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체포구속' '사회대개혁' '개방농정 철폐' 등을 요구하며 서울로 향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이 21일 오후 서울로 들어서는 서초구 남태령고개에서 경찰에 막혔다. 농민들이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가운데, 서울 도심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수백명이 합세해 함께 농성하고 있다.
권우성
극단의 분열과 보수화의 거대경향, 연속되는 내란 정국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구를 두껍게 가리고 있지만, 나는 2025년의 대한민국이 새로운 출구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 이유가 바로 내란의 카오스에서 발견된 세 개의 '시민주의'에 있다.
첫째로 'MZ세대의 시민주의'에 주목할 수 있다. MZ세대는 신자유주의의 거대경향 속에서 스펙과 경쟁으로 성장한 '신자유주의의 아이들'이다. 능력에 기반한 공정을 외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이 세대의 가치는 민주주의가 위태롭고 정치가 파괴되어도 오로지 자기만을 향해 있었다. 공익과 공유와 공동의 질서에 무관심한 이 세대는 동구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말이 진단된 시대에 성장한 역사를 잃어버린 세대일지도 모른다.
이런 MZ세대가 윤석열의 내란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서사를 잇는 놀라운 변신을 보였다. 386세대가 '박정희의 아이들'에서 '신군부의 도전자'로 변했듯이, 이제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의 아이들'이 '윤석열 체제의 도전자'로 변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윤석열이 준 시대의 선물이 된 셈이다. MZ세대의 시민주의, 특히 이른바 '남태령 대첩'에서 농민과 만난 MZ세대 여성의 시민주의는 2025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밝히는 새로운 희망이다.
둘째로 우리는 계엄군, 즉 '군대의 시민주의'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군은 정치주의와 파벌주의에 오염된 역사 속에서 '시민의 군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윤석열의 내란을 주도한 군의 고위 지휘관들은 여전히 정치주의와 파벌주의의 비극적 과거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윤석열의 내란이 지체되고 실패의 경로에 들어선 데는 민주화 이후 우리 군에 내면화된 '제한적 시민주의'가 있었다.
특히 방첩사의 경우 국군기무사가 해체된 전례를 스스로 떠올리며 합법적 범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문화를 보이기도 했다. 여인형 사령관의 오판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국회에 체포조로 출동한 방첩사 수사관들은 고의적이고 소극적 태도로 시간을 끌었으며, 중앙선관위에 투입된 병력도 방첩사 법무장교단의 판단을 근거로 건물진입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한적이나마 작동했던 계엄군의 시민주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의 또 하나의 시민주의가 우리 군에 뿌리내리는 단초를 발견한 것은 2025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밝히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저녁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계엄군이 점령을 시도한 국회앞에서 시민들이 집결해 계엄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이 국회 담장에 올라가 있다.
권우성
셋째로는 '노동조합의 시민주의'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노동조합은 민주화운동과 같은 사회개혁적 노동운동,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주의, 미조직노동이나 취약계층을 포용하는 사회연대운동, 나아가 최근의 노동기반 공익재단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노조의 시민주의를 확장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노동운동의 계급주의와 정파주의는 노동의 공공성과 보편성 확장의 오랜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조직노동의 배타성과 이기주의로 인한 고립과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의 노동개혁을 겪으면서 시민주의가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사회의 현실에서 노동조합은 가장 강력하게 조직된 시민으로 남았다.
12월 3일 밤 계엄 포고령이 내리는 순간 노동조합은 국회 방어를 위한 가장 발 빠른 동원을 시도했다. 민주노총은 야당 의원들의 국회 진입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합원들이 국회 정문으로 모이라고 긴급 공지했고, 양대 노총, 산별노조 및 연맹과 지역본부 간부들이 조직 단위별로 모여 비상 상황에 대비했다. 내란의 혼돈 속에서 노동조합의 조직된 시민주의가 빛났다.
윤석열의 내란이 3차 내란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헌법재판소에서는 속도감 있는 탄핵 심판의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1990년대 민주주의의 공고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촛불시민'이 지켜냈다. 법과 제도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는 이성적 군중으로서의 촛불시민의 존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범위를 거대한 시위군중으로까지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는 시민의 의지를 다양한 행위 양식으로 표현하는 광장의 민주주의가 대의 민주적 제도에 부가된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표출적 민주주의'(expressive democracy)로 규정한다. '응원봉'으로 바꿔 든 2025년의 표출적 민주주의가 이 혼돈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리라는 확신의 한가운데 새롭게 출현한 세 개의 시민주의가 있다. 2025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서사를 이어갈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조대엽 포럼 사의재 공동대표
포럼 사의재
* 필자 소개 : 조대엽은 현재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포럼 사의재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정책전문가들의 싱크탱크인 사단법인 선우재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장과 노동문제연구소장, 한국사회연구소장 등을 역임했고,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장, 국민경제자문회의 민생분과의장, 금융산업공익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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