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승렬 초대 검찰총장
국가기록원
비상계엄을 저지르고 관저에서 농성전을 펼치다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은 정치검찰 몰락의 상징적 장면으로 훗날 기억될 만하다. '권력의 시녀'로 불렸던 검찰은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군부정권이 동요하고 법치주의가 강조되는 속에서 위상을 높이다가, 2019년 이후 검찰개혁에 맞서며 대통령 윤석열을 배출하고 검찰공화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정부와 여당 내에서 검찰 출신들의 위상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정치검찰의 그 같은 모습은 초대 검찰총장 권승렬(1895~1980)의 궤적과 정반대다. 권승렬은 이승만 정부의 검찰총장 및 법무부 장관이라는 한계를 띠면서도, 지금의 정치검찰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인권과 민족을 생각하는 검사였다.
단골 고객이 독립운동가였던 변호사
정부수립 직후의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내에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있었다. 1948년 8·15 정부수립과 함께 법무부 차관이 됐다가 11월 4일 검사총장(대검찰총장) 취임식을 가진 권승렬은 그 뒤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참여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11월 30일에 국회가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검찰관(검사)으로 권승렬·노일환·곽상훈 등 9인을 선출한 일을 설명한 뒤 "12월 4일 현직 검찰총장인 권승렬이 특별검찰관장에 선출되었고, 국회의원 노일환이 검찰차장으로 결정되었다"라고 기술한다.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를 이끌며 친일파 기소 및 재판을 지휘한 권승렬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와 일제를 상대하는 항일 변호사였다. 일본군이 동학혁명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며 조선 땅을 침범하고 갑오경장(갑오개혁)을 강요한 이듬해인 1895년이 그의 출생 연도다. 출생지가 경북 안동이라는 기록도 있고 서울이라는 기록도 있다. 호적부에는 지금의 서울 무교동이 본적으로 기재돼 있다.
서당과 소학교를 거쳐 1908년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부에 입학한 그는 일제 강점 이듬해인 1911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제 관료의 길을 걷는다. 2009년도 <지역과 역사> 제25호에 실린 서용태 당시 부산대 강사의 논문 '1920~1930년대 권승렬의 변호사 활동'에 따르면, 20세 때인 1915년에 조선총독부 판임관견습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부터 개성 인근의 황해도 연백군청에서 견습 생활을 했다. 정식 판임관이 된 것은 1년 뒤다.
판임관은 기관장이 군주에게 보고한 뒤 임명하는 관직이었다. 지방 군청에서는 판임관급의 직원이 얼마 되지 않아 '나리'라는 경칭으로 불렸다. 21세 때부터 나리 호칭을 듣게 된 권승렬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2월에 함경도 인근이자 벽지로 평가되는 황해도 곡산군청으로 전보됐고 그로부터 4개월이 좀 안 되는 6월 4일에 사표를 썼다.
위 논문에 따르면, 그는 <털어놓고 하는 말>이라는 책에 실린 '각하,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라는 글에서 군청 일을 그만둔 뒤 독립운동을 하고자 상하이에 갔었다고 회고했다. 얼마 안 있어 귀국한 그는 27세 되는 1922년에 도쿄 주오대학 법과에 입학하고, 3년 뒤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대학을 졸업한 것은 이듬해인 1926년이다.
변호사가 된 권승렬에게는 의뢰인들이 넘쳐났다. 일제 경찰들이 잡아들이는 독립 투사들이 그의 단골 고객이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인 조선공산당 사건, 간도공산당사건, 광주학생운동, 여운형 체포 사건, 안창호 체포 사건 등에서 활약했다.
위 논문에 인용된 총독부 법무국 법무과의 1930년도 <변호사 인가 신청에 관한 서류>에 따르면, 1929년에 권승렬 변호사사무소가 벌어들인 수입은 4100원이다.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비슷한 중추원 참의 김영진이 1929년에 받은 연봉이 1500원이다. 이를 감안하면 4100원은 큰 수입이지만, 2개 이상의 사무소를 운영했으므로 직원 봉급과 사무소 경비를 뺀 나머지가 권승렬의 실제 수입이다.
권승렬 사무소는 1929년에 총 42건을 수임했다. 42건 중 6건은 형사사건이고, 여기서 발생한 수입은 100원이다. 6건 중에서 수입이 발생한 것은 2건뿐이고, 그중 1건은 국선 사건이다. 1930년에는 총 38건을 수임해 3470원을 벌었다. 이 중에서 형사는 8건이고 수입은 0원이다. 그가 독립운동 변호 사건에서 호황을 누린 이유를 알려주는 수치다.
일제 관헌에 붙들린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해 주고 그들의 건강과 인권을 챙긴 것은 독립운동의 범주에 속한다. 적에게 사로잡힌 독립투사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가급적 빨리 꺼내기 위한 활동이었으므로, 적국에 들어가 아군 포로를 보호하고 석방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일에 헌신했으니, 그의 수입은 물질적으로 보면 0원이지만 역사에 대한 기여도로 보면 거액이다. 지금의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가 쌓은 독립운동 마일리지는 보훈부의 평가 여하에 좌우되지 않는다.
권승렬과 함께 독립운동 무료 변론에 동참한 변호사들이 결성한 모임이 있다. 위 논문은 "독립운동사건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뒤따랐다"라면서 "항일 변호사 중에 보조를 같이하여 오던 김병로·이인·권승렬·김태영·김용무·허헌 등은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논의한 결과, 항일변론의 조직적 틀인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고 일제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많이 맡아도 '수입 0원'으로 끝날 수 있는 독립운동 변호 활동을 더욱 잘 해내기 위한 권승렬 등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승만의 '특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공작 수사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모습. 권승렬이 걷은 길은 한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정치검찰들과 대조적이었다.
연합뉴스
50세 나이로 8·15 해방을 맞은 권승렬은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행보를 걸었다. 친일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발기인이 되고 독립운동 진영을 억압하는 미 군정하에서 법제처장 등을 맡았다. 또 친일정권인 이승만 정부의 초대 법무부차관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고 법무부 장관이 됐다.
그런 한계를 노정하면서도 그는 친일청산을 지휘했다.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장이 되어 친일파 기소 및 재판을 진두지휘한 일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검찰개혁 대담집인 최강욱·김의겸·금태섭·이정렬·김선수의 <권력과 검찰>은 친일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 와해를 시도한 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때 노덕술이 한 말이 뭐냐면, '다 암살하는 김에 권승렬 검찰총장도 없애자'라고 했어요"라고 들려준다.
권승렬은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에 이어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도 그는 소신을 지키고자 애썼다. 경무대와 연계된 친이승만 세력이 공산 게릴라들의 봉기 가능성을 운운하며 대한정치공작대라는 사설 수사기관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당원으로 몰아 체포하고 고문한 사건도 소신 있게 파헤쳤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도 아랑곳없이 김익진 검찰총장과 보조를 맞춰 사건을 수사했다. 2006년에 <법사학 연구> 제34호에 실린 문준영 부산대 교수의 논문 '헌정 초기의 정치와 사법'은 이렇게 설명한다.
"첩보가 입수된 뒤, 검찰이 수상히 여겨 수사하려 하였으나 대통령은 측근이 수사 중이므로 '검찰은 이 사건에 일체 관여하지 말라'는 특명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권 장관과 김 총장은 대통령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서울지검의 정보부 검사를 수사에 투입하여 1950년 4월 정치공작대원 108명을 검거하였다."
김병로 등과 함께 항일 무료 변론을 벌이며 독립운동 진영을 보호하고자 애쓴 권승렬은 한민당·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에 협력하는 한계를 보이기는 했지만,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및 법무부·검찰을 지휘하면서 친일청산과 인권 보호를 추진했다. 그가 걸은 길어온 지금 한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정치검찰과 대조적이었다. 권승렬은 1980년에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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