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24 14:58최종 업데이트 25.02.2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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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 사태 이후, 시민들은 무너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두웠던 광장을 빛으로 채운 건 형형색색의 응원봉뿐이 아니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는 외침은 광장을 넘어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창간 25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합니다.[편집자말]
발길 가는 대로 걷다가 휙 들어간 런던 어떤 식당에서든 적어도 한두 개의 채식 메뉴를 만날 수 있었다.ferhadd on Unsplash

발리가 '채식 천국'이란 말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다. 낭패였다. 한국보다 훨씬 채식친화적이라 느껴졌지만 모든 식당이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비채식인과 함께 사는 채식인으로서, 채식인과 비채식인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식당이 흔한 나라를 꿈꾼다. '채식 천국'이란 말을 들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한때는 채식이 옳다고 생각했고 반려인의 식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장점과 단점으로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듯이 타인도 그러하니까. 그래서 나는 채식을 하는 나로 인해 집에서 만큼은 엄격한 채식을 하는, 그러나 주기적으로 닭다리를 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반려인을 재단하거나 바꾸려 들지 않는다.


이런 커플인지라, 어느 순간부터 여행 자금이 모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채식 천국'이라는 곳으로 향한다. 둘 다 먹는 즐거움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어떤 채식인에게는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내가 찾은 최선은 이 정도다.

그래서 발리 다음으로 향한 곳은 타이베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낭패였다. 어느 동네를 가든 채식식당이 많긴 했으나 모든 식당에서 채식 메뉴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당연한 게 아니냐고?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런던에서 경험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으니 장담할 수 없고 우리에게 기막힌 행운이 함께 한지도 모르지만, 발길 가는 대로 걷다가 휙 들어간 어떤 식당에서든 적어도 한두 개의 채식 메뉴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매번 감탄하며 그 음식들을 양껏 즐겼다. 그러니 아직까지 나에게 '채식 천국'은 런던이다.

'채식 천국'과 개식용종식법 사이에서

나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모국이 조금 더 낙원에 가까워지기를,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더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moigonz on Unsplash

하지만 과연 그 나라를 또 갈 일이 있을까. 소시민으로서 비용도, 시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나는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이 나의 낙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두가 지금 당장 채식을 하자는 게 아니다. 채식인도 회식 때마다 괜히 위축되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게, 보다 채식친화적인 나라가 되길 희망하는 것이다. 식당마다 한두 개의 채식 메뉴를 두고 영양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널리 알려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은 개인적인 희망사항이기도 하지만 오직 개인적인 바람만은 아니다. 과도한 육식과 공장식 축산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우리의 건강까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은 더이상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은 더이상 단백질 신화에 매여 있을 이유가 없다. 채식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건강도, 자연도 더 가까워진다.

같은 맥락에서, 2024년 2월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아래 개식용종식법)'이 제정되었을 때 쾌재를 불렀다. 이에 따르면 2027년부터 식용견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모든 동물이 학대 당하지 않기를 바라기에 그것이 명문화된다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법이 제정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김건희 여사로 꼽힌다는 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간 동물보호단체에서도 계속해 목소리를 높여왔고 역대 대통령도 같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으니 이는 한 사람의 소망이 아닌 시대적 흐름이었다고 확신하지만, 어쨌거나 이 법은 '김건희법'으로 자주 호명되며 대통령과 그 주변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시민을 '입틀막' 하며 비뚤어진 방식으로 힘을 과시하던 그 권력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막대한 권력을 자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계엄도 막는 시민의 더욱 막강한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캄캄한 밤, 한달음에 국회 앞으로 달려가고 이른바 '남태령 대첩'과 '한남동 키세스'의 주역이 된 시민들에게 나는 존경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의 내일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먹고 사는 문제, 즉 무엇을 먹는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지 역시 중차대한 문제가 분명하다. 나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모국이 조금 더 낙원에 가까워지기를,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더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다행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다채로운 채식 요리들을 자랑하는 나라다. 이미 지나간 정월대보름을 포함해 수많은 세시풍속이 대개 채식 요리들을 앞세운다. 아직은 소수자에 불과한 채식인의 입장을 조금 더 배려한다면, 영양과 환경에 대한 관점을 조금씩 바꾼다면, 한국이야말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채식 천국'이 될지 모른다. 몇몇 지자체의 구내식당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 1회 채식 식단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양 교육도, 그 낙원으로 가기 위한 한 걸음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후위기라는 시대적 과제를 읽고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권력자와 우리의 일상이 곧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것에 동의하는 시민의 힘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며 원전 확대를 고집하고 시민의 인권을 우습게 여기는 권력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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