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입구 일부가 지난 19일 새벽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일으킨 폭동 사태로 부서져 폐쇄되어 있다.
권우성
내란 정국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평소에 인지하지 못했던 한국인의 면모가 새롭게 드러나서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내란 피의자 윤석열을 지키겠다며 일군의 무리가 충혈된 눈과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해 상상 이상의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법원 건물에 방화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니 그 무도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일을 목도한 국민은 경악했고, 학자들은 그 배경을 규명하느라 바쁘다. 요즘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극우 세력의 급팽창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쪽이다. 게다가 해석의 여지는 많지만, 내란 수괴와 그에 동조하는 국민의힘 지지율이 상승한다는 언론 보도는 파시즘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는 우울한 진단을 하게 만든다.
2024년 12월의 분위기는 달랐다
하지만 작년 12월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12월 3일 밤 국회 앞에서 70대 노인들은 총알이 날아오면 자신들이 맞겠다며 함께 손잡고 맨 앞에 나섰고, 청년들은 장갑차와 계엄군 버스를 맨몸으로 막아섰다.
용감한 시민들은 12.3 친위 쿠데타를 막아낸 후(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의 기민한 대처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엄청난 규모의 응원봉 집회를 이어가며 마침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의결을 이끌어냈다. 촛불혁명이라는 말 대신 '빛의 혁명'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MZ세대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결연히 일어선 것은 정말 의외였다. 그들은 남태령에서 농민들의 트랙터 대열이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어냈다.
윤석열 체포가 지지부진했을 때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노상에서 눈을 뒤집어쓴 채 밤을 지새우는 '키세스 시위'를 전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경찰로 하여금 마침내 윤석열 피의자를 체포하도록 만들었다. 집회 현장에 선결제가 줄을 이었고, 온갖 물품을 갖다 놓으며 집회 참가자를 배려하는 사람도 많았다.
아름다운 연대가 집회 현장에서 실현되고 MZ세대가 눈부시게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며 많은 국민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한없이 낙관하게 됐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미래를 비관적이라고 보았던 나도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있던 감각이 되살아나고 희망이 고동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앞 도로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 구속’ 촉구 집회가 윤석열퇴진비상행동 주최로 열리는 가운데, 한 참가자가 은박 담요를 쓴 태 응원봉을 들고 있다.
권우성
예전 같으면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감행하는 경우 100% 성공했을 것이다. 12.3쿠데타가 실패한 데는 시민들의 용감한 저항 외에 계엄군 현장 지휘관들의 '태업'이 큰 역할을 했다.
1월 15일 철옹성을 쌓고 끈질기게 저항하던 윤석열이 의외로 쉽게 체포당한 데는 대통령실 경호관들의 협조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다. 어느 곳보다 상명하복의 질서가 강한 조직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여럿 존재했던 셈이다.
극우 세력의 부상, 어떻게 봐야 할까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고결하기 그지없는 한국인의 모습과 추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인의 모습이 함께 드러났으니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단기간에 어떻게 이런 급전환이 일어났을까.
오랫동안 극우화와 민주주의 퇴행에 관해 연구해 온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12.3쿠데타 자체가 윤석열 '개인'의 망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거대한 극우 '세력'의 부상이었다고 진단하며, 최근의 상황은 보수층이 극우화하는 파시즘적 징후라고 결론지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윤석열이 '검찰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내란을 자행해 영구 집권까지 도모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친위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윤석열은 자신의 행위가 통치행위이지 내란이 아니라는 둥, 국민들에게 거대 야당의 반국가적 패악을 알려 이를 멈추도록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둥 강변하며,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는 수세에 몰린 자의 발악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동하면 따를 지지세력이 상당하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몇 차례 윤석열의 메시지가 나온 이후 실제로 극우 성향의 목사는 윤석열 구출을 위한 총동원령을 발동했고 여러 극우 유튜버들은 추종자들에게 한남동 관저 앞 집결과 법원 침탈을 지시했다.
사실상 내란을 옹호하며 윤석열 체포를 방해하는 국민의힘 의원들도 적지 않았다. 윤석열과 극우 세력의 행동이 워낙 상궤(常軌)를 벗어나서 온 나라가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이미 거대 세력을 형성해 대한민국을 파시즘 국가로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극우 세력이 '빛의 전사들'을 이길 수 없다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력 집단난동 사태 당시 판사실에 침입한 40대 남성 이모씨가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극우 세력의 팽창과 그들의 폭력적 성향을 우려하면서도 공포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얕은 법 기술을 활용해 공수처의 체포와 수사를 회피하려 하고 헌법재판소 심리 과정에서는 말도 안 되는 궤변과 변명을 늘어놓는 윤석열의 행태(그는 심지어 계엄군이 '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것을 다 알고 있었고 그런 전제하에서 비상계엄 조치를 했다'고까지 말했다), 법원 폭동으로 체포된 극우 청년들의 겁에 질린 모습, 법원 폭동과 무관함을 애써 밝히는 극우 교회의 비겁한 처신 등을 종합할 때, 이들은 극우이기는 하지만 굳건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불퇴전의 자세로 행동하는 '전사'라기보다는 대부분 망상과 선동과 돈에 좌우되는 갈대 같은 존재에 가깝다.
이런 세력은 공권력이 단호하게 대처하면 대부분 퇴치할 수 있다. 50여 명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이들이 보이는 자세를 떠올려보라.
더욱이 12.3쿠데타를 맨몸으로 막아내고 '빛의 혁명'을 수행한 높은 도덕 수준의 시민들이 극우 세력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 시민들은 수십 년간 민주주의를 매일매일의 삶에서 체험했고 <서울의 봄>과 같은 영화를 통해 쿠데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을 뼛속 깊이 새긴 사람들이다.
인터넷 발달의 산물인 각종 커뮤니티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고 그 효능을 맛보기도 했다. 이들에 의해 개인주의가 팽배한 듯 보였던 한국 사회의 저변에 강력한 연대 의식이 형성되었다.
도덕법칙의 세계에서는 윤석열이 보여온 비열함·찌질함·뻔뻔함·포악함이나 극우 세력의 미숙한 윤리 따위는 '빛의 혁명'을 주도한 '빛의 전사들'의 고결함을 상대할 수가 없다. 이 싸움의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
매일 이어지는 각종 사건과 내란 세력의 술수와 극우 세력의 망동이 싸움의 방향을 좌우하는 듯 보이지만, 최종 심급에서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국민의 도덕성이다. 국민의 다수가 애국심·정의감·이타심·연대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한, 극우 세력의 준동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참혹한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내 마음은 여전히 희망으로 고동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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