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2월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기모노를 입은 참석자들이 도착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금년도 일왕 생일연은 19일 서울에서 일본대사관 주최로, 20일 부산에서 일본총영사관 주최로 열린다. 2월 23일생인 나루히토 일왕(천황)의 탄생을 경축하는 이 행사는 최근 들어 한국 국민들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2023년 2월 16일에는 서울 남산에서 개최된 생일연 때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한국·오키나와·대만·중국과 동남아·태평양을 침공할 때 곳곳에서 울려 퍼진 그 노래를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틀었다.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인 그달 16일 자 <산케이뉴스> 기사의 제목은 '특보: 기미가요를 처음 연주, 한국에서 천황 탄생일 리셉션'이었다. 일본 극우 매체가 볼 때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지난해 2월 14일 생일연 때도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한국 정부의 대일 굴욕외교가 2년 연속 기미가요 연주의 직접적 요인이다. 한국이 굴종적 태도를 보이자 일본은 일왕 생일연에서 기미가요를 틀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태형의 '일기장 투쟁'
일왕 생일은 1948년부터 천황탄생일로 불리고 있다. 그전에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간다(天長地久)"는 구절을 근거로 천장절로 불렸다. 식민지 한국에서 이 행사는 이 땅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벤트였다. 이는 일왕이 한국 땅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임을 전제로 하는 의식이었다.
그런 천장절에 재를 뿌린 한국인들이 있었다. 일회성 저항에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 수준으로 발전한 한국인들의 투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지만, 보훈부가 편찬한 <독립운동사>나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혹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 등에서 확인된다.
히로히토 일왕 때인 1940년에는 4월 29일이 천장절이었다. 천장절 거사인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 8주년인 이날, 천장절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대구상업학교 2학년 이태형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독립운동사> 제9권에 의하면, 급장(반장)인 그는 2학년 전체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했다. 이 학교 출신인 독립운동가 김상길(1926~2018)은 이태형을 "천하의 수재"로 기억했다(<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제2권).
이태형이 지나가는 길에는 향교가 있었고, 그 옆에 언덕이 있었다. 언덕에 올랐을 때, 그의 눈에 확 들어온 광경이 있다. "언덕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사방에 보이는 것은 일장기뿐"이었다. 순간 그는 울컥했다. "너무나 민족적 울분에 넘친 나머지 식장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위 책은 기술한다. 그날 저녁 그의 일기장에는 '이 땅은 우리 땅인데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디로 가 보이지 않고 왜 저 일장기만이 펄럭이며 휘날리고 있느냐'라는 내용이 적혔다.
대구상업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학생들의 일기장을 검열했다. 이태형은 그 일기장을 그대로 제출했다. 학교 당국은 그가 "천하의 수재"이자 급장인 점을 감안해주지 않았다. "학교 당국에 의해 사정없이 퇴학처분을 당했다"라고 <독립운동사>는 말한다. 일왕과 관련된 일이므로 학교 당국의 재량권이 적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은 "천하의 수재"를 직업적 항일투사로 만들었다. 그 뒤 계속해서 반일운동을 벌인 그는 결국 구속돼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위의 김상길은 17세 때인 1943년에 일제강점기판 국가보안법인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그는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제2권에서 자신이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이태형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우리도 태극기란 것이 있다. 우리도 깃발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이태형이 몰래 해주었다고 회고했다.
치안유지법에 걸려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된 같은 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상교(1923~2018)도 "아주 머리가 좋아"라며 이태형을 떠올렸다. 위 증언자료집 제1권에 따르면, 서상교는 "성적으로 말하면 최고로 100점"이라면서 "그런데 반장이야"라고 말했다. 학교 일에 바쁜 급장이면서도 성적이 우수했던 점을 높이 평가했던 모양이다.
서상교는 이태형이 일기장을 제출한 이후의 상황을 증언했다. 이에 따르면, 일기장을 읽어본 일본인 담임교사는 "지우고 다시 써라"라고 지시했다. 이태형은 "일기인데 내 마음대로 쓰지, 못 고친다"라고 버텼다. 이런 실랑이가 몇 번 있고 나서 대구상업학교는 "천하의 수재"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다이쇼(大正)란 연호로 잘 알려진 요시히토 일왕은 유구왕국(류큐왕국)이 일본에 강점(4.4)된 지 4개월 뒤인 1879년 8월 31일 출생했다. 그가 즉위한 날은 대한제국 강점 2년 뒤인 1912년 7월 30일이다. 그러므로 그 후로는 8월 31일이 천장절이어야 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철이라는 이유로 10월 31일로 바뀌었다. 이에 관한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대신의 포고문를 1913년 7월 16일자 일본제국 <관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 인용된 1913년 7월 16일자 일본제국 <관보>.
자료사진
일왕 비판하고 과자 던지고... 한국인들의 저항
3·1운동 당시의 일왕도 요시히토였다. 이듬해인 1920년의 천장절도 10월 31일이었다. 이날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사무소에서 거행된 민·관 합동 기념식의 분위기를 교란하는 주민이 있었다. 24세 된 김정식(金正植)이었다. 그해 12월 13일 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은 "(그가) 천장절 축일 요배식에 참석하여 최경례(最敬禮)를 하지 않고"라고 기술한다. 90도 각도로 절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념식이 끝난 뒤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축하 연회가 열렸다.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그냥 귀가해도 됐을 법한데, 김정식은 연회에도 참석해 '제2차 교란'에 착수했다. 그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인은 일본 천황폐하에 대해 경례할 필요가 없다"라고 소리 높여 말했다. 그 정도 배짱을 가진 인물이 '폐하'라는 경칭을 썼을지 의문이다. 판결문을 작성하는 법원 서기가 문제의 소지를 없애고자 경칭을 집어넣었을 확률이 없지 않다.
일왕을 모욕하는 김정식의 투쟁은 그 뒤에도 두 차례 더 있었다. 1심 법원은 징역 2년을 선고했고, 경성복심법원은 항소를 기각하는 공소(控訴)기각을 통해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형량은 3년 이하다. 김정식이 받은 2년형은 높은 편이었다. 그가 단순히 삐딱하게 비치는 선에 그쳤다면 그 정도 형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 당국이 볼 때 항일운동 수준이었기에 그 정도 형량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태형이나 김정식 같은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만 천장절에 재를 뿌린 것은 아니다. 이런 분위기가 상당히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것이 1919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건이다. 금요일인 그해 10월 31일, 훗날 경기여고로 바뀔 경성여고보에서는 일왕을 모독하는 집단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북쪽에는 헌법재판소 등이 있고 그 남쪽에는 경운동 등이 있다. 1919년에는 경성여고보가 경운동에 있었다. <독립운동사> 제9권에 따르면, 그해 천장절 때에 이 학교 교실 창문이 모두 다 열렸다. 그런 뒤 창밖으로 수많은 과자가 던져졌다. 일왕이 '하사'한 과자였다. "기념 과자를 받고 일본의 독물이 들어 있다면서 모두 창밖으로 던진 일"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 과자를 먹는 것은 일왕의 백성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일왕과 일본 자본가들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수용한다는 표시였다. 그런 독극물을 먹지 않겠다며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모두 다 창밖으로 내던졌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상당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 천장절 거부 투쟁을 벌였다. 이를 통해 일왕의 지배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가 한국인들에게 한층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그것이 천장절 행사를 맞받아치는 의거였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 한국에 '빈틈'이 생긴 것을 놓치지 않고 2023년과 2024년 일왕 생일연 때 한국에서 기미가요를 틀었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사들이 천장절을 활용해 일본에 재를 뿌릴 방법을 고민했듯이,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일본 정부는 자국 왕의 생일연을 활용해 한국에 파고들 방법을 항상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