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때 부통령을 지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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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정헌법 제25조 제1항은 "대통령의 면직, 사망 또는 사임의 경우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고 규정한다. 제3항은 일시적 직무수행 불능의 경우에는 부통령이 권한대행을 맡도록 규정한다.
미국에서는 제3항보다는 제1항이 주로 활용된다. 1841년 4월 4일에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이 사망하자, 의회에서 '부통령이 권한을 승계할 것인가 대행할 것인가'가 논의됐다. 이 상황에서 존 타일러 부통령은 이틀 뒤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해버렸다. 이 일은 비슷한 상황에서 부통령이 권한대행이 아닌 권한승계를 하도록 만드는 '타일러 선례'가 됐다.
미국의 부통령은 대통령선거로 선출되고 상원의장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한국의 국무총리와 달리 상당히 독자적인 위상을 보유한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 유고 시에 그 직을 아예 승계하기 때문에 기존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가 별로 없다.
그런 제도가 한국 현대사에도 있었다. 미국 스타일의 부통령이 기존 대통령을 대신해 시민혁명 정국을 이끌어갈 기회가 1960년 4·19혁명 때 있었다.
4·19 직후에 허정이 각각 수석국무위원과 국무총리 자격으로 두 차례 권한을 대행한 사례가 인상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원래는 민주당 출신의 장면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 하야 뒤에도 한동안 자유당이 국정을 주도하며 3·15부정선거 및 4·19 발포에 대한 처벌을 방해하는 어이없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정·부통령이 동일 정당 출신일 필요가 없었던 1956년 대선에서 부통령이 된 민주당의 장면은 이승만 하야성명 사흘 전인 1960년 4월 23일까지 부통령직에 있었다. 장면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하야 뒤부터는 그가 대통령이었다. 당시 헌법 제55조 제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장면이 그해 8월 14일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사퇴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제자인 허정이 권한을 대행했던 것이다.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3·15부정선거의 부통령당선자 이기붕이 '사태 수습을 위해 부통령직 사퇴를 고려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에 나왔다. 이기붕의 성명과 장면의 사임 발표는 4월 23일 오전 11시경에 연달아 나왔다. 4월 24일 자 <조선일보> 1면 좌하단에 실린 AFP통신 논평에서도 확인되듯이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이기붕 성명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기붕 성명의 또 다른 핵심은 자신과 이승만이 내각제 개헌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이기붕은 이승만이 권한을 축소한 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AFP 논평은 '이승만의 계속 재임'과 '내각제 개헌'이 장면에게 불리하다고 평했다. 두 가지는 부통령의 입지를 한층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더군다나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이 부통령 사퇴를 고려할 수 있다며 내각제 개헌을 운운하는 모습은 부통령제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이기붕의 성명을 듣고 곧바로 부통령을 그만둔 장면은 총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해 그해 8월 19일 총리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흘 뒤 장면 내각을 출범시켰다.
장면의 선택은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실속 있는 일이었다. 4월 23일 당시에는 대통령직에 욕심 많은 이승만이 사흘 뒤 하야 성명을 발표하리라고 예측하기 힘들었다. 장면이 사흘 뒤 대통령이 됐다면, 비상시국의 국정운영을 내팽개치고 7·29 총선에 출마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각제 총리로 당선되기도 힘들었다.
그 개인으로 봐서는 잘한 선택이지만,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이승만의 잔존세력이 권한대행직을 차지하고 4·19혁명의 본의를 왜곡시키는 것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뒤에 민주당 출신 부통령이 대통령이 됐다면 국민의 열망이 조금은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국가비상시에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정치적 실험을 한국인들이 경험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그 뒤 민의원의장(곽상훈), 참의원의장(백낙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박정희)이 대통령을 대행한 사례도 있지만, 정통성이 더욱 약한 총리(수석국무위원 포함)가 권한대행이 된 사례가 더 많다.
1979년 최규하와 한덕수·최상목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정통성이 약한 권한대행들이 비상시국 와중에 국민을 바라보지 못하고 기존 집권세력에 휘둘리는 일들이 헌정사에 여러 차례 나타났다. 야당 출신 부통령이 비상시국을 이끌 뻔했던 1960년 4월 상황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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