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8 19:32최종 업데이트 25.02.0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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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범학교 학생들은 식민 당국의 우대를 받는 듯하면서도 실은 압박을 많이 받았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한국인들의 의식을 개조할 미래의 역군들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그들을 확실한 일본 편으로 개조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이 길러낸 모범적인 사범학생은 박정희다. 20세 때인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생활하던 그는 연령 초과로 입학할 수 없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을 긋고 "한 목숨 바쳐 나라를 받들겠습니다.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썼다.


고통을 꾹 참고 혈서를 완성해 일본인들을 감동시킨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에 더해 일본 육사까지 졸업하고 일제 장교로 부역했다. 5·16 쿠데타 뒤에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체결해 일본이 사과·배상 없이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만들었다. 일본이 길러낸 최고의 사범학생이었다.

박정희 같은 '인재'들을 대거 양산할 목적으로 일본은 사범학교에 공을 들였다. 일본인다운 교사를 만들고자 정신 훈육을 중시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에게 일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양상이 일반 학교에서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났다.

2017년도 <교육사학연구> 제27집 제1호에 게재된 안홍선 동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사범학교제도의 식민지적 성격'은 "교과 지식과 교수 방법론을 체득한 유능한 교원을 양성하고자 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주의 교육관과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고도로 의식화되고 조밀하게 배치된 각종 학교 의례와 규율이 훈육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뒤 경성사범학교를 예시하면서, '황도(皇道의 체현'을 표방한 이 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이 "황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 받들 것"을 맹세하는 의식과 더불어, 재학생들이 매주 조회 때마다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등의 의식이 거행됐다고 설명한다. 품위와 권위를 갖춘 교사를 양성하고자 했다면 이런 의식을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학교보다 더한 유사종교적 방식으로 일왕의 신하를 양성하는 곳이 일제 사범학교였다.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

과거 춘천사범대학이었던 춘천교육대학교 전경위키미디어 공용

이런 사범학교 정책에 가장 격렬히 대항한 이들 중에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이 있다. 박정희의 혈서가 <만주신문>에 보도된 다음 날인 1939년 4월 1일 개교한 이 학교의 서은수·강용석·이성득·박형원·김영진·박동원 등이 그 대열에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대항하는 것을 넘어서, 일제의 의도를 짓밟고 조롱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일제의 일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서은수 등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다. 하지만 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에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의 투쟁은 일제 당국이 씌어주는 전투모를 걷어치우는 것으로부터 본격화됐다.

춘천사범학교의 후신인 춘천교육대학에 재직한 적이 있는 우사 조동걸(1937~2017)은 <강원 역사의 다양성>이란 저서에서 "일제가 식민교육을 집약적으로 부과한 곳이 사범학교였다"라고 평한다. 그런 뒤 "식민교육의 역군을 양성한다는 의미에서 일반 학교와 외형부터 달리하여 전시용 복장을 강요"했다고 기술한다.

전투모 거부운동은 1940년 신학기 초에 일어났다. "2학년 서은수 등이 주동하여 수업 거부로 항거"했다고 위 책은 말한다. 전투모를 쓰고는 수업을 받지 않겠다며 항거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서은수 외 2명의 퇴학처분"으로 종결됐다.

1기생 서은수 등은 쫓겨났지만, 이들이 닦은 항일 풍토는 계속 유지됐다. 소방 및 치안 활동을 표방하지만 실은 친일단체였던 경방단과의 투쟁으로도 항일정신이 표출됐다. "1941년 가을의 일인데, 당시 친일단체였던 경방단의 단장과 학생 간에 마찰이 생겨 당시 3학년생이 집단으로 경방단을 습격한 일이 발생했다"라고 위 책은 설명한다. 이 때문에 "경찰이 기숙사(지금 시청 자리)를 포위하고, 한편 조양동 앞에는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다"라고 한다.

투쟁을 주도한 학생들은 1기생 강용석 등이다. 이 사건은 강용석을 비롯한 5명이 퇴학당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경방단 및 경찰과 공방전을 벌인 사실은 훨씬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서은수 사례 때 그랬듯이, 몇 명만 징계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는 한국인 세뇌교육을 담당할 교사 인력이 부족했던 것과도 관련된다. 위 안홍선 논문은 "급증하는 교원 수요에 대처하지 못하였고, 부족한 교원은 단기 양성 과정이나 일본으로부터의 유입에 의존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교원 양성이 시급했던 일제 당국이 화를 꾹 참고 사태를 봉합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1기생들은 졸업이 임박한 시점에도 기습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번에는 이성득 등이 주도했다. 위 <학생독립운동사>는 "앨범 편집위원이던 이성득·안학수·신철균 등은 공식적인 앨범과 비공식적인 앨범 두 가지를 만들었다"라며 "비공식 앨범에는 국사봉과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라고 기술한다.

일왕 숭배인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시절에 이와 배치되는 신앙을 반영하는 국사봉을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비공식 앨범을 진짜 졸업앨범으로 간직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앞의 두 경우와 달리 이때는 탄압이 심했다. 주동자는 퇴학 이상의 탄압을 받았다. 조동걸 교수는 "이성득은 무참한 고문과 학대를 받아 졸업 후 황해도로 쫓겨갔다"라고 기술한다.

이 학교의 투쟁에서는 조직적 양상도 나타났다. 1944년부터는 김화·철원·춘천 일대를 무대로 하는 백의동맹에 가입하는 학생들이 등장했다. 그해에 3학년인 철원 출신 박형원이 이 학교 백의동맹의 초기 멤버다.

백의동맹은 독서모임을 통해 항일정신을 확산시켰다. "그들은 항일서적이라면 민족주의, 공산주의 가릴 것 없이 읽어갔다"라고 조동걸 교수는 말한다.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일제를 잡는 데에 유용한 사상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유격전 준비하다가 옥중투쟁도

일제시대의 모습 (자료사진)연합뉴스

백의동맹은 유격대 투쟁도 준비했다. 이 활동에 참여한 김영진은 훗날 조동걸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 동지들은 더욱 많은 지식과 시국적인 상식을 체득하고 패망하여 쫓기는 왜노를 유격하여 전승국의 장병들과 무력으로 협력함을 목적"으로 했다고 썼다.

학생들은 김화·철원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펴기 위해 광산 지역에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됐다. "1945년 3월 곳곳의 관계자가 모두 잡혀갔고, 25일 춘천사범학교 박동원·정린호·염희태·김영진을 마지막으로 20여 명이 모두 체포되었고, 3월 말경에는 전원이 흑색 마포로 얼굴을 덮어 가리운 채 각처에서 철원으로 끌려갔다"라고 조동걸 교수는 설명한다. "복면으로 가리우고 두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식민지 학생의 발걸음이 진정한 이 민족의 양심의 길이었고 정의의 발길이었다"라고 그는 평한다.

개교 이래 끊임없이 전개된 학생들의 투쟁은 1945년 3월의 대대적인 체포에도 지장을 받지 않았다. 4월부터 장티푸스가 확산되는 가운데 고문과 질병으로 허덕이던 백의동맹 수감자들은 경찰서에 수감된 와중에도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제대로 된 무기를 준비할 수 없어 화장실 변기를 뜯어 무기로 개조했다. 이때 앞장선 학생은 박동원이다. 조동걸 교수의 설명이다.

"박동원의 지휘 아래 계획하여 6월 중순경 감방 내의 편기(변기)를 부수어 곤봉을 만들어, 밤중에 신입 죄수를 호출하기 위하여 간수가 방문을 여는 순간에 간수를 때려 눕히고 모두가 탈출하니 철원경찰서 안에서 형상을 달리한 백의동맹의 항전이 전개되었다."

전원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다시 붙들렸다. 그래서 더욱 심한 고문을 받게 됐지만, 그 상태로 두 달을 버텼더니 8·15 해방이 찾아왔다.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이로써 이들의 투쟁은 결국 승리로 귀결됐다. 수많은 학생들이 개교 이래 쉼 없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유격대원들도 배출하고 옥중투쟁 중에 해방도 맞이했으니, 춘천사범학교에선 일제의 사범학교 정책이 보기 좋게 짓눌리고 무시당했다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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