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9 13:34최종 업데이트 25.02.0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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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면 "커피값 폭등" 소식에 커피 업계 종사자 수십만 명이 불안한 요즘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이후 "커피값 하락" 뉴스를 들었던 적이 있을까? 실제로 커피값이 하락한 적이 있었을까?

"커피값 폭락 가속화"라는 꿈같은 뉴스가 전해지던 시절이 실제로 있었다. 정확히 30년 전이다. 1995년은 불안함으로 시작해서 놀라움으로 마무리되었던 한 해였다. 새해 첫날 출범한 세계무역기구, 즉 WTO라는 낯선 체제가 던진 불안함과 함께 한 해가 시작되었고, 그해 막바지 12월 3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수감"이라는 놀라운 뉴스와 함께 한 해가 저물었다. 30년이 지난 2025년, 우리 국민은 다시 놀라움과 불안함을 함께 지닌 채 새해를 맞았다.


전두환이 구속된 날과 같은 날인 12월 3일에 뜬구름 잡듯이 선포된 계엄은 놀라움 그 자체였고,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취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잇따른 관세 위협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WTO로 시작된 자유무역 질서의 붕괴를 넘어 세계 평화까지 흔들고 있다.

관세나 보조금 등 국가 간 상품 흐름을 방해하는 모든 장벽의 제거, 그리고 다자간 협력을 통한 무역 분쟁의 해결을 지향하는 것이 WTO 체제의 출범 정신이었다. 세계화의 닻을 올린 신호탄이었다. 우리나라의 취약 산업이었던 농업 부문의 피해가 예상되었다.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저항했지만, 국제적인 흐름에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WTO의 출범을 앞에 두고 불안해하던 우리나라는 한 세대가 지난 지금 WTO 제제의 붕괴 조짐 앞에서도 여전히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세계적인 커피 소비 감소, 그런데 한국은?

카페 (자료사진)pxhere

흥미로운 것은 불안하고 놀라운 소식으로 가득했던 1995년 우리나라의 커피 소비 동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커피 소비가 최초로 감소하는 신기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 1995년이었다. 전년도에 있었던 브라질 커피 수확량의 대폭 감소로 인한 커피 원료 가격 상승이 기폭제였다.

커피 최대 생산국 브라질에는 1994년 한 해 동안 두 차례의 냉해와 한 차례의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이로 인해 커피나무 상당수가 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브라질이 커피 원료를 수입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세계 커피 원료 시장은 흔들렸고, 몇 개월 사이에 국제 시장에서 커피 원료 가격은 두 배 이상 올랐다. 커피인들의 놀라움과 불안함이 극에 달했다.

커피 원료 가격의 상승이 가져온 커피 소비자 가격의 상승은 결국 커피 소비 시장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세계 최대의 커피 소비국이었던 미국의 경우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한 해 사이에 커피 소비가 10퍼센트 이상 감소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커피 소비국 들에서의 커피 소비 감소는 커피 생산 국가들의 경제난으로 이어졌다. 중남미 경제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모든 커피 생산 국가들의 외채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커피가 초래한 외환위기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전하면서 국내의 한 언론은 '커피생산국 울고 싶어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울고 싶어라'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이남이의 노래 제목이었다. 커피 소비의 위축으로 커피 생산국들 사이에 커피 가격 낮추기 경쟁을 시작하면서 커피 원료 가격이 지속적으로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침 커피 생산을 본격화한 베트남 커피의 등장도 커피 가격 하락을 가속화시켰다. 불과 1년 사이에 국제 커피 가격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형국이었고, 커피 소비는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커피 원료 가격의 하락 소식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경향신문>과 <매일경제>는 국제 커피 가격이 금년 들어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국제커피기구(ICO) 자료를 인용해 1995년 6월 23일 드디어 최저가격을 기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7월 6일 <매일경제>는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등 남미 4개국이 커피 가격 정상화를 위해 커피 판매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합의했고, 에콰도르와 브라질도 이 합의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국제적인 커피 원료 가격 급등, 커피 소비 감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커피 소비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WTO 체제의 등장으로 농수산물 무역적자가 급증하였고, 커피를 비롯한 기호 식품류의 수입이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지만 커피 가격이 내리지도 않았고, 커피 소비가 감소하지도 않았다.

1995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 다방 계단 아래 두 주인공이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롯데엔터테인먼트

스페셜티 커피의 등장

10대와 20대가 선호하는 음료에서 커피가 65퍼센트를 차지하였고, 이들 중 저급한 인스턴트커피보다는 고급의 원두커피를 마시는 비중이 68.5퍼센트에 이르렀다는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원두 캔 커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향원두커피라는 새로운 커피문화를 선도하는 헤이즐넛 커피가 등장하여 커피 소비를 부추겼다.

이런 가운데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418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 속에서 생존자 구출 소식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이는 날이 이어졌다. 매몰된 지 무려 13일 만에 18세의 유○○양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유양은 인터뷰에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

동서식품을 비롯한 커피 기업들은 유양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수십 박스씩의 캔 커피와 커피믹스를 보내왔고, 신문에는 시원한 캔 커피를 마시는 유양의 사진이 실렸다. 게다가 유양은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커피전문점을 운영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냉커피 소비는 폭발하였고, 커피전문점 창업에 대한 청년층의 관심도 폭발했다.

1995년 10월 7일 자 <조선일보> 기사 '짙고 그윽한 향의 원두커피 산지-볶은 정도따라 맛도 다양'과 '커피 원두 끓이는 법'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젊은 층을 중심으로 커피 문화가 인스턴트커피에서 원두커피로 본격적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커피전문점 창업은 그들의 꿈이었다. 우리나라에 스페셜티커피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알리는 인터뷰 기사가 1995년 10월 7일 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열다섯 살이던 1937년에 시작해서 무려 58년 동안 커피를 끓여온 서정달씨의 커피 인생 이야기였다.

커피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커피 1세대를 상징하는 인물 네 명의 성을 따서 만든 '1서 3박'이란 표현 속 '1서'의 주인공이다. 서정달씨는 당시 이화여대 후문에서 커피전문점 '주얼리하우스'를 운영 중이었다. '3박'은 서정달씨와 함께 우리나라 스페셜티커피 문화를 개척한 드립커피의 장인 박상홍, 박원준, 그리고 박이추를 말한다. 이 기사에 이어 '원두커피 끓이는 법'이라는 글이 실렸다.(당시 커피 문화를 잘 보여주기에 전문을 옮긴다.)

"원두커피 전문점이나 일반 가정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방식은 드립(물방울)식. 여과 종이에 원두커피 가루를 넣고, 물을 끓여 수증기가 식으면서 물방울이 되어 커핏가루로 떨어져내리는 방식이다. 가정에서 쓰는 커피메이커가 대개 이런 드립식 커피 제조기들이다. 곱게 간 것보다, 중간 정도로 입자가 거칠거칠하게 간 원두를 사용해야 커피의 그윽한 맛을 잘 우려낼 수 있다. 사이펀식은 커피를 끓여낼 때까지의 기다림이 즐거울 만큼 시각적인 효과가 좋고, 정성도 들어간다. 끓은 물이 관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적당한 온도로 식는 게 핵심이다. 고압-고온의 물과 증기로 끓이는 에스프레소는 짙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에스프레소용 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으로, 빠른 순간에 커피 맛이 우러나야하기 때문에 아주 곱게 간 원두를 사용한다. 카페오레는 커피의 자극적인 맛을 줄이기 위해 우유를 섞은 밀크커피. 원두커피를 만든 다음에 뜨겁게 데운 우유와 혼합해, 아침 식사용으로 든다. 나폴레옹이 즐겼다는 카페 로열은 어두운 밤, 분위기를 돋우며 마시기에 그만이다. 고리가 달린 스푼을 커피잔에다 걸치고, 각설탕을 스푼 위에 얹은 뒤 브랜디를 그 위에 뿌린다. 그런 뒤 설탕에다 불을 붙이면, 각설탕이 파란 불꽃을 내며 커피로 녹아내려 맛을 내는 식이다."

대통령은 지지율에 취해 뜬금없는 말을 일삼고, 국민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믿고 고급 커피에 빠져드는 사이에 나라는 외환위기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고 있었다. 한 세대에 걸쳐 이룩한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뜬금없이 지금은 사라진 '카페 로열'의 향과 맛이 궁금해지는 불안한 시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커피인문학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2021.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2023. 역사비평사.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매일경제> 1995년 커피관련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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