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6 15:12최종 업데이트 25.02.0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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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해외로 나간 달러 화폐뿐 아니라 외국 영토에 대해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탐욕이 커지고 있다.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에 이어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소유 의지까지 표명했다. 지난 4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그런 입장을 표했고 네타냐후도 환영한 것을 보면, 가자지구에 대한 속뜻은 그린란드·파나마 운하에 대한 것과는 달라 보인다.

트럼프가 주시하는 그린란드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앞둔 제2차 대전 중에도 미국의 열렬한 관심을 받았다. 1721년부터 덴마크 식민지였다가 1953년에 덴마크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이곳은 1940년부터 워싱턴의 전략적 고려 대상이 됐다.


미국의 참전 이전인 그해 4월 9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북쪽의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이 사건은 덴마크 식민지인 그린란드까지 히틀러의 수중에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미국인들의 우려를 낳았다. 대서양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나치의 손길이 지구 서반구에도 미칠 것을 염려했다.

도메이(同盟)통신사 보도를 실은 1940년 4월 16일 자 <동아일보>는 "독일군의 정말(丁抹) 침입 이래 그린랜드가 미국의 대륙에 근접한다는 이유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그린란드에 관심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같은 통신사 보도를 실은 14일 자 <조선일보>는 루스벨트의 성명에 대해 "미국이 비로소 공식으로 그린랜드에 대한 관심을 보도한 것이라 주목된다"고 의의를 부여했다.

중국인들이 딩모(丁抹)로 발음하는 덴마크의 재앙이 자국에도 파급될 수 있다는 우려는 캐나다에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캐나다가 그린란드를 먼저 점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미국 내에서 커졌다. 그달 17일 자 <조선일보>는 "가내타(加奈陀)군이 이미 그린랜드를 점령하엿다던가 혹은 방금 점령하려 하고 잇다는 보도가 성(盛)히 유포"됐다는 워싱턴발 기사를 실었다. 이에 대해 영국 측은 "이런 정보는 아직 업스나, 잇슬 수 업는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린란드를 미국 쪽으로 끌어들인다는 발상을 갖고 있었지만, 트럼프처럼 노골적이고 탐욕적인 태도는 드러내지 않았다. 위 <동아일보>에 따르면, 루스벨트 정부는 독일의 침공으로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물자 교류가 두절되면 인도적 차원에서 그린란드에 물자를 공급하고 에스키모인 1만 7000여 명을 보호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 행정부는 그런 명분에 더해 외교적 명분도 내세웠다. 1823년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 밝힌 먼로주의에 입각해 그린란드 문제에 접근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루스벨트는 '미국도 유럽에 간섭하지 않겠지만 유럽도 아메리카대륙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먼로독트린에 따라 이 문제에 개입할 것임을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을 통해 천명했다. 1940년 4월 18일 자 <조선일보>는 "헐 국무장관은 16일 그린랜드도 몬로주의의 권내에 들어간다고 언명"했음을 전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관심은 그해 5월 1일 그린란드에 임시영사관을 설치하고, 1945년 4월에 출범한 해리 트루먼 행정부가 한층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는 단계로 발전해 갔다. 1946년에는 그린란드에 군사기지를 두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고, 그렇게 해서 주둔시킨 군대를 이듬해 11월 17일 이전에 철수시켰다. 1952년 9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것처럼, 한국전쟁 중에는 북극권을 통한 침공을 막고자 그린란드 북부에 전략공군기지를 건설했다.

1946년 덴마크와 미국이 매수 협상 벌이기도

지금의 트럼프처럼 당시 미국인들도 그린란드를 아예 매수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루스벨트 때인 1940년 4월 18일에는 야당인 공화당의 하원 의원이 그린란드 매수 결의안을 제출했고, 트루먼 때인 1946년 하반기에는 덴마크와 미국이 실제로 매수 협상을 벌였다.

1947년 1월 30일 자 <조선일보>는 "과거 수개월 이래 미·정(丁) 양국 간에는 정말령(領) 그린랜드 매도 문제에 관하야 토의를 계속"해왔다고 보도했다. 코펜하겐발 AP통신을 그대로 옮긴 이 기사에는 덴마크 정부가 10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당시 미국이 세계지도 위에 그은 미국 방위선을 보면, 미국이 그린란드를 얼마나 중시했는지가 드러난다. 딘 애치슨이 국무장관대리일 때 보도된 그해 3월 22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뉴욕발 AP통신 기사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을 서쪽에서 견제하기 위해 그린란드-아이슬랜드-영국-독일-지중해-그리스-터키-이란을 잇는 글로벌한 방위라인을 구상했다. 이 기사는 조만간 아프가니스탄도 라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 구상은 같은 해 9월 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체결된 서반구방위협정의 토대가 됐다. 그해 12월 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 조약을 승인한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는 알래스카와 그린란드 등을 연결하는 방위라인이 아메리카대륙을 단결시킬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전쟁의 원인으로도 지목되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애치슨 라인은 필리핀-오키나와-일본과 알래스카주 알류샨열도를 연결했다. 그린란드에서 시작해 이란 등을 경유하는 서부 라인과 필리핀과 알래스카를 연결하는 동부 라인을 통해 소련을 포위한다는 것이 냉전 초기 미국의 구상이었다.

그린란드에서 시작해 이란과 필리핀 등을 거쳐 알래스카까지 이어지는 방위라인에서 미국이 특히 중시한 두 곳은 영국과 일본이다. 미국의 전략구상을 담은 위 <경향신문>에는 "영 본토와 동일하게 일본은 미국 방위의 생명선"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둘러싸여 있다. 당시의 태평양 건너편에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강적이 있었고, 대서양 건너편에는 유럽 강국들이 있었다. 일본은 태평양 건너편의 공격을 막아주는 전초기지이고 영국은 대서양 건너편의 공격을 막아주는 전초기지라는 게 미국인들의 판단이었다.

그런 고려가 있었기에 일본 바로 옆인 한국을 애치슨라인에서 빼는 게 좀 더 수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린란드를 끌어들이고 한반도를 내보내는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은 '일본이 재무장되면 한국의 중요성은 떨어진다"는 판단을 근거로 했다.

1940년대에 미국이 그린란드의 전략적 비중을 높이면서 이곳을 아예 사들이려고까지 했던 것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침공에 자국이 노출됐다는 우려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트럼프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미국인들의 안보 자신감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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