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렬사기념관에 전시된 허성숙 동상
박도
논문에 언급된 또 다른 인물인 허성숙(許成淑)에게는 일제에 대한 투쟁이 어느 정도는 아버지에 대한 투쟁의 성격도 띠었다. 그가 그런 투쟁을 벌인 것은 아버지가 봉건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국 기업이 운영하는
<중국민족문화자원고(資源庫)> 사이트에 실린 '조선족 항일여(女)영웅 2 - 허성숙' 편의 부제목은 '부녀가 원수가 된 이야기'다. 이 글은 "허성숙과 아버지 허기형은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 한 뒤 "(아버지는) 일본 침략자에게 의탁해 괴뢰 자위단 단장이 됐다"라고 말한다. 허기형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민병대장이었다. 허성숙은 그런 아버지와 "원수"가 됐다. 그래서 그의 항일투쟁은 특이하게도 항부(抗父)투쟁의 성격을 함께 띠게 됐다.
허성숙은 자위단 일을 그만두시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외면했다. 결국 허성숙은 아버지와 의절하고 항일유격대에 자원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90년에 발행한 <국사관논총> 제11집에 실린 김창순 북한연구소 소장의 논문 '만주 항일연군 연구'는 허성숙이 3·1운동 4년 전인 1915년에 지린성(길림성) 옌지현에서 출생했으며 항일유격대에 들어간 뒤에는 기관총수로 활약했다고 알려준다.
15세 때부터 항일에 참여한 허성숙은 동북인민혁명군(훗날의 동북항일연군)이 수행한 대포차자전투·무송현성전투·동청구전투·임강현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1937년 6월 30일에는 새벽안개를 이용해 산을 포위한 일본군 2000여 명을 내려다보며 기관총을 발사해 타격을 입혔다.
그의 투쟁에서는 사격술뿐 아니라 희생정신도 빛나게 발휘됐다.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구해 돌아오다가 토벌대를 만나자, 전우들을 나무 사이에 숨긴 그는 배낭을 짊어진 채 전봇대 위로 올라갔다. 그런 뒤 수류탄을 던져 적의 접근을 막고 전우들을 보호했다.
전투 현장에서 그는 아버지도 만났다. 동북인민혁명군 부대는 그의 고향 인근에서 허기형의 자위단과 부딪혔다. 위의 <중국민족문화자원고>는 이때가 1934년 7월이라고 알려준다. 지휘부의 명령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책임을 받은 19세의 허성숙은 아버지 쪽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총구를 왜구(원문은 일구·日寇) 쪽으로 겨누십시오. 일본 침략자들이 우리 동포들을 도살하고 우리 마을을 불질러 태웠는데, 여러분은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우리가 연합해 함께 항일합시다!"
그러나 친일파는 냉정했다. 딸의 외침을 외면하고 사격을 명령했다. 항일군도 대응에 나섰고, 결과는 자위단의 패배였다.
위의 방미화·현청하 논문에도 언급됐듯이, 여성들이 항일에 나선 것은 민족해방과 함께 여성해방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들의 항일 현장에서는 여성해방이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 많았다.
위 논문은 "실전에 참여한 여전사들도 전투가 끝난 뒤 남성 전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쉬지 않고 작식(作食)대원을 도와 식량을 장만하고 끼니를 해결하는 일, 옷을 깁거나 빨래를 하는 일들을 자각적으로 찾아 했다"라고 말한다. 자각적으로 했다지만, 남자 대원들이 이를 당연시하며 얼른 나서지 않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볼 수 있다.
허성숙도 그런 봉건적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관총을 들고 최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한 그는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밥을 하거나 세탁하는 일도 함께 담당했다. 허성숙이 겪은 이런 모순이 해결됐다면,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이 무장투쟁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워진 1020 여성들의 투쟁