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7 12:22최종 업데이트 25.02.0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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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기자말]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땀 흘려 얻은 밥을 되찾기 위해 버티는 사람이 있다.

내가 12·3 계엄 이후에 관한 속보를 클릭하는 동안 농성 천막을 고쳐 매는 사람이 있다. 온전히 동료와 출근하기 위해 가족을 옥상 먼발치에서 점처럼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빨갱이, 해고된 노동자가 아니라 평범하고도 열렬한 '일하는 사람'이다.


기름지고 정직하지 않은 밥을 오래 먹으려고 꼼수를 부리는 내란 우두머리로 인해 대다수 포털 사이트가 정치계 뉴스로 채워지는 요즘이다. 평범한 시민으로 살며 차오르는 분노에 지칠 무렵,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중요한 뉴스가 잊히고 있다'는.

최고 권력이 거짓을 일삼고 자신을 두둔하고 그것이 수백 편 기사화가 되는 동안 국내 노동계 뉴스는 쪼그라들었다. 매일 저녁 뉴스를 보며 든 작은 염려다.

첫 번째 읽기: 투쟁의 피로함 너머 생활의 발견

한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고자 수백 명의 공권력이 투입될 동안, 생존을 걸고 농성하는 소수의 노동자가 있다. 별천지 같은 정국을 뒤로하고 그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겨울을 나고 있을까. 2024년 11월에 출간된 <수요일에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를 세 번 펼친 까닭은 그 마음이 궁금해서였다.

<수요일마다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책표지전진경 작가, 알록출판사

화가가 쓰고 그린 이 책은 그림이 많다. 시민들과 연대하며 투쟁과 삶의 현장에서 미술을 해온 전진경. 그는 기타 공장 콜트콜텍의 부당 해고에 저항해온 노동자들의 농성 천막을 수 년간 드나들었다.

콜트콜텍 투쟁은 국내서 가장 긴 노동 투쟁의 역사다. 자그마치 2007년부터 2019년. 햇수로 13년, 하루로 계산하면 4464일이다.

저자는 그림을 그린 날을 일기처럼 기록해 두었는데,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쓰인 날짜를 모아보면 2015년 10월 7일부터 2019년 4월 23일. 농성 천막을 매주 찾아가 그린 140여 점의 드로잉 중 40여 점을 추려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그림이 시작되는 첫 페이지를 열어 보자.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가 오른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독자는 시선이 머무는 방향으로 그다음 장을 펼친다. 분홍의 온기 있는 바탕 위에 칫솔, 안경, 물병 등 친숙한 물건이 덤덤하게 놓여 있다. 누군가의 손때가 스민 듯 그려진 생활용품이 반갑다. 투쟁의 피로함 대신 생활의 리듬이 농성 천막에 환하게 입혀진 듯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의외성에 놀랐다. 노동 기록을 담은 책에서 느껴지는 결의에 찬 투쟁의 이미지 대신 집집마다 있을 보편적인 세간살이 이미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답게 나열된 생활을 따라가면 투쟁하는 아저씨들이 아침마다 먹었던 밥과 반찬, 치약 맛이 궁금해진다. 농성천막 안에서 같이 어깨를 기대고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두 번째 읽기: 구석에서 가만한 화가의 손

이제 독자는 노동자의 슬픔에 집중하는 대신, 누구에게나 찾아드는 하루를 무심히 지켜보듯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하품하는 아저씨, 농성장 귀퉁이에 세워진 기타, 머리 손질을 하거나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채 멍 때리는 아저씨. 얼굴이 영락없는 누군가의 삼촌 같다. 작가는 이 얼굴들을 담담하게, 경건하게, 익살스럽게 포착한다.

<수요일에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본문 이미지전진경 작가, 알록출판사

그 이미지들 사이를 유영하다가 그림 한 장에 눈길이 닿는다. 크리스마스 전날, 이웃이 한데 앉은 천막 안 동그란 자리. 2016년 12월 24일자 그림이다.

투쟁하는 자리에는 흔히 상상하듯 피로와 고통만 있지는 않았다. 윷놀이 판을 가운데 두고 놀이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 곱게 도열한 운동화가 명절 문지방 너머 집 안 풍경처럼 사사롭게 펼쳐진다.

작가 전진경은 콜트콜텍 복직 투쟁자들과 2012년 만났다. 복직 농성 중이던 공장 뒷마당에 양해를 구해 작업실을 만들었고, 뒷마당에서 살던 아저씨들과 자연스레 이웃이 되었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작가와 아저씨들은 공장에서 쫓겨났고, 그 자리엔 가스 충전소가 세워졌다. 거리엔 천막이 세워졌다.

이후 아저씨들의 농성천막을 들른 저자는 "꽤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작가는 아저씨들에게 "수요일마다 그림 그리러 오겠다" 동의를 구하고 매주 농성장에 와 출석 도장을 찍기 시작한다. 취재기자들에게 자리가 밀리는 날에는 "그릴 자리가 비좁"다고 담담히 털어 놓으며.

비좁으면 비좁은 대로, 작가는 채워 나갔다. 농성장의 하루들을. 침잠하지 않고 생동하는 그의 그림을 살피는 것이 이 책의 묘미이지만, 작가가 그림에 단출하게 덧붙인 텍스트를 읽는 일 또한 즐겁다. 그는 노동자를 함부로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수요일에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본문 이미지전진경 작가, 알록출판사

작가는 "구석에 앉아 구석을" 그려 나간다. 어느 날은 "생각해보니 아저씨들에 대해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많다"고 말하며 기타 기능공들이었던 아저씨들의 삶과 사연을 궁금해한다. 그러고는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다. "심심하지 않으셨냐고 물었더니 더 심심한 대답을 하신다"라고 쓴 대목에선 작가 특유의 운치 있는 유머가 느껴진다.

세 번째 읽기: 복직 날까지 견디는 용기

농성장 천막에 붙박힌 사물들 또한 삶을 견디고 있음을 느낀 건, 이 책을 세 번째 읽고 나서다.

해를 거듭할수록 천막 안에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저자는 뭘 그릴지 막막한 수요일에 맞닥뜨린다. 저자는 수십 년 회사에 헌신했던 기타 기능공들을 해고하고는 해외로 이전해버린 콜트콜텍, 그 공장이 있는 인도네시아로 건너간다.

여전히 복직투쟁 중인 아저씨들의 공간과 생존하기 위해 일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공간에서 그가 느낀 이질감은 무엇이었을까. 작가가 번역기로 이국의 노동자와 엉뚱한 대화를 나누며 느낀 불편함을 우리는 이제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할 것이다.

책 끄트머리, 그는 투쟁 속 사람들에게서 묻어 나오는 "외로움 같은 파도"들을 정면으로 그리지 않으려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저자가 일관되게 겸손한 태도로 그려낸 그림 속에는 아저씨들이 덮었던 이불, 아침을 나눠 먹었던 밥상, 옷걸이에 걸린 셔츠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폐허 위 사물이 아니라, 꾸준히 살고자 하는 사람의 증거다. 이 그림들은 우리의 생활과 닮아 있으므로 기억해 달라는 사람의 목소리와 다름이 없다.

<수요일에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본문 이미지전진경 작가, 알록출판사

작가가 그려낸 사물들 너머로 42일간 단식농성했던 기타 기능공, 언제나 자기보다 남이 먼저였던 의로운 아저씨, 임재춘(남성이다)의 얼굴이 페이지마다 등장한다.

큼지막하게 표현된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 기타 만드는 일에 사명감이 깊었던, 못내 출근하고 싶었고, 마침내 복직하여 출근한 사람의 인내가 만져진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줘요."
(기타공장 콜트콜텍에서 30년간 일한 임재춘과 그의 동료들의 복직투쟁을 그린 다큐멘터리 <재춘언니> 에 나오는 대사)

(좌) 치명타 드로잉 <임재춘 말씀> 2017, (우) 임재춘 조합원 단식 농성 천막 그림들.치명타, 전진경

법 위에 서려는 병든 권력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오늘, 이 목소리는 올곧다. 공정한 법 집행을 정직하게 희망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여전히 거리에 있다.

콜트콜텍 투쟁의 용기와 닮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내 고향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경북 구미, 일 년이 넘도록 고공 농성 중인 한국옵티칼 하이테크 옥상 위 두 사람을 향해, 광장의 그 응원봉을 흔들고 싶다.

다만 짐작한다. 작가가 그려낸 <수요일마다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속 천막 속 아저씨들과 지금도 광장에서 복직투쟁 중인 사람들의 천막 속 생활공간이 닮아 있음을. 내 생활의 귀퉁이와 이 사람들의 귀퉁이 또한 닮아 있음을. 누구나 지붕 아래서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헌법과 민주주의에 관한 독서가 열풍이다. 그에 합류하기 전, 법이 가장 먼저 보호해 할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본다. 법 안으로 먼저 들어가야 할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특보에 파묻히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덧붙여 본다.

"콜트콜텍 투쟁의 선두를 달렸던 임재춘 선생님, 그리고 옥상 위에서 올해의 용기를 그려 나가는 박정혜, 소현숙 선생님. 당신들은 나에게 구석이 아닌 광장 한복판의 사람입니다."


수요일마다 그림 그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전진경 (지은이), 알록(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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