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18 19:58최종 업데이트 25.01.1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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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이 밝았다. 푸른 뱀의 해다. 12간지 중 뱀이 용에 이어 여섯 번째가 된 사연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용이 일으킨 구름에 무임 승차해 들어왔다는 설도 있고 용 뒤에 오던 말의 발굽에 숨어있다 말을 놀라게 한 후 먼저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뱀은 음흉하지만 지혜를 겸비한 동물로 묘사된다.

서양에서 뱀은 치유와 재생을 상징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뱀이 허물을 벗는 과정을 재생의 표상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뱀의 독을 치료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서 뱀의 도상을 볼 수 있는 이유다.


한편으로 을사년은 우리 민족에게 을사늑약이라는 아픈 기억을 남긴 해이기도 하다. 120년 전 일제는 대한제국과 불평등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외교권을 박탈하고 본격적인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1910년 경술국치를 겪으며 35년 간 일제강점기를 맞이했다.

2025년 설을 앞두고 대한민국은 치유 중이다. 불법적 비상계엄의 여파로 아직 마음 한쪽이 시리지만 다행히 우리는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다. 과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힘쓰고 있는 중이다. 올해 설만큼은 가족·친지들과 둘러앉아 가벼운 술과 음식으로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마땅하다.

다행히 태초부터 맥주는 뭉친 어깨와 마음을 풀어주는 음료였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한 이번 설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마시기에는 무언가 허전하다. 다행히 조상들이 드시고 남긴 음식이 옆에 있다. 2025년 설을 차례 음식과 맥주를 즐기는 멋진 파티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서로 사맛디 아니할 것 같은 설음식과 맥주의 맛남, 그 비기를 살짝 공개한다.

육적에는 앰버에일

충북 음성에 소재한 생극양조 앰버에일윤한샘

옛 차례상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평상시에 쉽게 먹기 힘들었던 육적이 아니었을까? 육적은 소고기 우둔살을 간장 양념에 구워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 지방이 없어 다소 질기긴 하지만 짭짤한 감칠맛과 육향이 일품이다.

육적을 떡국 반찬으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올해는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 맥주를 만나면 비로소 답이 보인다. 맥주의 탄산은 음식을 만나 여러 역할을 한다. 매운맛과 지방을 중화시켜 준다거나 질긴 음식을 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단계는 지금부터다. 육적의 감칠맛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맥주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적당한 맥주가 있다. 신기하게도 어두운 색을 띠는 맥주는 간장 양념을 만났을 때 감칠맛을 배가해 준다.

먼저 떠오르는 스타일은 어두운 맥아에서 나오는 볶은(roasted) 향을 품고 있는 맥주들이다. 앰버 색을 가진 메르첸과 앰버 에일, 짙은 갈색을 띠는 브라운 에일, 둔켈, 그리고 고동색 포터와 스타우트 같은 맥주들은 육적의 감칠맛을 폭발시킨다.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이 만나 긍정적인 맛을 형성하는 것을 맥주 푸드 페어링에서 합성(synthesis) 효과라고 한다.

그중 이번 설에 올린 육적에는 앰버 에일이나 브라운 에일을 추천한다. 적당한 탄산과 어두운 맥아 향이 육적을 부드럽고 맛있게 해 줄 수 있다. 또한 뭉근한 쓴맛은 단맛과 균형감을 이뤄 한 접시를 깔끔하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번 기회에 맥주가 선사하는 푸드 페어링의 진수를 경험해 보길.

산적에는 아메리칸 IPA

시에라 네바다 IPA윤한샘

산적은 고기와 야채 등을 꼬치에 꽂아 구운 요리를 말한다. 원래는 불에 구운 요리를 의미하지만 차례상에는 달걀물을 둘러 기름에 구운 전 같은 형태로 올라간다. 재료는 다양하다. 보통 소고기, 닭고기, 고추, 당근, 버섯, 게맛살, 두부 등이 사용된다.

이런 산적에는 아메리칸 인디아 페일 에일(IPA)이 잘 어울린다. 짙은 자몽, 탠저린, 소나무, 베리 향을 가진 아메리칸 IPA는 복잡한 향미를 가진 음식과 부대끼지 않는다. 햄버거처럼 감칠맛, 신맛, 단맛뿐만 아니라 야채와 토마토까지 다채로운 풍미를 가진 음식에 IPA를 추천하는 이유다.

산적은 햄버거처럼 고기, 야채 같은 재료에서 나오는 풍미와 달걀의 고소함 그리고 기름의 느끼함까지 갖고 있다. 시트러스한 아메리칸 IPA는 따로 노는 산적의 향을 거스르지 않고 품어준다. 게다가 높은 쓴맛은 느끼함을 깨끗하게 정리해 줄 수 있다.

육전에는 트리펠

베스트말레 트리펠윤한샘

육전은 언제나 식욕을 자극한다. 담백한 소고기를 둘러싼 달걀의 고소함은 젓가락질을 부추긴다. 하지만 기름이 문제다. 전을 감싸고 있는 눅눅하고 질퍽한 기름은 식욕을 없애고 속도 더부룩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을 한방에 사라지게 할 맥주가 있다. 밝은 황금색 외관에 높은 알코올을 가진 트리펠이다.

트리펠의 9% 알코올은 입안 가득한 기름기를 깔끔하게 제거한다. 은근한 배향과 뒤쪽에서 올라오는 수지 향은 육전에 고급스러운 향을 부여한다. 게다가 높은 탄산은 질긴 육질을 잘게 녹여 부드럽게 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트리펠은 육전을 최고급 소고기 요리로 바꿔 놓는다.

이 조합에서 조심할 것은 칼로리. 육전과 트리펠의 만남은 새해 다이어트를 계획하고 있는 당신을 바로 무너뜨릴 수 있다. 주지육림의 후과가 두렵다면 맥주와 고기, 모두 조금씩 그러나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하자.

어전에는 람빅

깐띠용 람빅윤한샘

물고기는 차례 상의 단골손님이지만 '치'로 끝나는 물고기와 붕어와 잉어처럼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예외다. 그래서인지 어전의 주인공은 언제나 동태다. 흰 살 생선이라 담백하고 비린 향도 없다. 살도 부드러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초간장은 동태전의 단순한 맛을 보완하고 기름기를 낮춰주는 단짝이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동태전에 람빅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면 어떨까? 람빅은 짜르르한 신맛과 깨끗한 바디감을 가진 벨기에 야생발효 맥주다.

람빅은 동태전의 완벽한 비서처럼 능력과 기품을 겸비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람빅의 신맛은 동태전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혀 위를 맴돌던 지방을 말끔하게 제거한다. 또한 신선한 과일 향은 차례 준비로 지쳤던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북돋아 준다. 마지막으로 끝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쿰쿰한 페놀릭 향은 마치 삭힌 홍어 향처럼 기름으로 지쳐있던 코를 뻥 뚫리게 한다. 식욕이 폭발하는 마법, 동태전의 완벽한 비서, 람빅에게 기대해 보길.

약과에는 플란더스 레드 에일

플란더스 레드 에일 로덴바흐 그랑크뤼윈비어 홈페이지

언제부터인지 약과는 한국을 대표하는 간식이 됐다. 쫀득하지만 푸석한 식감, 입안 채우는 단맛 그리고 결결이 스며있는 기름까지, 약과는 외면하기 힘든 디저트다. 요즘은 커피, 케이크, 쿠키, 스무디 같은 다양한 간식과 어울리는 친화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달짝지근한 약과에 플란더스 레드 에일은 최고급 페어링을 약속한다. 체리, 라즈베리, 신선한 자두 향뿐만 아니라 섬세한 신맛과 뭉근한 단맛을 모두 갖추고 있는 플란더스 레드 에일은 약과와 천생연분이다.

플란더스 레드 에일의 신맛은 약과의 단맛을 포근히 받쳐준다. 체리와 자두 향이 단맛과 신맛을 감싸줄 때 자잘한 탄산은 혀 위의 지방을 서서히 녹인다. 완벽한 밸런스 그 자체. 약과를 이보다 맛있게 먹는 방법은 찾기 힘들다. 플란더스 레드 에일의 색도 약과와 어울린다. 갈색의 약과와 붉은색의 플란더스 레드 에일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어지간한 고급 디저트 자태 못지않다.

맥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맛보는 새해가 되길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일제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년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120년이 흐른 지금, 그때와 달리 우리는 헌법을 유린한 권력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다시 증명하고 있다.

2025년 을사년부터는 을씨년스럽다는 춥고 으스스한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듯하다. 뱀의 재생과 치유 능력이 대한민국을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설에는 가족 친지와 둘러앉아 돌아온 일상을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설음식 곁에 있는 맥주가 우리 사회가 행복한 방향으로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소소한 행복의 소중함을 가슴 저리게 느끼는 을사년 설이 되길,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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