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25 19:10최종 업데이트 25.01.2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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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서(좌로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위키미디어 공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좋아한다지만,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보여준 모습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재임 1913~1921)을 연상시킨다.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민족자결주의로 '희망고문'을 안긴 우드로 윌슨과 비슷한 측면이 많았다.

트럼프는 이익도 없이 남의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며 '고립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아메리카대륙과 그 인근에 대해서는 공세적 태도를 취한다. 한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미군 방위비를 얼마나 올릴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파나마 운하에 눈독을 들이고, 유럽보다 아메리카에 가까운 그린란드에 군침을 흘린다.


또 멕시코와 캐나다에 별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히는가 하면, 캐나다를 미합중국 51번째 주로 지칭하고 쥐스탱 트뤼도 총리를 주지사로 불렀다. 캐나다를 미국 지방정권으로 격하하는 모습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연상시키는 '트럼프 공정'으로 불릴 만하다.

윌슨은 트럼프보다 훨씬 먼저 미국 우선주의를 외쳤다. 유럽 문제로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자며 고립주의를 표방했지만, 아메리카대륙 내에서는 팽창적 태도를 보였다. 아이티·도미니카·멕시코 같은 약소국에 대해서는 개입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한국 독립운동진영은 우드로 윌슨에게 기대감을 가졌지만, 일찌감치 환상을 깨고 미국을 직시한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미국을 등지고 소련 쪽으로 돌아섰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정부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소 외교관계의 성립에서 또 하나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은 파리강화회의와 특히 태평양회의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한국 문제를 냉대하자 실망하여 민족주의자들도 소련에 관심을 쏟고 또 기대를 걸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김규식이 미국 기자에게 '우리가 미국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졌으나 이제 실망한 나머지, 이곳에나 희망을 걸어 보려고 하는 뜻에서 참석하였다'라고 말한 토막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우사 김규식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및 14개조 평화원칙에 기초한 1919년 파리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그런 그가 모스크바에 나타나 '이곳에나 희망을 걸어보련다'고 말한 것은 미국에 대한 상당수 독립투사들의 실망감을 반영한다.

1920년대 독립운동 전진에 기여

이 시기에 '이곳에나 희망을 걸어보자'는 듯이 소련과의 협력을 앞장서서 추진한 독립운동가가 한형권(韓馨權)이다. 그는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명단에 없다. 또 생몰 연대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련으로부터 굵직한 협력을 얻어내 192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을 전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국권 상실 이듬해인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이상설·홍범도·최재형 등의 참여하에 항일투쟁단체인 권업회가 창립됐다. 이 단체의 창립 1주년 기념식에 관한 노무라 모토노부(野村基信) 일본총영사의 1912년 12월 25일 자 보고서가 국학자료원이 편찬한 <일본의 한국침략 사료총서>에 수록돼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의 당사자인 가쓰라 다로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이 수신한 이 보고서에는 권업회 부회장 한형권의 기념식 개회사에 관한 언급이 있다. 한형권이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려주는 문건이다.

본문에 인용된 일본총영사 보고서 속의 한형권.자료사진

1917년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자, 시베리아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레닌 정권의 협력을 얻어내고자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한형권은 이동휘 등이 주도하는 이 당에도 참여해 소련과의 외교활동에 나섰다.

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12권 계봉우 편은 소련 극동공화국이 자국 정부 내에 한인부(韓人部)을 설치하도록 촉구하는 활동에 계봉우와 한형권·박진순·박애 등이 투입됐다고 알려준다. 이때 한형권의 지위는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의 특사였다. 임시정부와 소련을 연결하는 현장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한형권은 소련 자금을 독립운동진영으로 끌어오는 데도 참여했다. 한인사회당 지도자인 이동휘는 임시정부 총리였던 1919년 11월에 소련으로부터 60만 혹은 200만 루블의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동휘의 밀명을 받고 1차 자금 60만 루블을 인수하러 간 이가 한형권이다.

위 <독립운동사>는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모스크바 담당 외교관인 안공근·여운형·한형권 중에서 한형권만 파견했다고 알려준다. 이에 따라 60만 루블을 수령한 한형권은 20만 루블은 소련 외교부에 맡기고, 1948년 가치로 4억 원에 해당하는 40만 루블은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인 김립에게 전달했다.

소련과의 외교관계에서 많은 족적

그런데 그 40만 루블은 임시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백범 김구는 이를 자금 유용이나 횡령으로 규정했다. <백범일지>는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 뒤 "한형권은 또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운동의 자금이라고 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고 비판한다.

이와 달리,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한 김철수는 1989년 여름호 <역사비평>에 실린 '김철수 친일 유고'에서 그 돈이 이동휘와 김립의 대일투쟁에 사용됐다고 진술했다. 자신들이 받아온 지원금을 다른 계파와 공유하기 싫어하는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한형권은 김립과 함께 이 유명한 배달 사고의 핵심 인물로 자주 회자되지만, 독립운동진영을 위해 소련과의 협력을 발전시키고 운동자금을 인수해온 그의 공로를 간과할 수는 없다.

1920년대 초반에 임시정부 내에는 임시정부를 고쳐 쓰자는 개조파와 새로 조직하자는 창조파가 있었다. 창조파는 1923년에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조선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때 한형권은 김규식·지청천·여운형 등과 함께 조선공화국 국무위원에 선출됐다. 조선공화국은 임시정부처럼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이 정부를 선포한 일은 일제를 부정하고 독립 정부를 갖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열망을 반영하는 한 장면이다.

민족자결주의에 가려진 우드로 윌슨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상당수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과의 제휴를 선택하는 원인이 됐다. 이들은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일본을 견제할 동맹을 찾고자 그 길을 택했다.

일찍부터 러시아에서 기반을 다져둔 한형권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진영이 모스크바로 고개를 돌리는 시기에 소련과의 외교관계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1920년대 전반에 한형권에 대한 독립운동 진영 내의 수요가 높았던 것은 '원조 트럼프'에 대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배신감을 상당부분 반영한다. 한형권은 미국에 실망한 한국인들의 수요에 부응하며, 제국주의 일본과 싸우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재원을 소련에서 얻어내는 데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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