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 9. 18.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 전경.
NARA/박도
미국이 주장하고 중국측이 동의한 전투계속의 원칙을 견지한 결과 양국의 손익은 어땠을까.
미국은 자신이 먼저 주장한 대로 협상기간 내내 북한을 폭격하고 지상전투를 벌였으나,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체결한 군사분계선과 1951년 11월 27일의 합의는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1953년 6, 7월 막판에 중국군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여 유엔군이 330제곱킬로미터 정도를 잃었고 그것을 군사분계선에 새로 반영하고 나서야 협정에 조인할 수 있었다. 결국 얻은 건 미세하고 잃은 건 2년이라는 긴 시간과 어마어마한 인명피해였다.
중국측도 마찬가지다. 인명피해가 대략 유엔군의 2배는 되는 것 같다. 상대방이 공세를 퍼붓다 지치기를 기다렸던 중국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의용군 병사들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비현실적인 질문이지만, 양측이 공세를 조절해 사상자가 반만 발생했다면 미국이든 중국측이든 협상에서 얻었을 것을 얻지 못했을까.
특히 미국의 군사적 압박이 완전히 실패한 사례는 상감령 전투다. 1952년 10월 포로협상이 결렬돼 휴전회담 자체가 무기휴회까지 된 상황에서 유엔군은 미군과 한국군을 동원해 김화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미군 7사단은 중국군의 방어에 막혀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작전지역 자체를 한국군에게 넘기는 치욕을 당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군은 여론에서 크게 질타당하며 조속히 휴전하라는 압박만 높아졌다. 군사적 압박으로 중국군과 인민군에게 1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혔다고 내세웠지만 협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휴전협상 기간에 벌어진 중동부 전선의 치열한 고지전은 양측의 젊은 장병들을 탄약고의 포탄마냥 소모품으로 쏟아부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6차 공세를 준비하려고 했던 중국측은 물론 특히 유엔군의 전쟁지휘부는 심각하게 반성할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았지만 전쟁의 제일 당사국으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다. 세상에 가장 무책임한 정치가의 발언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라는 단언이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다음의 3번 의제는 '정전 및 휴전에 관한 조항 수행을 감독하는 기관의 구성,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한 한국에서의 휴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협의'다. 압축하면 군사력 증강 금지와 휴전감시기구에 관한 협상이다.
의제 자체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휴전협상에서 거론된 쟁점은 광범위했다. 휴전협정에 조인할 때 어느 시점에 전투를 중지하고 비무장지대에서는 언제까지 철수할 것인가, 서해안의 연안도서를 어떻게 남북으로 나눌 것인가, 그와 연관되는 영해나 해상분계선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휴전협정 조인 후 쌍방의 병력 보급 장비 시설의 증강 또는 교체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하거나 금지할 것인가 등이다.
휴전감시기구 역시 협상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됐다. 휴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감시활동의 범위, 이와 연관되는 외국군의 철수 문제, 공동의 공중감시 방법, 군사력의 하나로서 북한의 비행장과 철도의 건설과 보수의 허용 여부, 비무장지대 조사를 위한 중립국 감시기구, 중립국으로서 소련 참여 여부 등이 있었다.
협상을 위해 만들어진 카드도 있고, 결렬되더라도 지켜야 할 최저선이 있다. 현장의 대표단과 후방의 지휘부 사이의 이견도 있고, 미국의 경우 군사적 요구와 합참의 외교적 검토가 엉키기도 했다. 협상장에서 제안하기도 하고 각국이 성명서로 발표하기도 했다.
협상 현장에서는 대표단의 본회의도 있었지만, 양측의 대표가 2명씩 참여하는 의제별 분과회의가 협상을 수행하기도 했다. 합의된 사항을 하나씩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문서화하는 작업은 참모장교회의에서 진행됐고, 회담의 진행을 지원하는 연락장교회의도 병행하여 열렸다. 설전과 타협, 제안과 맞제안을 반복하면서 느리지만 하나씩 하나씩 합의의 상자에 들어갔다.
양측은 군사분계선 합의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다른 의제들을 합의하기 위해 양측은 서둘렀다. 속도를 내기 위해 분과위원회를 적극 가동했다. 3번 의제 분과위원회가 12월 4일 시작되고, 11일부터는 4번 의제 포로교환 협상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차적인 협상시한인 1952년 12월 27일은 지나갔다. 새해가 되자 5번 의제도 협상을 시작했다. 5번 의제는 2월 중순 열흘 동안 여덟 차례의 본회의를 집중적으로 열어 빠르게 합의했다.
3번 의제는 끝없는 설전과 제안-맞제안이 오가던 끝에 두 개의 쟁점만 남았다. 북한 지역에 비행장 건설과 보수를 금지한다는 미국의 요구와, 휴전감시기구에 참여할 중립국으로서 소련을 포함시킨다는 중국측의 주장이었다. 미국은 소련을 실질적인 전쟁 당사국으로 간주하는데 중립국 감시자로 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체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미국 합참은 대표단에게 소련이 중립국이 아닌 이유를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냥 무조건 강하게 반대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북한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말라는 것은 군사력 증강을 제한하는 조치로 미국이 주장했다. 그동안 완벽하게 우세했던 제공권이 휴전협정 후에 흔들릴 것을 우려한 것이다. 북한은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고, 중국·소련 역시 미국의 제공권 견제 방안을 포기할 리 없었다.
결국 미국이 1952년 4월 4번 의제인 포로교환과 3번 의제에서 남아 있는 두 개의 논점을 일괄해서 타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3번 의제는 내용으로는 전부 타결될 가능성이 만들어졌으나 4번 의제인 포로교환과 연계되는 바람에 휴전협상 전체는 포로교환 문제 하나로 압축됐다.
이미 휴전협상을 시작한 지 열 달이 됐다. 그러나 포로교환 문제는 더 깊은 계곡과 더 험한 산이었다. 포로문제는 한국전쟁의 민족적 비극과 국제전으로서 얽힌 문제가 집약돼 드러났다.
1951년 11월 27일 군사분계선 가조인을 하자 앞으로 30일이면 휴전협상이 전부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일으켰을 것이다. 특히 아들이나 남편 또는 아버지가 전선에 나가 있는 세계 각국의 모든 가족들에게 큰 기대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30일 이내라는 합의가 준 기대에 비해 결과는 절망에 가까웠다.
그때까지 휴전협상을 해 온 게 9개월이었는데, 하나 남은 포로문제가 합의되는 데 또다시 14개월을 더 끌어가고 끌려다녀야 했다. 후방의 국민이든 인민이든, 전선의 병사든 희망고문 아래 끝 모르게 계속되는 전투에 지치고 지쳐갔다.
▲1951. 7. 22. 청진, 미 군함이 동해에서 북한진지를 향해 맹렬히 함포 사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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