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1 20:23최종 업데이트 25.02.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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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내부 모순과 구악의 척결에 나설 때마다 기독교 내의 극단주의세력은 거의 항상 훼방을 놓았다. 냉전체제에 의존해 교세를 확장해 온 그들은 낡은 체제의 몰락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윤석열 대통령 구속영장이 발부된 직후에 벌어진 1월 19일의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도 그 일례다.

일제가 쫓겨간 해방 직후에도 기독교 내 극우세력은 패악질을 일삼았다. 이 시기 극우세력의 상징적 존재인 서북청년단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이북 출신'과 더불어 '기독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반 국민들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폭력에 노출됐다. 개신교 친일청산이 논의된 현장인 1946년 7월 9일의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임시회에서도 그런 폭력이 일어났다.


창원군 진해읍교회에서 개최된 그날 회의에서는 친일 부역을 참회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때 이름이 불명확한 목사 하나가 회의장에 들이닥쳤다. 2000년에 발행된 최덕성 당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은 이렇게 묘사한다.

"박(성)애 목사가 물이 들어 있는 똥오줌통을 교회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똥오줌통을 들고 노회 장소에 들어선 그는 그것을 거침없이 노회원들에게 뿌렸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새끼들아, 다 같은 놈들이 뭐 잘났다고 야단들이냐 말이야! 내나 너희 놈들이나 다를 게 뭐냐?'"

이 장면이 보여주는 기독교의 난맥상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앞장선 전도사가 이 시기에 있었다. 평양여자신학교(평양여자성경학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해방 뒤에 목사가 된 최덕지(1901~1956)가 그 주인공이다. 해방 전에는 일제에 맞서는 전도사, 해방 뒤에는 친일세력에 맞서는 전도사였던 인물이다.

죽을 각오로 일제와 맞섰던 여성 목회자

일제 말기 당시 최덕지 전도사(왼쪽 두 번째)가 여성 청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자료사진

최덕지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4년 전에 경남 진남군(1914년 통영군 개칭)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마산 의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유치원 보모로 일했다. 외동딸을 데리고 평양에서 신학 공부를 한 것은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뿐 아니라 민족의 구원도 소중히 여겼다. 악마만큼이나 사악한 제국주의의 지배에 놓인 한민족을 구원하는 일에도 인생을 걸었다. 2004년도 <역사와 경계> 제52집에 실린 윤정란 당시 전남대 학술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경남 통영지역 최덕지의 민족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최덕지는 기독교인들이 아닌 일반 통영민들과 함께 항일운동단체와 여성운동단체를 통해 민족적 여성운동에 주력하였다"라고 소개한다.

이 논문은 그가 참여한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와 관련해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12조로 나뉘어 통영·하동·사천·고성·김해·양산 등의 각 지역을 분담"했다며 "모집된 군자금은 통영 김필애, 김해 이갑성 편으로 임시정부에 송금했다"라고 설명한다. 또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덕지가 가담하여 활동한 단체로는 통영여자청년회, 근우회 통영지회, 통영부인회"였다면서 "통영에서 조직된 거의 모든 여성단체에 가담"했다고 기술한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았다. 이와 관계없이 그의 항일투쟁은 일제가 볼 때 '극렬 투쟁'이었다. 그는 투옥된 뒤에도 일제 당국자들을 진절머리 나게 만들었다. 일제 간수들이 '동쪽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라', '정오묵도를 하라'고 강요하는 시간대에도 그는 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그것은 일왕(천황) 숭배를 거부하는 항일투쟁이었다.

2023년도 <한국여성신학> 제98호에 실린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의 논문 '출옥여성도 최덕지의 재건교회 설립과 여성주의 성서 해석'은 해방을 감옥에서 맞은 출옥성도 최덕지의 감방 생활을 설명하면서 "그녀는 유치장과 형무소 감방에서 간수들로부터 폭행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매일 하루에 네 번씩, 즉 새벽 시간, 오전 11시, 오후 3시, 그리고 밤 시간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면서 옥중투쟁을 했다"라고 알려준다.

이 논문에 등장하는 동료 수감자 김두석은 "최덕지 선생은 금식이 주식"이었다며 "오른편 무릎을 세우고 왼쪽 무릎은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후 뼈만 남아 앙상한 몰골로 3일이고 4일이고 일주일이고 10일이고 금식기도로써 아침 궁성요배와 정오묵도 시간을 끝내 이기고 많은 동지들의 신앙을 이끌어" 나갔다고 회고한다. 죽음을 불사한 투쟁으로 폭행과 고문을 받는 그의 모습은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동료 수감자 안이숙은 "나도 저분같이 강했으면" 하고 몇 번이나 생각해 봤다며 그때를 떠올렸다고 한다.

위 논문에 인용된 일제 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서에 따르면, 일제는 그의 항일운동을 "독선적 사상 선전, 동지 획득에 광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신사참배 반대론을 열심히 전파하고 동조자들을 모으는 모습을 독선적이고 미친 행동으로 폄하했다. 미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열심히 항일했던 것이다.

그는 일제 관헌들 앞에서 하나님의 천년왕국이 일본제국을 변혁시킬 것이라는 신념도 설파했다. 한민족 정권의 부활을 염려하는 그들 앞에서 천년왕국에 의한 일본 멸망을 경고하는 일종의 비대칭 접근법도 구사한 셈이다.

최덕지의 한은 풀리지 않았다

일제시대 신사참배하는 모습연합뉴스

그의 항일투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이다. 그는 일왕을 신으로 떠받드는 신사참배를 죄악으로 규정했다. 2015년에 <한국개혁신학> 제46호에 실린 김정일 숭실대 초빙교수의 논문 '해방 후 재건교회의 탄생 배경 연구: 출옥성도 김린희·최덕지 행적을 중심으로'는 그가 신도들을 모아놓고 "신사참배는 죄"라며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고 설명한다. 히로히토를 우상으로 규정한 셈이다.

그는 동료 교인들에게 죽음을 불사하자고도 독려했다. 위 논문에 따르면, 그가 동료 교인들과 함께 기도할 때 나오는 문구 중 하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활동하도록"이었다. 위 논문은 그의 1941년 이후 행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죽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으로 대항해야, 죽음으로 거부하기를" 같은 표현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설명한다.

죽음을 각오하자는 외침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체포·구속을 불사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0년에는 18일간 마산경찰서에, 약 1개월간 진주교도소에 갇혔다. 이듬해에는 경남경찰국 감옥에 수감됐다. 1942년에는 통영에서 검거됐다. 그런 뒤 평양으로 이감돼 해방을 맞았다. 그런 뒤 교계 친일세력을 상대로 경남지역에서 제2의 투쟁을 벌였다.

그는 일왕을 신으로 떠받든 친일 목사들이 회개하고 자숙할 것을 요구했다. 또 휴직 기간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말로 끝내는 참회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린희 전도사 등과 함께 가장 강경하게 친일청산을 요구한 그는 해방공간의 기독교에서 재건파로 분류된다.

일제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 것처럼 해방 직후의 친일세력도 그를 그런 식으로 폄하했다. 위 <한국개혁신학> 논문은 그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신경과민증 등으로 깎아내리는 시각이 교계에 있었다고 알려준다. 또 친일파들이 장악했을 당시의 경남노회는 "정신이상자니 조심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일제 때 보여준 그의 투쟁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것이 친일세력을 두렵게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덕지는 일제와 친일세력을 상대로 극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 극렬함은 기독교 극우세력의 극단적 행동과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 그의 극렬 투쟁은 일제와의 대결 단계에서는 승리로 귀결됐지만, 친일세력과의 대결 단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역사발전의 주요 순간마다 기독교 극우세력이 분탕질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최덕지 등이 그들을 억누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최덕지의 한이 아직 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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