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3차 변론기일이 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저는 철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특히 공직 생활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념 하나를 확고히 가지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지난 21일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정에 처음 출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공직 생활 동안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확고히 가지고 살아왔다며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지를 펼쳤다.
듣고 있기 힘든 억지다. 철들며 가진 신념이라면 다양성과 삼권분립, 법치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절대적인 요소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야당이 싫어서 법에도 금지된 국회에 병력을 진입시킨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주장하다니 어이없다.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는 개고기를 팔기 위해 걸어 놓은 양머리이거나, 신념이라고 믿고 있는 빈껍데기 맹신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대의 민주주의다. 양심과 사상, 의견과 토론, 표현과 출판, 결사와 평화적인 집회, 청원의 자유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12.3 계엄포고령 제1호 1항과 3항이다. 자유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란을 결행한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 신념의 통치자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파괴의 범죄자다.
자유민주주의 파괴자의 궤변
대통령의 언어 습관은 독특하다. 한 단어에 꽂히면 그 단어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공정과 상식'이 그랬다. 대선 출마 당시부터 공정과 상식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반대 진영을 불공정과 비상식이라고 몰아세웠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가족을 둘러싼 의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혐의들도 공정하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키웠기 때문에 엄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이나 측근들의 범죄 혐의는 번번이 외면했다.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의 심판자일 수는 있어도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제왕적 발상에 검찰도 언론도 알아서 동조했다.

▲'12.3내란 사태'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여의도 국회에 투입된 무장 군인들.
연합뉴스/AFP
법치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국회의 입법 활동을 거부권으로 막아왔던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을 무법천지로 만든 건 야당의 폭주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력 남용 때문이었다.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계엄법에도 금지된 국회의원 체포와 구금을 지시한 것 또한 대통령이다.
법치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계엄을 실행했다는 대통령 주장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은 법치를 훼손해도 된다는 자가당착에 봉착하는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의 파괴자,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통치자, 자유민주주의에 총을 들이댄 내란 우두머리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강조한다 해도 국민들이 모두 본 민주주의 파괴 현장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궤변이 우려되는 것은 그 거짓에 힘을 보태는 세력들이 만들어지고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증오가 커지고, 대립이 격화되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에 공공연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극우 세력의 준동은 대통령의 궤변이 원인이 되고 자양분 역할을 하는 모양새다.
지난 19일 윤 대통령 구속 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방법원은 대통령 지지자인 극우 폭도들에 점령당해 초토화됐다. 폭행과 파괴의 상처는 비단 건물 피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법의 권위는 무력화됐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법치주의가 부정당했다.
폭도들은 법원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영장 발부 판사를 찾으며 '국민저항권'을 언급했다. 법원을 파괴하는 행위가 국민저항권임을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 저항이 아니라 반국가 행위이고 내전에 버금가는 폭력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한 폭도다.
국민저항권은 헌법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합법적인 회복 방법이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행사되는 국민기본권이다. 총칼로 국민을 살육했던 80년 광주, 수천 발의 실탄을 준비하여 국회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12.3 내란, 여기에 맞선 행위를 국민 저항권의 발로라 한다. 헌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헌법을 어긴 대통령을 지키려는 폭력 행위는 보호받아야 할 국민저항권이 아니라 처벌받아야 할 폭동이다.
국민저항권 주장한 폭도의 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직접 출석해 있다.
헌법재판소 화면 캡춰
폭동을 국민저항권으로 포장하고 사주한 세력 가운데 한 명은 전광훈 목사다. 그는 법원 폭동이 있기 전인 19일 광화문 집회에서 국민저항권이 이미 발동된 상태이며 국민 저항권은 헌법 위에 있다고 주장했고 대통령을 직접 구치소에서 데리고 나올 수도 있다도 했다.
죄를 물어야 할 선동이다. 국민저항권은 헌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권리다. 사실 관계조차 왜곡하는 전 목사의 이 발언 몇 시간 뒤 폭도들은 법원을 침탈하며 국민저항권을 주장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극우 세력의 등을 떠미는 건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 확신의 소유자로, 12.3 내란은 법치를 지키기 위한 거사로 호도하고 있다. 지난 23일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대통령 측 변호인은 12.3 계엄령을 두고 계몽령이라는 주장까지 내놨다. 이날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자신이 끌어내라고 한 건 '의원'들이 아닌 '요원'들이었다는 황당한 주장도 했다.
탄핵 심판관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힘든 억지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계속되는 건 헌법재판소 심판관의 마음을 얻기보다 극우 지지층을 선동해 여론을 뒤집어 보려는 계산이 깔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보수 유튜버들은 이미 '계몽령'과 '끌어내라고 한 건 요원'이라는 주장으로 극우층 결집을 유도하고 있다.
수감된 대통령은 국론이 분열되고 극한 대립의 후유증이 얼마나 클지 생각도 없다. 오로지 지지자를 선동하여 탄핵 국면을 벗어나겠다는 계산만 하는 듯하다. 탄핵 심판과 검찰의 내란 수사 모두 더 속도를 내야 한다. 탄핵 심판정이 극우 지지자를 끌어모으는 선전장으로 두어서도 안 된다.
12.3 내란 사태는 두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판을 뒤집으려는 준동으로 내란은 여전히 진압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 법치, 공정과 상식이라는 미명하에 독재, 불법, 불공정과 비상식 정치를 일삼았던 대통령은 내란을 계몽령이라 하고 극우 지지자들은 사법부 침탈을 국민저항권이라 한다. 내란 대통령과 극우 세력의 준동을 단죄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위태롭다.
23일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 앉아 거만하게 웃고 있는 대통령 모습을 보면서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념이 아니라 정권을 되찾으려는 광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광기 앞에서 여전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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