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0일 워싱턴 DC의 캐피털 원 아레나에서 열린 첫 퍼레이드에 도착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 AFP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태롭다는 점은 2021년 1월 6일의 의사당 폭동에 책임이 있는 트럼프가 별 타격도 받지 않고 백악관에 재입성한 데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듬해 7월 21일 로이터통신이 보도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 당원들의 40%가 폭동 사태에 대한 트럼프의 책임을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공화당 지지자들이 트럼프를 또다시 찍었다는 것은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감수성이 낮아졌음을 반영한다.
트럼프 진영에서 3선 개헌이 운운되는 것도 위기의 징표다. 작년 11월 13일자
<뉴욕타임스> '트럼프, 승리감에 넘치는 하원 공화당 의원들 만나 세 번째 임기에 관해 농담하다'에 따르면, 그날 트럼프는 공화당 의원들이 자신의 3선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발언했다. 참석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미국 시각으로 지난달 23일 <폭스뉴스>는 트럼프의 측근인 앤디 오글스 하원 공화당 의원이 개헌 결의안을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결의안의 핵심은 '대통령직을 세 번 연임하는 것'과 '1차례 연임한 뒤 3번째 당선되는 것'을 금하자는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2년·1936년·1940년·1944년 대선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위 결의안은 이런 연속 당선을 금지한다. 버락 오바마 등은 1차례 연임으로 8년간 집권했다. 이런 대통령이 3번째 출마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위 결의안이다.
그런데 결의안에 따르면, 트럼프는 아직 연임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대선에 이어 2028년 대선에서 연속으로 당선돼야 더 이상 출마할 수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말이 된다. 말장난 같은 이런 유치한 제안이 나온 것은 미국 민주주의도 딱한 사정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앤디 오글스 의원의 개헌 결의안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이틀 뒤인 1월 25일 트럼프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집회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은 내 생애 최대 영광"이라며 "한번이 아니라 두 번, 또는 세 번이나 네 번"이라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가짜뉴스를 위한 헤드라인"이었다며 "두 번이 될 것"이라고 봉합했다.
지난달 28일자 <뉴욕타임스>
'안 된다, 트럼프는 2028년에 재선을 위해 또다시 나설 수 없다'에 따르면, 트럼프는 1월 26일로 시작하는 취임 2주차를 맞아 플로리다에서 열린 공화당 하원의원 연례회동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다시 출마하도록 허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네요"라고 한 뒤 "내가 다시 출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이쯤 되면 농담이라 보기도 어렵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스스로 3연임을 포기한 이래로 미국에서는 2회 취임이 헌법 관행이 됐다. 제임스 먼로 대통령(재임 1817~1825) 때인 1824년에 3선 금지를 성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중단됐다.
하지만 루스벨트를 경험한 뒤에는 미국인들이 생각이 달라졌다. 1951년 2월 27일 비준된 수정헌법 제22조는 2회까지만 대통령에 선출될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연임이건 아니건 3선을 금하는 규정이다.
이 조항이 잘 지켜진 것은 미국 민주주의를 그나마 지탱하는 힘이었다. 진담인 듯 농담인 듯하며 3선, 4선을 운운하는 트럼프 진영의 태도는 그들의 눈에 민주주의가 만만하게 비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언론은 이 상황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난달 31일 발행된 <폴리티코> 기사
'트럼프가 수정헌법 제22조에 관계없이 세 번째 임기를 낚아채는 방법'은 제22조를 거론하면서 "규범을 구부리고 법을 깨기로 악명 높은 트럼프일지라도 그처럼 명확한 헌법적 제약을 피할 수 없다? 맞을까?"라고 한 뒤 "너무 확신하지 말라"라고 경고한다.
이 기사는 트럼프가 3선 도전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적어도 네 개라고 지적한다. 하나는 제22조를 폐지하는 것, 또 하나는 2028년 대선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뒤 곧바로 대통령직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유약한 대법원이 제지하지 않을 것에 내기를 걸고 트럼프가 그냥 한 번 더 출마해 보는 것, 마지막은 2029년 1월에 퇴임을 거부하며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을 종식시키는 것이라고 위 기사는 예측한다.
위협받는 세계의 민주주의

▲2021년 1월, 미국 워싱턴DC 연방 의회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상원 본회의장 밖 복도에서 의회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상·하원은 이날 합동회의를 개최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를 인증할 예정이었으나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하는 초유의 사태로 회의가 6시간 중단됐다가 재개됐다.
AP=연합뉴스
예전 같으면 이런 시나리오를 기사에 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필자 자신의 인식 수준을 떨어트리는 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기사가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에 실렸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정도로 미국 사회가 정상 궤도를 이탈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규범을 깬 선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루스벨트 역시 관습헌법을 깨고 4선에 성공했다. 연임을 제한하는 성문헌법 규정은 없었지만, 3선을 금하는 불문헌법이 근 150년간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공황의 여진과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자연스럽게 네 번 연속 재임했다. 3선을 금하는 성문규정이 없는 빈틈을 타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불문헌법 파괴였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갈 때 열린 1940년 7월 15일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루스벨트는 3선에 나설 생각이 없음을 표명했다. 그러나 특별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그대로 출마를 단행했다. 미국 역사저술가 조셉 커민스의 <미국 대통령선거 이야기>는 루스벨트가 불출마 입장을 공식화하면서도 시카고시장을 통해 내밀한 준비를 진행한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당대회 의장이 대의원들에게 루스벨트가 후보 지명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읽어주자, 대의원들은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으로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이 모든 일은 켈리 시장이 사전에 준비한 비밀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그 다음날 저녁에 루스벨트는 단 한차례 투표를 거쳐 짐 팔리와 존 가너를 따돌리고 후보로 지명되었다."
요즘 김정은이나 시진핑, 푸틴 같은 스트롱맨들이 세계 정치의 대세라지만, 이는 이들의 역량이 특별히 강력하기 때문이기보다는 전통적 정치 시스템이나 기존의 민주주의 토대가 약해져 세계 민중의 정치적 지위가 취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SNS 등을 매개로 민중의 단결력은 고양됐지만, 이들의 경제력이 약해진 데다가 기술혁신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이로 인한 과도기 상황이 스트롱맨들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조건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비상계엄 형식을 빌린 윤석열의 내란도 이런 빈틈을 파고든 측면이 있다. 비상계엄 요건이 전혀 갖춰지지도 않았고, 박정희·전두환에 비해 준비도 치밀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적 민주주의의 모델이라는 미국마저 3선 개헌 파국에 빠지면, 세계 민주주의는 더욱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관세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역대급 위기가 전 지구를 뒤흔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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