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26 19:38최종 업데이트 25.01.2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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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친일파들의 건강이 언제 가장 약했는지를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건강 문제를 가장 많이 호소하고 이것이 대중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시기는 1949년 상반기다. 그해 2월 15일 자 <경향신문> 내용이다.

"지난 7일 중추원 참의 박중양이가 기관지 페염으로 보석된 후, 10일에는 방의석이가 심장병으로, 12일에 이르러는 김우영이가 당요병으로 서울 세부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한다. 이로써 체포된 반민자 중 세 명이 보석된 세음인데, 14일에는 이승우에 대하여서도 심장염 재발이라는 이유로 그의 안해가 보석을 신청하여 왔고, 동일(同日) 박흥식도 대장병이라고 진단서를 제출하였다 한다."


반민자(反民者)로 불리는 친일파들이 건강을 핑계로 대는 일은 계속해서 문제가 됐다. 4월 22일 자 <경향신문>은 전날 보석으로 출소한 박흥식을 거론하면서 "반민자의 칭병 보석이 잦아서 의아와 실망의 탄(嘆)이 없지 않더니 필경에는 터지고 말아"라고 탄식했다.

이런 현실을 보다 못한 서울 상도동의 강(康) 아무개는 6월 3일 자 <경향신문> 독자 투고를 통해 "반민 피의자는 끄덕하면 '신병(身病)이니 보석한다', '노쇠이니 보석한다', '도주 염려 없으니 보석한다' 함은 실로 가증한 일"이라고 평했다. 그는 자신도 3·1운동 뒤에 평양감옥에서 병을 앓았지만 5~6개월간 그대로 갇혀 있었다면서 "어떤 애국자는 중병에 걸려 보석을 청해도 보석은커녕 옥사(에)도 시체도 곧 안 내주었"다고 탄식했다.

평양감옥의 그 애국자는 보석 신청을 거부당했음은 물론이고 순국 뒤에도 한동안 감옥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청산 작업이 활발했던 1949년 상반기의 친일파들은 이런저런 병을 핑계로 감옥문을 열고 나갔다. 친일파 체포·구속이 대대적으로 단행되고 그중 상당수가 병을 핑계로 빠져나간 이 시기에는 친일파들의 건강이 기록상으로 역사상 최악이었다.

이때 심장이 안 좋다며 보석을 청구한 위 신문 기사 속 방의석은 인체기관 중에서 심장과 연관될 만한 친일 발언들을 남겼다. 총독부 기관지인 1942년 5월 11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그는 한국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찬미하면서 "감격에 견디지 못하겠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그냥 '감격했다'고 하면 될 것을 '감격에 견디지 못하겠다'고 특별히 강조했기 때문인지, <매일신보> 편집부는 기사 제목을 '오직 감격에 불감(不堪) - 방의석 중추원 참의 담(談)'으로 잡았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방의석 편에 따르면, 그는 중국 북부 및 중부에 가서 일본군을 위문한 경험을 1941년 3월호 <삼천리> 기고문에 담았다. 여기서는 "나는 그동안 북지(北支)·중지(中支)를 황군 위문의 여행으로 약 1개월 동안 다녀와서 그 400여 주 넓은 벌에서 창건되어 가고 있는 신동아의 새 광경을 감격으로서 목도하고"라고 썼다.

지원병 참여 독려도 하고 친일 기고문도 써

방의석자료사진

일제를 지켜보며 감격을 많이 한 방의석은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895년에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했다. 북청 극명학교 보습학과를 졸업한 지 10년 뒤인 1921년부터 그가 일관되게 걸은 것은 사업가의 길이다.

이사나 감사 경력을 빼고 그가 사장이나 대표로 일한 곳만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북선자동차상회·북청전등주식회사·북청금융조합·함흥택시주식회사·밀양정미소주식회사·함남창고주식회사·혜산진'주조'주식회사·국경척림주식회사·함경목재주식회사·북청자동차운수·북청주조주식회사·양덕수리조합·북선교통주식회사·대성주조주식회사·육대수사공업주식회사·함남수산주식회사·함남여객자동차주식회사다.

회사 설립만으로도 바빴을 그는 친일에도 열성을 다했다. 친일단체인 시중회의 평의원, 사상범을 감시하는 함흥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 전쟁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또 의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국회의원 격인 중추원 참의를 2회 역임하고, 광역지방의원 격인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3회 역임하고, 읍 의원도 2회 역임했다.

굵직한 기부 이력도 있다. 1933년에는 고사기관총을 헌납하고, 군국주의단체인 함흥국방의회에 8백 원을 헌납했다. 1931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서울의 전화 교환수가 하루도 쉬지 않고 한 달 내내 일할 경우의 최고 월급은 20원 정도였다. 방의석이 기부한 8백 원은 서울의 전화교환수가 40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전화를 연결해줘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1939년에는 일본 육군에 자동차 1대를 기부하고, 1941년에는 육군과 해군에 애국기를 각 1대씩 헌납했다. 이에 더해, 지원병 참여를 독려하는 대중강연도 하고 친일 기고문도 썼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친일파들은 한일 군사협력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세계침략전략을 수립하고 식민지 한국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형태의 군사협력이었다. 이를 돕고자 그들은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과 공출을 합리화했다. 방의석은 이런 협력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자 백제 도읍 부여를 한일 협력의 성지로 띄우는 역사왜곡에 가담했다.

그는 일제 침략전쟁이 한창일 때 발표된 위 <삼천리> 기고문에 "부여는 어릴 때부터 늘 들어오는 고도로, 여기에 발걸음을 내리자 첫째 그 산천의 수려에 놀랐고, 둘째 여기 천여 년 전 내선(內鮮)의 굳은 악수가 이루어졌던 사실(史實)을 회상하여 감격하였습니다"라고 썼다. 내지 일본과 조선의 굳은 악수가 이미 천여 년 전에 이뤄졌다는 역사왜곡을 통해 일제 침략전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으로 도망하려는 직전에 체포"

그런 친일행위에 시간과 노력과 금전을 많이 바쳤지만, 그에게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면서 고액 연봉을 받았다. 친일과 사업을 병행했기 때문에 사업상 편의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회사 차리기 힘든 그 시절에 그토록 많은 주식회사를 창립할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었겠는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친일재산과 더불어 표창도 많이 주어졌다. 1933년·1936년·1939년에는 고액 기부자라는 이유로 총독부 표창을 받았다. 1935년에는 총독부로부터 시정25주년기념 표창을 받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부터 유공장을 받았다. 1940년에는 일본 건국 2600주년을 전제로 하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사업도 많이 하고 친일도 많이 한 방의석은 친일 사업가치고는 이례적인 행보를 해방 뒤에 시도한다. 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가 본격화된 1949년 1월에 일본 밀항을 계획한 일이 그것이다. 그달 15일 자 <조선일보>는 그가 함경북도에서 도피해 남한에 왔다면서 "비겁하게도 삼척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하려는 직전에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사업 본거지인 함경도가 공산정권의 영역이 되어 그곳에서 재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밀항 결심이 수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반민특위에 붙들려 구속된 그는 심장에 문제가 있다며 보석을 청구했다. 이 청구는 받아들여졌다. 2월 17일 자 <조선일보>는 "지난 10일 심장염으로 보석되어 시내 게동(계동) 조내과의원"에 입원 중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사건이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로 이첩된 뒤 다시 붙들린다. 위 기사에 따르면, 반민특위 검찰관 서용길은 "형법상 내란죄는 가장 중죄인데, 반민법 해당자는 내란죄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를 재구속했다. 내란죄 피고인과 다를 바 없는 중죄인에게는 처음부터 보석을 해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방의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27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번에는 서울대학부속병원 내과과장 및 세브란스병원 내과과장의 진찰을 거쳐 '동맥성 고혈압증, 좌심실비대증, 심장성 천식증의 악질성이 농후해 급사가 우려된다'는 진단을 받아내 구속해제처분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은 "1949년 보석과 구속을 반복하다가 8월에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라고 알려준다. 급사 우려 판정을 받은 그는 9년 뒤인 1958년 10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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