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25 15:57최종 업데이트 25.01.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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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7. 25.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장NARA/박도

1951년 10월 25일 유엔군의 추계공세가 끝난 뒤에 휴전협상 본회담이 판문점에서 재개됐다. 다섯 개 의제 가운데 두 번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협상이 시작됐다.
군사분계선은 어느 선에서 전투를 멈추느냐는 것이고, 그건 곧 점령지나 영토를 나누는 것이었으니 휴전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의제였다. 양측은 7월 10일 회담을 시작하고 중간에 두 달 동안 중단되기도 했지만 4개월여 만에 합의하고는 11월 27일 가조인까지 했다.

번복과 궤변과 강압의 비빔밥

처음에는 양측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쟁점은 군사분계선을 38도선(중국)으로 할 것인가, 현재의 지상접촉선(미국)으로 할 것인가였다. 38도선은 한국전쟁 이전으로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고, 접촉선은 전황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의제 자체에 38도선이라는 말을 넣어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했고 미국은 강력하게 거부했다.


양측은 그때그때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내세웠다. 미국은 개전 초기에는 38도선을 주장했으나, 휴전협상 시점에서는 접촉선으로 입장을 바꿨다. 유엔군이 중동부전선에서 이미 38도선을 돌파했으니 전투로 확보한 점령지를 협상으로 내줄 리가 없었다.

또 하나의 쟁점은 개성이었다. 미국은 군사적인 이유에서 개성을 군사분계선 남측으로 확보하거나 최소한 비무장지대로 묶어두려고 했다. 중국측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미국은 휴전협상 때문에 개성을 공격하지 않고 점령하지 않았으니 개성을 내놓으라고 주장했다. 중국측은 똑같은 이유로 자신들이 문산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미국이 수도 서울의 방어에 개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자 북한의 수도 방어에 개성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맞받았다.

미국은 압록강 하구에서 황해도 연안에 이르는 서해에서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는 연안도서들과 개성을 교환하자는 제안도 했다. 그러자 중국측은 육군·공군을 동원해 압록강과 청천강 하구의 14개 도서를 점령해 버렸다. 해군력이 약했던 중국측은 서해 5도까지 공격하지는 못했다. 중국측은 개성에 방어군을 증강하는 한편 유엔군이 돌출된 지점이나 대대급 이하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골라 공격했다. 협상을 위한 전술적인 반격이었다.

유엔군이 중동부 전선에서 하계·추계 공세를 벌여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해안분지, 김화, 철원 등지를 공격하자, 협상장에서 중국측은 유엔군이 확보한 지역에서 철수하면 서해에서 옹진반도와 연안도서를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미국은 수용하지 않았다.

적대적인 쌍방의 협상은 번복과 궤변과 강압의 비빔밥이다. 사실 미국이 최초로 제안한 군사분계선은 당시의 접촉선보다 훨씬 북쪽이었다. 유엔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당시의 접촉선보다 북쪽으로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측이 수긍할 리 없었다.

나는 미국이 처음 제안한 군사분계선의 위치를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전쟁 기념관에서 보았다. 양측이 최종 조인한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대비한 지도였다. 차이가 꽤나 컸다. 미국으로서는 그 제안이 협상의 목표가 아니라 협상을 끌고 가기 위한 카드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전시한 지도는 미국의 궤변을 힐난하고 조롱하는 느낌이었다.

미국이 최초 제안한 군사분계선과 양측이 최종 조인한 군사분계선.봉주영

양측 모두 전장에서 확보하지 못한 것은 협상으로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은 제공권 제해권 보상을 포기하고 개성도 포기했다. 중국측은 38선 주장을 접고 미국의 접촉선 원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접촉선을 어느 시점으로 하느냐가 쟁점이 됐다. 휴전협상을 시작한 시점인가, 군사분계선을 합의하는 순간인가, 그게 아니면 군사분계선 이외의 모든 의제도 합의해 휴전협정을 조인하는 시점인가. 군사분계선은 곧 어느 시점에 정전을 하느냐와 하나의 문제가 됐다.

휴전회담 첫 회의에서 전투계속의 원칙을 천명한 바 있는 미국은 협정을 최종적으로 조인하는 시점의 접촉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북한은 조기 종전을 원했기 때문에 미국의 접촉선 주장을 수용해 군사분계선을 정하는 즉시 전투를 중지하자는 것이었다.

리지웨이와 협상 대표단은 군사분계선의 시점 문제에서도 강경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소련과 다각도로 외교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협상 대표단의 반대의견을 누르면서 합의하는 방향으로 진행시켰다.

결국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되 30일 이내에 다른 의제가 전부 합의되지 않으면 군사분계선을 다시 협상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협정문 초안에 가조인을 했다. 이로써 휴전협상은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통과했다. 휴전협상은 곧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할 만했다.

이 단계까지의 협상결과에 대해 양측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미국은 하계·추계 공세로 압박한 것이 회담을 재개하고 협상을 진척시키는 데 주효했다고 판단했다. 휴전회담은 두 달 만에 재개됐고, 회담장소도 이전했고, 군사분계선도 접촉선으로 관철했다. 유엔군이 하계추계 공세에서 중국군에게 입힌 인명피해는 유엔군이 추산한 숫자로는 무려 23만4000여 명에 달했다.

게다가 10월 19일 북한이 소련 중국과의 사전협의도 없이 유엔을 향해 조속한 정전을 호소한 것도 미국이 군사적으로 압박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때 소련 중국 북한 사이에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미국의 발목을 동아시아에 계속 잡아두고 싶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휴전협상은 조기에 합의하기보다는 강경하게 대처해 장기화하기를 바랐다. 결국 세 나라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

누구보다도 정전이 급했던 북한이 소련이나 중국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은 채 외교부장 박헌영이 11월 19일 대유엔 호소문을 발표했다. 전투를 즉시 중지하는 것을 제일 앞에 내세우고, 미국의 폭격이 야만적이라고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협상과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북한 주재 소련대사가 스탈린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중국측의 평가는 달랐다. 유엔군이 대규모 공세를 취했으나 오히려 상당한 피해를 입고 회담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자신들의 인명피해는 밝히지 않은 채 유엔군 사상자에 대해 유엔군 자체 집계의 2배가 넘는 숫자를 운위하며, 유엔군이 북으로 밀고 들어온 면적이 646제곱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했다.

실제로 유엔군의 공중폭격은 잔인성으로 악명을 떨치긴 했지만 효과는 충분하지 않았다. 미 공군 작전부에 따르면 폭격 정확도는 7%에 불과했고 그나마 중국과 북한이 신속한 보수로 맞서는 바람에 전략적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 정보부는 1951년 12월 "공중폭격으로 평양철도를 봉쇄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철도보수 요원과 교량건설 요원들이 모든 주요 간설철도를 소통시켰다"고 분석했다. 1952년 봄 유엔군은 "10개월간의 철도 차단공격으로도 미국의 휴전조건을 중국측이 강요할 만한 치명적인 손해를 끼치지는 못했다"고 시인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은 제공권 자체가 압도적이었지만 협상장에서는 압도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엔군의 하계·추계 공세가 미국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특히 유엔군의 사상자가 6만여 명은 중국군과 비교하면 작지만 그 자체로 엄청난 인명손실이었다. 미국 정부가 유엔군 파병 동맹국과 자국민을 상대로, 이왕 시작한 휴전협상까지 결렬시키고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설득하는 데 상당한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의 군사적인 압박은 중국측만을 일방적으로 압박한 게 아니고 반사작용으로 미국 자신에게도 일정한 압박이 됐다는 것이다.

얻은 건 미세하고 잃은 건 어마어마 했다

1952. 9. 18.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 전경.NARA/박도

미국이 주장하고 중국측이 동의한 전투계속의 원칙을 견지한 결과 양국의 손익은 어땠을까.

미국은 자신이 먼저 주장한 대로 협상기간 내내 북한을 폭격하고 지상전투를 벌였으나,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체결한 군사분계선과 1951년 11월 27일의 합의는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1953년 6, 7월 막판에 중국군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여 유엔군이 330제곱킬로미터 정도를 잃었고 그것을 군사분계선에 새로 반영하고 나서야 협정에 조인할 수 있었다. 결국 얻은 건 미세하고 잃은 건 2년이라는 긴 시간과 어마어마한 인명피해였다.

중국측도 마찬가지다. 인명피해가 대략 유엔군의 2배는 되는 것 같다. 상대방이 공세를 퍼붓다 지치기를 기다렸던 중국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의용군 병사들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비현실적인 질문이지만, 양측이 공세를 조절해 사상자가 반만 발생했다면 미국이든 중국측이든 협상에서 얻었을 것을 얻지 못했을까.

특히 미국의 군사적 압박이 완전히 실패한 사례는 상감령 전투다. 1952년 10월 포로협상이 결렬돼 휴전회담 자체가 무기휴회까지 된 상황에서 유엔군은 미군과 한국군을 동원해 김화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미군 7사단은 중국군의 방어에 막혀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작전지역 자체를 한국군에게 넘기는 치욕을 당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군은 여론에서 크게 질타당하며 조속히 휴전하라는 압박만 높아졌다. 군사적 압박으로 중국군과 인민군에게 1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혔다고 내세웠지만 협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휴전협상 기간에 벌어진 중동부 전선의 치열한 고지전은 양측의 젊은 장병들을 탄약고의 포탄마냥 소모품으로 쏟아부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6차 공세를 준비하려고 했던 중국측은 물론 특히 유엔군의 전쟁지휘부는 심각하게 반성할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은 한국전쟁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았지만 전쟁의 제일 당사국으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다. 세상에 가장 무책임한 정치가의 발언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라는 단언이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다음의 3번 의제는 '정전 및 휴전에 관한 조항 수행을 감독하는 기관의 구성,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한 한국에서의 휴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협의'다. 압축하면 군사력 증강 금지와 휴전감시기구에 관한 협상이다.

의제 자체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휴전협상에서 거론된 쟁점은 광범위했다. 휴전협정에 조인할 때 어느 시점에 전투를 중지하고 비무장지대에서는 언제까지 철수할 것인가, 서해안의 연안도서를 어떻게 남북으로 나눌 것인가, 그와 연관되는 영해나 해상분계선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휴전협정 조인 후 쌍방의 병력 보급 장비 시설의 증강 또는 교체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하거나 금지할 것인가 등이다.

휴전감시기구 역시 협상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됐다. 휴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감시활동의 범위, 이와 연관되는 외국군의 철수 문제, 공동의 공중감시 방법, 군사력의 하나로서 북한의 비행장과 철도의 건설과 보수의 허용 여부, 비무장지대 조사를 위한 중립국 감시기구, 중립국으로서 소련 참여 여부 등이 있었다.

협상을 위해 만들어진 카드도 있고, 결렬되더라도 지켜야 할 최저선이 있다. 현장의 대표단과 후방의 지휘부 사이의 이견도 있고, 미국의 경우 군사적 요구와 합참의 외교적 검토가 엉키기도 했다. 협상장에서 제안하기도 하고 각국이 성명서로 발표하기도 했다.

협상 현장에서는 대표단의 본회의도 있었지만, 양측의 대표가 2명씩 참여하는 의제별 분과회의가 협상을 수행하기도 했다. 합의된 사항을 하나씩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문서화하는 작업은 참모장교회의에서 진행됐고, 회담의 진행을 지원하는 연락장교회의도 병행하여 열렸다. 설전과 타협, 제안과 맞제안을 반복하면서 느리지만 하나씩 하나씩 합의의 상자에 들어갔다.

양측은 군사분계선 합의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다른 의제들을 합의하기 위해 양측은 서둘렀다. 속도를 내기 위해 분과위원회를 적극 가동했다. 3번 의제 분과위원회가 12월 4일 시작되고, 11일부터는 4번 의제 포로교환 협상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차적인 협상시한인 1952년 12월 27일은 지나갔다. 새해가 되자 5번 의제도 협상을 시작했다. 5번 의제는 2월 중순 열흘 동안 여덟 차례의 본회의를 집중적으로 열어 빠르게 합의했다.

3번 의제는 끝없는 설전과 제안-맞제안이 오가던 끝에 두 개의 쟁점만 남았다. 북한 지역에 비행장 건설과 보수를 금지한다는 미국의 요구와, 휴전감시기구에 참여할 중립국으로서 소련을 포함시킨다는 중국측의 주장이었다. 미국은 소련을 실질적인 전쟁 당사국으로 간주하는데 중립국 감시자로 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체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미국 합참은 대표단에게 소련이 중립국이 아닌 이유를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냥 무조건 강하게 반대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북한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말라는 것은 군사력 증강을 제한하는 조치로 미국이 주장했다. 그동안 완벽하게 우세했던 제공권이 휴전협정 후에 흔들릴 것을 우려한 것이다. 북한은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고, 중국·소련 역시 미국의 제공권 견제 방안을 포기할 리 없었다.

결국 미국이 1952년 4월 4번 의제인 포로교환과 3번 의제에서 남아 있는 두 개의 논점을 일괄해서 타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3번 의제는 내용으로는 전부 타결될 가능성이 만들어졌으나 4번 의제인 포로교환과 연계되는 바람에 휴전협상 전체는 포로교환 문제 하나로 압축됐다.

이미 휴전협상을 시작한 지 열 달이 됐다. 그러나 포로교환 문제는 더 깊은 계곡과 더 험한 산이었다. 포로문제는 한국전쟁의 민족적 비극과 국제전으로서 얽힌 문제가 집약돼 드러났다.

1951년 11월 27일 군사분계선 가조인을 하자 앞으로 30일이면 휴전협상이 전부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일으켰을 것이다. 특히 아들이나 남편 또는 아버지가 전선에 나가 있는 세계 각국의 모든 가족들에게 큰 기대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30일 이내라는 합의가 준 기대에 비해 결과는 절망에 가까웠다.

그때까지 휴전협상을 해 온 게 9개월이었는데, 하나 남은 포로문제가 합의되는 데 또다시 14개월을 더 끌어가고 끌려다녀야 했다. 후방의 국민이든 인민이든, 전선의 병사든 희망고문 아래 끝 모르게 계속되는 전투에 지치고 지쳐갔다.

1951. 7. 22. 청진, 미 군함이 동해에서 북한진지를 향해 맹렬히 함포 사격하고 있다.NARA/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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