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08 13:50최종 업데이트 25.01.08 13:50
  • 본문듣기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024년 12월 3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연합뉴스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한 한덕수 총리와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직무유기 고발을 당한 최상목 부총리의 모습은, 흔히 말하는 '방탄 총리제'가 지금 같은 권한대행체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제와 어울리지 않는 한국의 국무총리는 실권이 별로 없는데도 헌법상으로는 행정부 제2인자다. 총리제가 없는 1954년 헌법과 내각제를 규정한 1960년 헌법을 제외한 나머지 헌법들에서는 총리가 "대통령의 명을 승하여 행정각부 장관을 통리감독"(1948·1952년 헌법),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1963년·1969년·1972년·1980년·1987년)한다고 규정됐다.


총리의 위상이 그럴싸해 보이는 이런 시스템은 정치적 위기에 빠진 대통령들이 총리를 경질하는 방법으로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데에 활용되곤 했다. 총리들은 대통령에게 발사된 정치적 총탄을 대신 맞고 불명예 퇴진하는 방탄용으로 많이 희생됐다. 이런 방탄 총리가 없었다면 한국 독재자들의 장기 집권은 조금은 더 난관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런 방탄 총리들이 대통령 탄핵소추 상황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확인되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총리나 부총리가 기존 국무위원들과 집권당의 틈 속에서 국민의 명령을 듣기보다는 대통령을 사실상 돕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2016년 박근혜 탄핵소추와 2024년 윤석열 탄핵소추 직후에 벌어진 상황은 시민혁명이나 유사 사태를 초래한 집권세력이 권한대행을 앞세워 집권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경우에 방탄 총리가 국민의 뜻을 왜곡하지 못하게 막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한덕수 전 대행과 최상목 대행이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친일보수세력의 고민이 만들어낸 의외의 결과

한국의 독재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탄총리제를 고안한 것은 아니다. 이는 대통령을 견제하는 세력이 만들어낸 뜻밖의 결과였다.

인촌 김성수는 해방 직후에 미군정의 여당이 된 한민당을 이끌었다. 미군정과의 협력 관계로 인해 그는 대한민국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기에 유리했다. 하지만 미군정 의회 격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그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다.

1946년 10월 선거에서는 부정선거 시비로 그의 당선이 무효가 됐고, 12월 재선거는 아예 낙선으로 끝났다. 1947년 보궐선거 역시 낙선이었다. 결국 그는 5·10 총선을 앞둔 1948년 3월 31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승만에게 완전히 밀리게 됐다.

1947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 1면 좌단 등에서 확인되듯이, 김성수의 한민당은 '친일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친일파에 대한 국민적 분노 속에서 한민당은 대중의 미움을 사고, 지도자 김성수는 연거푸 낙선했다. 이는 친일보수세력이 자기 진영이 아닌 독립운동권 진영에서 대통령 후보를 영입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그들은 그런 이유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밀면서도 정부체제만큼은 내각제를 선호했다. 독립운동권 출신에게 실권을 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제가 아니면 나서지 않겠다는 이승만의 완강한 고집에 밀려, 대통령제를 받아들이되 내각제를 가미하는 절충안을 1948년 헌법에 반영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제하에서 총리가 행정부를 통할하는 이상한 구조가 등장했다.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해 출현한 이 시스템은 현실에서는 정반대로 운용됐다. 대통령의 견제를 뚫고 헌법상 권한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국무총리는 출현하지 못했고, 대통령들은 총리의 권한이 외형상 크게 보이는 점을 이용해 정치적 위기 때마다 그들을 방탄용으로 내세웠다. 견제용으로 만든 제도가 방탄용으로 둔갑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2024년 12월 이후의 권한대행체제에서도 방탄총리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해방 직후 친일보수세력의 고민이 만들어낸 의외의 결과가 윤석열 탄핵정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정통성이 약한 권한대행들

이승만 정권때 부통령을 지낸 장면위키미디어 공용

미국의 수정헌법 제25조 제1항은 "대통령의 면직, 사망 또는 사임의 경우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고 규정한다. 제3항은 일시적 직무수행 불능의 경우에는 부통령이 권한대행을 맡도록 규정한다.

미국에서는 제3항보다는 제1항이 주로 활용된다. 1841년 4월 4일에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이 사망하자, 의회에서 '부통령이 권한을 승계할 것인가 대행할 것인가'가 논의됐다. 이 상황에서 존 타일러 부통령은 이틀 뒤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해버렸다. 이 일은 비슷한 상황에서 부통령이 권한대행이 아닌 권한승계를 하도록 만드는 '타일러 선례'가 됐다.

미국의 부통령은 대통령선거로 선출되고 상원의장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한국의 국무총리와 달리 상당히 독자적인 위상을 보유한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 유고 시에 그 직을 아예 승계하기 때문에 기존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가 별로 없다.

그런 제도가 한국 현대사에도 있었다. 미국 스타일의 부통령이 기존 대통령을 대신해 시민혁명 정국을 이끌어갈 기회가 1960년 4·19혁명 때 있었다.

4·19 직후에 허정이 각각 수석국무위원과 국무총리 자격으로 두 차례 권한을 대행한 사례가 인상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원래는 민주당 출신의 장면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 하야 뒤에도 한동안 자유당이 국정을 주도하며 3·15부정선거 및 4·19 발포에 대한 처벌을 방해하는 어이없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정·부통령이 동일 정당 출신일 필요가 없었던 1956년 대선에서 부통령이 된 민주당의 장면은 이승만 하야성명 사흘 전인 1960년 4월 23일까지 부통령직에 있었다. 장면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하야 뒤부터는 그가 대통령이었다. 당시 헌법 제55조 제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장면이 그해 8월 14일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사퇴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제자인 허정이 권한을 대행했던 것이다.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3·15부정선거의 부통령당선자 이기붕이 '사태 수습을 위해 부통령직 사퇴를 고려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에 나왔다. 이기붕의 성명과 장면의 사임 발표는 4월 23일 오전 11시경에 연달아 나왔다. 4월 24일 자 <조선일보> 1면 좌하단에 실린 AFP통신 논평에서도 확인되듯이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이기붕 성명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기붕 성명의 또 다른 핵심은 자신과 이승만이 내각제 개헌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이기붕은 이승만이 권한을 축소한 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AFP 논평은 '이승만의 계속 재임'과 '내각제 개헌'이 장면에게 불리하다고 평했다. 두 가지는 부통령의 입지를 한층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더군다나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이 부통령 사퇴를 고려할 수 있다며 내각제 개헌을 운운하는 모습은 부통령제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이기붕의 성명을 듣고 곧바로 부통령을 그만둔 장면은 총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해 그해 8월 19일 총리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흘 뒤 장면 내각을 출범시켰다.

장면의 선택은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실속 있는 일이었다. 4월 23일 당시에는 대통령직에 욕심 많은 이승만이 사흘 뒤 하야 성명을 발표하리라고 예측하기 힘들었다. 장면이 사흘 뒤 대통령이 됐다면, 비상시국의 국정운영을 내팽개치고 7·29 총선에 출마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각제 총리로 당선되기도 힘들었다.

그 개인으로 봐서는 잘한 선택이지만,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이승만의 잔존세력이 권한대행직을 차지하고 4·19혁명의 본의를 왜곡시키는 것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뒤에 민주당 출신 부통령이 대통령이 됐다면 국민의 열망이 조금은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장면의 부통령 사임은 국가비상시에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정치적 실험을 한국인들이 경험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그 뒤 민의원의장(곽상훈), 참의원의장(백낙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박정희)이 대통령을 대행한 사례도 있지만, 정통성이 더욱 약한 총리(수석국무위원 포함)가 권한대행이 된 사례가 더 많다.

1979년 최규하와 한덕수·최상목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정통성이 약한 권한대행들이 비상시국 와중에 국민을 바라보지 못하고 기존 집권세력에 휘둘리는 일들이 헌정사에 여러 차례 나타났다. 야당 출신 부통령이 비상시국을 이끌 뻔했던 1960년 4월 상황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일들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