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에서 열린 '혼신의 글쓰기 - 김윤식의 한국현대문학사' 전시
오길영
대학(원) 시절 내가 다닌 인문대학에는 4.19 세대 비평의 대표자인 김윤식(국문과), 김현(김광남, 불문과), 백낙청 선생(영문과, 이하 호칭 생략) 등이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김윤식, 김현의 강의는 수강하지 않았지만, 두 분의 이름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다른 고민이 많았기에 문학 공부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지는 못했지만, 그때가 내가 다녔던 인문대학의 전성기였지 싶다. 문학의 힘과 위상이 높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김현과 김윤식의 글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 일이다. 오래전 미국 유학 시절에 김현 전집을 들고 가서 통독했다. 많이 느끼고 배웠다. 김윤식이 쓴 <임화 연구>를 읽고 받은 인상은 강렬했다. 국문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한국 근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전시 중인 '혼신의 글쓰기: 김윤식의 한국현대문학사' 기획전을 다녀왔다. 기획전이 끝난 지는 좀 되었지만, 내가 받았던 감흥은 여전히 생생하다. 김윤식이 쓴 책, 원고, 사진, 집필 서재, 언론 인터뷰 동영상을 짜임새 있게 전시해서 그의 학문과 비평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전시 안내 중 아래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연구자로, 비평가로 제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했다면 그것이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서 힘이 되어 시방 저녁놀 빛, 몽매함에 놓인 제게 되돌아오고 있지 않겠는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표현자의 세계로 나아가게끔 힘이 되어 밀어주고 있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이르면 저는 말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예언자가 없더라도 이제는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것도 같다고."( 김윤식,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
이 구절에는 그것이 학문의 세계든 아니든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힘을 쏟는 사람이 가졌던 의지와 보람이 담겨 있다. 김윤식에게 그 일은 글을 읽고 쓰는 일, "표현자의 세계"였다. 이 구절을 읽으며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여기는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문학 연구자와 비평가로서 문학은 김윤식에게 삶의 일이었기에, 그리고 같은 세계에서 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표현이지만, 그것이 직업적인 일이 아닐지라도 문학은 일반 독자에게도 가까이하면 좋은 "다행"한 일일까?

▲폭도로 변한 윤석열 지지자들이 파괴한 법원윤석열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되자 일부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 내부로 난입해 불법폭력사태를 일으킨 지난 19일 오후 서부지법 내부가 파손돼 있다.
연합뉴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살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소설 혹은 시 한 편 읽어보지 못했기에, 혹은 좋은 영화 한 편이라도 뭔가 생각하며 보지 못했기에 저런 기이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행태를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란 사태 이후에, 특히 충격적인 서부지법 난입 폭동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물론 뛰어난 예술을 감상하는 안목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걸맞은 인격이나 품격을 갖추는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존재의 삶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감각과 인식에 충격을 주는 문학예술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한 문학예술의 역할을 논하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나는 김현의 이런 발언을 먼저 떠올린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은 김현이 다른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세상이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를 되묻게 한다. 문학은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정치와 법률의 한계를 돌아보게 한다. 민주주의는 사상과 발언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지만, 그 전제는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공감 능력을 토대로 한다.
그런 합의의 제도적 형태가 법치주의다. 자신과 다른 생각과 견해가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면서 폭력이 아니라 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법치주의 정신이다. 법원 폭동 사건에서처럼 법치주의를 폭력으로 무너뜨리는 이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그런 이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시적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라
좋은 문학을 읽고 느끼는 것이 단지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위 공적 정의를 담당하는 이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법률가에게도 꼭 필요한 요건이라는 걸 미국의 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책 <시적 정의>는 조목조목 알려준다.
저자가 미국의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 초청 강연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토대로 한 이 책은 문학적 상상력이 가르치는 시적 정의가 공적 정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모든 공적 정의는 루소가 말했듯이 "인간 존재의 약함"에 근거하지 않으면 사회적 무심함과 둔감함으로 이어진다.
왜 왕들은 그들의 백성에게 동정심을 못 느끼는가? 그들은 인간 존재의 인간됨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매정한가? 그들은 자신들이 가난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없다. 왜 귀족은 평민을 그토록 멸시하는가? 그들은 결코 평민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적 정의를 실천한다고 믿는 정치인이나 법률가는 정치 공학이나 법률 지식과 함께 시적 정의를 배워야 한다.
"휘트먼이 보여주듯, 시적 정의는 꽤 많은 비문학적 장치들-전문적인 법률 지식, 법의 역사와 판례에 대한 이해, 적합한 법적 공평성에 대한 세심한 주의 등을 필요로 한다. 재판관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하는 훌륭한 재판관이어야 한다. 하지만 충분히 이성적이기 위해 재판관들은 공상과 공감에 또한 능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휴머니티를 위한 능력까지도 배워야 한다. 이 능력 없이는, 그들의 공평성은 우둔해질 것이고 그들의 정의는 맹목적이 될 것이다." (누스바움, <시적 정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입구에서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우리는 시적 정의에 대한 고민이 없는 정치와 법이 내세우는 "공평성"이 어떻게 우둔해지고, "그들의 정의는 맹목적"이 되는지를 끔찍하게 경험하고 있다. 누스바움이 언급하듯이 뛰어난 문학작품은 법, 정치, 경제 등이 내세우는 인간에 대한 시각, 즉 인간을 숫자와 데이터 혹은 어떤 추상적 집단으로 뭉뚱그려 접근하는 태도를 문제 삼는다. 이런 태도가 파시즘의 정신적 뿌리다.
"그러한 문학적 통찰은 삶의 질을 측정하는 데 있어 최근의 경제학적 접근 방식 중 최선의 방법들의 기저를 이룬다. 개별적 인간 행위자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인간 삶의 질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기능을 고취시키는 데 이러한 정보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기에는 매우 불명확한 지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야기가 없는 계급 운동 이야기는 늘 개별적 삶의 개선을 추구하는 그러한 계급적 행동의 핵심과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누스바움)
기대하기 힘들지만 우리 시대의 정치인과 법률가가 개별적 삶의 의미를 신중하게 따져보는 "문학적 통찰"을 더 많이 배우길 기대한다. 내란 사태 이후에 민주주의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정치인, 법률가가 적지 않다는 걸 씁쓸하게 확인한다.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이들일수록 시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훈련이 부족하면 위임권력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백골단과 반공청년단의 시대착오적인 등장, 민주공화국의 기본인 법치주의를 부정하면서 법원에 난입하여 파괴를 일삼는 행동이 그런 사례이다. 나는 여기서 파시즘의 망령이 부활하는 모습을 확인한다. 이 망령을 억누르지 못하면 한국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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