 돌고지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철도고등학교 교장이 이 사실을 알고 철도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강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한상훈은 임성수가 전역했을 때 영등포에서 그를 만난다. 이때 고문받은 증언을 받았고, 유서에 관해서도 보안사 관련 문구가 빠진 것을 확인받은 것으로 보인다.

3) 막내딸은 한애영 세실리아다. 당시 초등학생으로 사고가 일어난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서울대 합격 소식을 들은 날, 자신이 엿을 사서 벽에 합격 축하 글씨를 붙이고 기쁨을 나눴다고 회상한다.

4) 유준남은 한희철을 1983.12.5~9까지 보안사의 과천분실에서 수사한 심사장교이다. 그는 학사장교 1기로 임관하여 보병 제9사단, 30사단에서 1983.1.12.까지 복무한 이후 1983.1.14. 보안사령부 3처에서 2기 심사장교로 근무하였으며, 1993.2. 기무사령부 310부대에서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 진화위 결정문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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